161화 : 끝과 시작 (4)
장지은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 역시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주변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원래대로라면 레인을 돕기 위해 움직였던 류설영은 장지은을 만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그의 변호를 하며 보증을 서서 가능했다.
“그땐 고맙다.”
“고맙긴요. 류설영 씨에게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기에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더 마음 아팠다.
레인을 소탕한 이후로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장지은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직접 감시한다는 조건으로 류설영은 그녀의 장례식에 갈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의 따가운 시선과 질타를 받아야만 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던 류설영이었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벌써 10층까지 공략했다며? 엄청나다고 해야 할지, 너답다고 해야 할지.”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도 TV 있거든?!”
그가 쏘아보자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사실 내가 류설영을 찾아온 이유는 류설영이 장례식에서 내게 했던 말 때문이다.
“…그래서 블랙 라벨이라는 건 뭔가요?”
블랙 라벨.
몬스터의 등급은 퍼플 라벨이 마지막이다.
전에 싸웠던 아르티아와 블랙 퀸이 퍼플 라벨이었다.
“사실 블랙 라벨이라는 건 내가 그렇게 부를 뿐이야. 실제로는 퍼플 라벨일지도 몰라.”
“류설영 씨는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하셨죠?”
내가 아르티아를 만나기 전에 고층에 있던 류설영은 먼저 아르티아와 만나서 싸운 적이 있었다.
류설영의 실력은 워낙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의 전격을 모르는 상태의 아르티아와 블랙 퀸은 방심한 상태로 전격에 당해서 류설영이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서 블랙 라벨이라고 하는 거야.”
“그 아르티아와 블랙 퀸보다 강하다는 거군요.”
류설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같은 라벨이더라도 수준 차이가 존재하는 건 틀림없다.
그걸 류설영이 모를 리 없다.
즉, 그런 수준 차이까지 고려한다고 해도 아르티아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의미다.
“내 팔을 가져간 놈이야.”
“……!”
류설영은 그렇게 말하며 허전한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봤다.
17층에서 내려올 때 잃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정확한 사정은 몰랐다.
본인도 그다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캐묻지 않았는데…….
“팔을 가져간 게 그 블랙 라벨 몬스터라는 건가요?”
“맞아. 10층까지 갔다면 곧 그놈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네가 알아 둬야 해.”
예전에는 층마다 발생하는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의 수준이 달랐다.
1층 게이트의 몬스터는 2층 게이트의 몬스터보다 약했고, 층을 올라갈수록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가 강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층에서 무작위로 게이트 난이도가 변하기에 의미가 없어졌다.
저층은 이미 몬스터들을 모두 정리한 상태지만, 13층 위로는 아포칼립스 전에 있던 몬스터들도 존재한다.
전에 17층에 갔을 때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떤 몬스터였나요?”
“아르티아나 블랙 퀸과 같은 인간형 몬스터였어. 아니, 정확히는 그림자 같은 놈이었지.”
“그림자요?”
“흐릿한 형체에 일렁거리는 새까만 그림자. 그래서 내가 블랙 라벨이라고 부르는 거야.”
류설영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내 전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어. 다른 무기로 공격해도 정말 그림자를 베는 듯한 감각이었거든.”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천천히 그때를 떠올리는 듯 분한 표정이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라니… 그런 게 가능한가요?”
사실상 무적이나 다름없는 말에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평소엔 인간의 그림자 같은 모습인데, 아무래도 마음대로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모양이야.”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오나요?”
“내 팔을 뺏어 갔을 땐 자신의 손을 낫 모양으로 바꿔서 휘둘렀어.”
마음대로 형태를 변화시키고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몬스터는 우리를 공격해 올 수 있다면 도저히 공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몬스터가 정말 존재한다면 저희가 이기는 게 가능하긴 할까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몇 번이나 계속 공격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거든. 그 몬스터를 만난 건 14층이었어.”
14층이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7층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놈을 만나지 않았던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였나.
“그런데 류설영 씨는 어떻게 놈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던 거죠?”
“14층의 지형은 아직 제대로 된 정보가 없잖아.”
현재까지 알려진 던전의 구조는 13층까지다.
10층까지 빠르게 던전 공략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미 던전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리한 고지에서 몬스터들을 기습하고, 공략해서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14층부터는 전혀 정보가 없다는 거다.
한 번 가 봤던 층이긴 하지만, 내려오기 급급해서 제대로 된 지형 정보를 기억하지 못한다.
“덕분에 14층에서 내려올 때 헤맸거든. 그러다가 유적을 발견했어.”
“…유적이요?”
내가 되묻자, 류설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상당히 큰 구조물이었는데, 주변 숲이 워낙 울창해서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볼 수 없겠더라고. 네가 발견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거기서 그 몬스터를 만난 건가요?”
“던전에 그런 인위적인 구조물이 있는 경우는 드무니까 안을 확인해 보고 싶었어.”
확실히 던전에 그런 구조물은 보기 힘들다.
가끔 게이트에서 발견되는 일도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던전 자체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그런 곳에서 얻는 정보는 중요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앞을 지키고 있더라고. 그 뒤로 정신없이 싸웠지만, 내 팔만 잃고 아무런 대미지도 입힐 수 없었거든.”
“그 뒤로 도망치신 건가요?”
“맞아. 아무래도 그곳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인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멀어지면 쫓아오지 않는 거 같아.”
파수꾼인가.
그 몬스터의 존재는 두려웠지만, 그보다 구조물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외부 게이트에서 에이션트 골렘에 대한 정보를 얻었던 것처럼 그곳에서 던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웬만하면 그곳은 피해 가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겠지.”
“아무리 자리를 이동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대로 둘 순 없어요.”
몬스터라는 건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현재는 그곳을 떠나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무시하고 전진하며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놈이 우리를 공격해 오면 그 피해는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니까.
“일단 내가 아는 건 이 정도야. 그렇게 많은 정보를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아뇨. 충분히 도움이 됐어요. 모르고 있었다면 분명 저희도 큰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요.”
그 류설영이 팔을 잃고도 아무런 대미지를 주지 못한 몬스터다.
정보가 없이 맞서 싸웠다면 조용히 넘어가진 못했겠지.
“그럼 나는 다시 돌아가야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류설영을 보고 그를 불러 멈춰 세웠다.
“류설영 씨!”
“……?”
돌아본 류설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젠가 다시 싸울 수 있으면 좋겠네요.”
내 말에 류설영은 피식 웃고 손을 흔든 뒤 안으로 들어갔다.
***
“오랜만이네요.”
“바쁘실 텐데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나를 발견한 안형석은 한걸음에 달려와서 반갑게 인사했다.
웃옷을 벗고 있는 그는 까무잡잡하고 탄탄한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부탁드린 거니까 직접 찾아와야죠.”
“완벽하게 수리해 뒀습니다.”
그가 건네준 검을 받아 검집에서 꺼냈다.
스르릉.
깨끗한 소리와 함께 검신을 드러낸 화도는 부러지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숍과의 전투에서 화도가 반 토막 나는 바람에 한동안 비숍에게서 뺏은 검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정말 이 검을 제가 받아도 되나요?”
“오히려 이 검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게 영 내키지 않네요.”
내구도가 1밖에 남지 않은 검을 안형석에게 주는 대가로 화도의 수리를 부탁했다.
화도는 특수한 검이라 신아람이 아예 반 토막 나 버린 걸 되돌릴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안형석에게 부탁했다.
지금까지는 이 검이 있어서 화도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내구도가 다해서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아닙니다. 너무 귀한 물건을 받은 것 같아서 부담스러울 지경이네요.”
뭐든 벨 수 있는 검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대장장이에겐 이상향에 가까웠다.
이 검은 심지어 초월 능력까지 벨 수 있었으니 만들 수만 있다면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신아람조차 검의 재료나 구조를 알 수 없다고 했으니 쉽진 않겠지만.
“제가 아는 화도 그대로네요.”
“반으로 부러진 화도의 검신을 되돌려 놓는 건 어렵지 않지만, 새로 만들지는 못해요. 그러니까 완전히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손에 꽉 움켜쥔 화도의 감각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른 검을 쓰느라 잊고 있었던 이 완벽한 손맛에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오직 월하백화식을 위해 만들어진 검.
어떤 검보다 가벼우며, 어떤 검보다 예리한 검.
쐐액!
허공을 한 번 크게 내지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수리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와 주시죠. 최현 씨라면 제가 다른 일은 다 제쳐 두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화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혹시… 신아람 씨가 부탁드린 건 여전히 힘드실까요?”
신아람의 대장간으로 들어와서 함께 장비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보급을 위해 많은 장비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더 많은 대장장이가 필요하다.
안형석이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건 단순히 인력이 늘어나는 걸 떠나서 새로운 대장장이들을 육성하기 위한 좋은 스승을 얻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내가 그에게 이토록 매달리는 것이다.
“최현 씨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드리고 싶지만,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곳에 가면 제가 원하는 건 만들 수 없게 될 테니까요.”
이기적인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장비를 만들고, 그걸 헌터가 써 주는 걸 기뻐하는 안형석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 계속 같은 장비만 만들라는 건 잔인한 부탁이었다.
그래도 나는 공략 총지휘관이라는 자리에 있기에 그의 힘이 절실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이 검과 같은 건 다시 만들 수 없을까요?”
내가 비숍에게서 뺏은 검을 보며 말했다.
뭐든 베는 검.
만약 이 검이 있다면 류설영이 말했던 블랙 라벨의 몬스터를 벨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음… 저도 신아람 씨 생각과 같습니다. 검은 기계 장치가 아니기에 분해해 본다고 해서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지 알 수 없습니다.”
역시 무리인가.
“하지만, 운이 좋으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정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