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끝과 시작 (3)
“얼굴 보기 힘드네.”
“하하.”
이신예의 말에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율이랑은 자주 만나고 있는 거야?”
“…시간 날 때마다 보러 가긴 하는데…….”
“시간 날 때 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가야지.”
옆에서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는 그녀는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우리랑 자주 못 보는 건 이해하지만, 율이는 신경 써야지.”
“잔소리…….”
“뭐라고?”
“아뇨.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나를 쏘아본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던전 공략 총지휘관이라는 자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바쁘고 괴로운 자리였다.
수십 개의 팀에서 올라오는 보고와 건의, 그리고 나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에 그것들을 처리할 여유가 많지 않았다.
덕분에 너무 바쁠 땐 이렇게 이신예가 사무 일을 도와주고 있다.
어째서 그녀냐고 묻는다면, 그녀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쉴 때는 푹 쉬어야 해. 밤새 서류 보고 있다고 좋은 게 아니라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이런 끝없는 잔소리의 지옥이지만, 이신예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업무를 처리한다.
뛰어난 치유계 헌터 능력에 통신계까지 겸비하고 사무 일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이신예를 보고 있으면 신월에서 그녀를 빼 오고 싶을 정도였다.
예전에 길드가 없을 때 사람들이 나를 데려가고 싶었던 건 이런 기분이었나.
“너무 그러지 마시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백진철이 빙긋 웃으며 이신예에게 말했다.
“최현 씨도 스스로 몸 관리 정도는 잘하실 겁니다.”
“이 바보는 그런 거 모른다니까요. 자기가 희생해서 일이 잘 풀리면 만사 오케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괜히 뜨끔해서 시선을 돌리자, 이신예가 다시 한번 나를 노려봤다.
“하하하, 최현 씨를 그렇게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마 이신예 씨뿐일 겁니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던전 사진 쪽으로 시선을 옮긴 백진철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벌써 반년인가. 반년 만에 10층이라니…. 무서울 정도네요.”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 몰랐습니다.”
반년.
6개월 만에 우리는 무려 10층까지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성과였고, 나 역시 이 정도로 빠르게 공략할 거라 생각 못 했다.
“사실 제가 한 건 별로 없지만요.”
“그럴 리가요. 분명 최현 씨가 만들어 낸 성과입니다.”
총지휘관이라는 자리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항상 전장에서 싸우기만 했던 내게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런 일을 맡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몇 번이고 백진철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는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늘어져서 어쩔 수 없이 직책을 맡게 되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빨리 진행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죠.”
10층까지는 꾸역꾸역 힘으로 몰아붙이며 올라올 수 있었다.
문제는 이제 아래층에서 새로 생기는 게이트까지 공략할 전력이 필요하기에 점점 공략이 느려진다는 점이었다.
“뭐, 화이트 소드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이죠.”
“그렇죠.”
이신예의 말대로 이렇게 빠른 공략이 가능했던 건 화이트 소드의 힘이 컸다.
던전 공략을 위해서는 새로운 헌터의 육성이 절실하다고 생각했고, 총지휘관 자리에 오르자마자 헌터 육성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헌터 사관 학교의 교육 구조는 이론만 있을 뿐 실전이 부족했다.
이상만을 외치는 낡은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이재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이재문 씨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백진철이 떨떠름하게 웃음을 지었다.
헌터 협회와 화이트 소드는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화이트 소드의 길드 마스터인 이재문이 협회를 도와줄 리 없었고,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라 그를 찾아가 육성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재문은 예상외로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최현 씨의 부탁이라 들어준 걸 거예요.”
“감사하긴 한데, 어쩐지 무섭네요.”
언젠가 이번 일을 빌미로 뭔가를 부탁해 올 거 같아서 묘한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나도 얼마 전에 사관 학교 찾아갔었는데, 전이랑 완전 달라졌더라.”
“저도 제법 신경 많이 썼거든요.”
이론에 치중한 교육 방식을 없애고, 실전 전투에 대한 대응을 위해 몬스터들의 특징과 약점만 익히도록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단순한 체력 단련이 아닌, 실제 전투에 참여해서 몬스터를 직접 보고 프로 헌터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전장에 익숙해지는 훈련도 함께 진행했다.
안전한 곳에서만 실전 훈련을 하도록 했기에 위험 요소는 없었다.
“화이트 소드의 육성 시스템은 무서울 정도더군요.”
사관 학교의 교육을 맡은 이재문은 그 특유의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인지 무서울 정도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들었다.
헌터 사관 학교를 나온 헌터들이 바로 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혜택까지 만들어 냈다.
덕분에 그동안 인식이 좋지 않던 헌터 사관 학교로 헌터 지망생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일단 저희 길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고생했어. 나도 이것만 끝내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수고하셨어요.”
이신예와 백진철에게 짧게 인사를 한 뒤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총지휘관이라는 직책은 새로 추가된 거니, 원래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병행하고 있다.
덕분에 쉬지 않고 일만 해야 하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듯이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길드 회의실로 들어가자 이미 모여 있던 길드원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너 자꾸 그렇게 늦으면 확 물어 버린다!”
“…어떤 길드 마스터가 지각한다고 뭅니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신아람에게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시끄러! 내가 문다면 무는 거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레이브 길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총지휘관이자 SS급 헌터가 있는 레이브 길드는 순식간에 유명해져서 많은 헌터의 가입 문의를 받았다.
예전엔 누구든 환영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그 이후로 신아람은 새로운 길드원을 받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길드 마스터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으니 우린 변함없이 지내고 있다.
“안 그래도 네 의견이 필요했어.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거든.”
신아람이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타악!
“저녁 메뉴 일식이 좋을까 중식이 좋을까?”
“…….”
“지금 정확히 반반 나뉘었어. 네 의견으로 정해지는 거야.”
“…….”
“왜 그런 얼굴로 보는데!”
우리 길드는 변함없이 지내고 있다.
“둘 다 별론데. 고기 먹죠, 고기.”
“뭐야! 우리 길드는 소수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한다. 길드 마스터의 권한으로 오늘은 중식이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독재다 독재!”
“옳소!”
뭐, 이런 길드라서 좋아할 수밖에 없지만.
“그보다 마스터 저번에 부탁한 거 어떻게 됐나요?”
연신 소리를 지르던 신아람은 내 물음에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몇 번이나 찾아가서 부탁했는데, 매번 거절하더라고. 그래도 계속 찾아가 봐야지.”
헌터의 수가 늘어나면서 생긴 문제가 있다면 장비의 보급이었다.
만들 수 있는 장비는 한정적인데, 장비의 소모가 더 빠르니 점점 부족해질 수밖에.
신아람의 대장간엔 새로운 대장장이들이 많이 들어와서 보급 속도를 늘리고 있지만, 그것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신입 대장장이들은 견습이라 아직 제대로 된 장비를 만들 실력이 부족했다.
반년 만에 좋은 장비를 만드는 건 아무리 그래도 무리겠지.
그래서 전에 만났던 ‘안형석’을 섭외해 달라는 게 내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왜 거절하시는 건가요? 원래 집안 대대로 헌터 무기를 만들던 대장장이 아니었나요?”
“직접 그 사람 대장간에 갔었는데, 엄청난 장인이더라고. 아무래도 이렇게 보급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하나의 완벽한 무기를 만드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것 같아.”
우리를 도와 장비를 만들게 되면 그럭저럭 괜찮은 소모품을 계속 만드는 것과 같았다.
화도처럼 명검을 만들 수 없게 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거겠지.
그런 무기를 만들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몇 번 더 찾아가서 조르면 되겠지.”
“역시 마스터네요.”
신아람의 떼쓰기 기술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기에 그녀를 믿어 보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저희도 다시 전장에 들어가는군요.”
우리 레이브 길드는 휴식기여서 충분히 쉬고 다시 전장에 투입된다.
전투와 총지휘관의 업무를 병행하는 건 상당히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초반에 대략적인 구조를 만들어 둬서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이번에 들어가면 10층까지 공략하겠는걸.”
“아무래도 그렇겠죠.”
현재 10층은 공략 중이다.
다른 층과 달리, 10층은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자리였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바로 이동할 수 있기에 최대한 빨리 공략해야만 한다.
이미 외부에서 10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제작하고 있다.
9층까지는 1층부터 하나씩 올라가며 공략을 진행해야 해서 비효율적인 소모가 컸다.
“벌써 10층인가. 빠르네요.”
유미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러다가 정말 던전 완전 공략에 성공할지도 모르겠어요.”
“던전의 끝이 몇 층인지도 모르는걸. 자, 이제 제대로 회의 시작하자.”
길드 회의에선 전투에 필요한 물품을 확인하고 각자의 포지션을 짜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미 많은 전투를 해 왔기에 그저 확인 작업에 불과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10층은 그래도 새로운 게이트가 생기진 않아서 금방 진행되네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픕니다.”
2층부터 7층까지 3개월이 소요되었고, 8층과 9층을 공략하는데 똑같이 3개월이 걸렸다.
위로 올라갈수록 아래층에서 발생하는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인력이 필요했다.
“헌터 수가 늘어날 때까진 힘들겠지.”
“그럼 저는 들릴 곳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최현 씨는 같이 식사 안 하세요?”
채하나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 그럼 내일 봐요!”
그녀가 나를 붙잡을 걸 알았기에 서둘러 길드를 빠져나왔다.
그 후에 바로 찾아간 곳은 류설영이 갇혀 있는 교도소였다.
면회를 위해 예약을 해 두었고, 내가 찾아가자 바로 류설영이 면회실로 들어왔다.
보라색 수갑을 끼고 있는 그는 전에 봤을 때보다 초췌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마르다니.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능글맞게 말하는 류설영을 보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지은이 장례식 이후로 처음인가.”
그렇게 말한 류설영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