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x9999-159화 (159/176)

159화 : 끝과 시작 (2)

월하백화식, 1공식 목란.

날카롭게 찌른 검은 어떤 것도 꿰뚫는다.

바로 앞에 보이는 분신을 처리하며 이어서 부드럽게 몸을 옆으로 선회한다.

4공식 매화.

옆에서 달려드는 두 명의 분신을 이어서 베어 버린다.

“어째서… 어째서 닿지 않는 거야!”

퀸만 라이프 파워의 효과가 남아 있는 동안 5번 정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서로 버프가 없는 상태에선 내가 그녀에게 질 리 없다.

버프가 있는 동안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압도적으로 나를 몰아붙였지만, 그 후로는 분신들의 검이 전혀 내게 닿지 않았다.

“능력치도 똑같을 텐데, 숫자가 훨씬 많은 내가 지는 게 이상하잖아!”

비명에 가까운 퀸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검술을 겉핥기식으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실력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그래도 상관없어. 이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 내가 이길 테니까.”

확실히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내가 퀸을 이길 가능성은 없다.

퀸의 분신은 점점 늘어 가고, 그 많은 분신은 각자 라이프가 2000개 정도 있다.

늘어나는 분신을 2천 번씩 계속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알아?”

“…….”

퀸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네게 남은 건 분신들뿐이지만, 난 남아 있는 사람이 제법 많다는 거지.”

“……?!”

흠칫 놀란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렸고, 다른 헌터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SS급 헌터 팀원들을 비롯해서 발렌도 보였다.

하아, 무사했구나.

“소용없어! 누가 온다고 해도 이 능력만 있으면……!”

“그래, 그 능력이 있을 때 얘기지.”

“뭐?!”

당황한 퀸을 보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퀸과 싸우는 동안 통신을 써서 유미래에게 미리 부탁해 놨다.

여기로 조민주를 데려와 달라고.

“오랜만이야, 퀸. 이제야 그 로브 안의 얼굴을 보네.”

“……!”

조민주가 퀸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고, 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안 돼!”

“당신이 내게 준 능력이지. 마지막에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순식간에 게이트 안을 잔뜩 채우고 있던 분신들이 사라졌다.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만든 분신은 조민주의 무효화 능력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퀸에게 다가가 검을 겨누었다.

“다 끝났어.”

***

다소 허무하게 끝난 퀸의 마지막은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레인이나 앙그라마이뉴 같은 범죄 집단이 생기지 않기 위해선 이야기의 끝이 이런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저희 협회에서 제작한 수갑입니다. 네이비 스톤을 재료로 해서 초월 능력 자체를 봉인하는 힘을 가졌죠.”

“그런 게 가능한가요?!”

백진철은 남색의 수갑을 손에 들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직접 써 보시겠어요?”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저번에 신월이 레인의 근거지를 기습했고, 그곳에 있는 초월 능력을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연구 시설을 발견했습니다.”

난 그곳에 없었지만, 레인의 근거지는 상당히 컸고, 초월 능력을 다루는 것도 체계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조민주 씨의 능력을 만든 데이터를 얻었거든요. 그걸 기반으로 제작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 여러 곳에 쓰일 수 있겠네요.”

“초월 능력은 저희가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해도 퀸처럼 수술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부여할 수 없으니 아무런 쓸모가 없겠지만요.”

이런 수갑이 있으면 퀸을 감옥에 가두는 것만으로도 괜찮겠지.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백진철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너덜너덜해진 상태의 우리 팀은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장비는 모두 내구도가 바닥난 상태였고, 지쳐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나마 나는 몇 번 부활해서 기력을 회복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도 못했으니까.

“당분간 휴가 좀 내겠습니다.”

“저도요.”

정보라와 도진욱의 말에 백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쉬셔도 좋습니다. 이번 작전과 관련하여 보상에 대한 부분은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죠.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이제 편히 쉬세요.”

2층에 있는 공략 본부에서 나온 우리들은 기지개를 켜며 굳은 몸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선 바로 던전 밖으로 나가서 쉬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긴 거 같긴 한데, 상태만 보면 우리가 완패한 느낌이네요.”

“…그러게요.”

축 처져서 걸어 다니는 우리의 모습은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일단 공략 본부에서 최대한 회복한 뒤에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고생하셨어요.”

“저보단 최현 씨가 고생했죠.”

계속 싸우느라 정신력이 남아나질 않은 채하나가 다른 치유계 헌터에게 치료를 받고 돌아왔다.

얼마나 힘들게 싸웠으면 채하나가 정신력이 바닥날 정도였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게 이렇게 힘든 작전에 왜 지원한 거예요.”

“맞아요. 괜히 지원했어요. 최현 씨랑 같이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지원한 건데.”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다른 분들이 너무 강해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걸요.”

“채하나 씨는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해서 문제에요.”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그녀의 버프 능력은 S급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방어 능력과 회복 능력이 다른 치유계 헌터에 비해 부족했지만, 지금은 그쪽도 실력이 늘었다.

버프계 헌터는 숫자도 많지 않은데 채하나의 평가가 너무 낮다.

“괜찮아요. 저는 그렇게 큰 꿈이나 목표가 있는 게 아닌걸요. 그냥 최현 씨 옆에서 계속 같이 싸우고 싶을 뿐이에요.”

“…채하나 씨는 어째서 저한테 그렇게 집착하시는 건가요?”

집착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그녀의 과도한 친절이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분명 10층에 갇혀 있던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내가 갈 때까지 혼자서 살아남은 건 순전히 그녀의 능력인데, 마치 내 도움에 목숨을 구한 것처럼 말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최현 씨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동굴에서 혼자 버티며 몇 번이나 그만하고 목숨을 끊을까 생각했거든요.”

“…….”

“어차피 저는 가족도 없고, 꿈이나 목표도 없었으니까요. 저를 필요로 하는 곳도 없고, 그런 일까지 겪어서 더 이상 헌터 일을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최현 씨가 구하러 왔을 땐 정말 기뻤어요.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누구보다 살고 싶었던 거겠죠. 던전에서 나오고 길드에 들어가서 동료들이 생기고, 최현 씨 옆에 있으면 몬스터와 싸우는 것도 무섭지 않았어요. 덕분에 다시 헌터 일을 하면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푸흡. 형씨, 쑥스러워하는 거야?”

“발렌 제발 조용히 해.”

어쩐지 채하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최현 씨는 항상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고 말하시지만, 이렇게 얘기하면 최현 씨는 저에게 은인이 맞죠? 그때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2층을 공략하고 있어요. 제가 10층에 있다는 걸 안다고 해도 구조대를 보내거나 하진 않았겠죠.”

10층까지 올려 보낼 여유도 없을 테고, 그때 당시엔 채하나라는 헌터의 가치가 높지 않았으니 협회에서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도 않았겠지.

“최현 씨가 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직도 10층에 있거나 죽었을 거예요. 그렇죠?”

어쩐지 얼굴이 붉어져서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굳이 저에게 꿈이나 목표가 뭐냐고 묻는다면, 최현 씨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거예요.”

“제 바람이요?”

“던전의 공략이 목표 아니에요? 최현 씨가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옆에서 같이 싸울게요.”

누군가가 나를 믿어 주고 의지해 주고 함께해 준다는 건 기쁜 일이다.

퀸이 했던 말에 잠깐이나마 흔들렸었던 건 사실이다.

정말 던전을 공략하는 게 틀린 일이면 어떡하지?

누군가 던전을 공략하는 날 원망하고 미워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채하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런 말들이 다 바보같이 느껴진다.

“이젠 제가 부탁드릴게요. 앞으로도 같이 싸워 주세요. 채하나 씨의 능력이 꼭 필요하니까요.”

“에헴. 맨입으로요?”

“……?”

그녀의 말에 멍하니 바라보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에요.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줘요.”

“아, 먹고 싶은 거 뭐든 사 줄게요.”

채하나와 떠들고 있는 사이에 우리 앞으로 신아람이 다가왔다.

“이거 오붓한 시간 보내는데 미안하네. 사실 꼴 보기 싫어서 끼어든 거야.”

“굳이 속마음까지 얘기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신아람은 가만히 우리를 보다가 양팔로 나와 채하나를 껴안았다.

“고생했어. 정말로 고생했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뭐야, 마스터 울어요?!”

“시끄러! 지금 팔 풀고 나가면 죽인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면서요!”

레인과 앙그라마이뉴가 정리되고 헌터 협회는 이번 사건에 대해 조금의 생략도 없이 모든 것을 공개했다.

과거에도 헌터들의 일탈 행위는 존재했다.

그들의 능력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능력이었으니까.

몬스터와 맞서 싸우는 능력이지만, 동시에 나쁜 쪽으로 쓰면 몬스터보다 위협적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세간이 시선이 쏠려 있었고, 백진철은 그에 현명하게 대응한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 한숨 돌리겠네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각자 정리를 마친 뒤에 SS급 팀원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를 소집한 백진철은 여느 때처럼 갈색 정장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잘 쉬셨나요? 처리 보고 같은 거니 편하게 들어 주시면 됩니다.”

옆에 있는 모니터가 켜지며 화면에 퀸의 얼굴이 떠올랐다.

“‘민지아’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레인이라는 길드의 실세로 이번 사건의 주범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녀의 처리를 놓고 얘기가 많아서 이제야 보고를 드리네요. 아마 언론을 통해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백진철은 다시 모니터에 다른 화면을 띄웠다.

저번에 우리에게 보여 줬던 남색의 수갑이었다.

“민지아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아서 평생 이 수갑을 끼고 감옥에 갇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희는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대헌터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조민주 씨와 이선우 양을 포함해서 헌터에 대응할 수 있는 팀이죠.”

확실히 조민주의 무효화 능력이 있으면 초월 능력에 기대는 헌터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그리고 저희는 다시 던전 공략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공략을 방해했던 조직들도 사라졌고, 공략에도 어느 정도 체계화가 잡혔으니 점점 속도가 붙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은 백진철이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아니, 저희 헌터 협회는 그 던전 공략의 총지휘관을 최현 씨가 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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