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끝과 시작 (1)
적이 피하지만 않는다면 막을 수 없는 공격으로 일격에 베어 버린다.
수도 없이 많았던 몬스터를 하나씩 베어 가며 하은주와 퀸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고, 두 사람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왜 죽지 않는 거야!”
화살이 날아와서 박히고, 뒤에서 데스나이트가 검을 휘둘러도 무시하며 오직 공격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 나는 ‘이모탈’을 쓰고 앞에 있는 몬스터를 베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
각성 이모탈은 통증조차 지워 주는 효과가 있기에 어떤 공격이 날아온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줄어드는 라이프보다 오히려 몬스터를 처리해서 늘어나는 라이프가 많으니까 상관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게 중얼거린 하은주의 뒤에서 리치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드득!
“……!”
리치왕은 등장하자마자 내 다리를 얼려 버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몬스터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쌔엥-!
몬스터들의 공격에 순식간에 라이프가 5개나 날아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리치왕을 죽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뿐.
“아무리 목숨이 많다고 해도 움직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도 없지.”
“그렇지. 움직이지 못할 때 얘기지만.”
이미 장비를 검은 새의 깃털로 바꿔 놓았고, 체력이 깎이는 순간, 패시브가 발동되었다.
[Passive - 붉은 새 LV.Max
체력이 10% 이하로 남을 시 발동한다.
모든 상태 이상을 없애며, 10분 동안 다른 상태 이상에 걸리지 않는다.]
갑옷이 붉은색으로 변하며 나를 묶고 있던 얼음이 사라졌고, 동시에 하은주와 리치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쐐액!
앞을 막아서는 다른 몬스터들을 쉬지 않고 베어 내며 거리를 좁혀갔다.
“뭐야! 왜 얼지 않는 거야!”
리치왕이 아무리 마법을 써도 갑옷의 효과 때문에 얼어붙는 일은 없었다.
리치왕의 마법은 강력했기에 얼진 않았지만, 대미지는 모조리 들어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4개의 라이프를 소모하게 하다니…….
푸욱!
“…이제 끝났어.”
마지막으로 하은주의 앞을 막아선 건 리치왕이었다.
검은 그대로 리치왕의 가슴을 꿰뚫고 뒤에 있는 하은주까지 닿았다.
스르릉.
검을 뽑아내자, 하은주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면 자신이 죽을 각오도 해야지.”
“컥… 커헉… 사… 살려 줘.”
하은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멀리 떨어져 있는 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퀸의 눈동자엔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당연한 상황이라는 듯이 죽어 가는 하은주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표정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에에엑!”
하은주가 죽어 가는 동안 몬스터들은 갑자기 괴로운 듯 발버둥 치기 시작했고, 귀찮아지기 전에 앞에 있는 리치왕부터 처리했다.
거칠게 숨을 토해 내던 하은주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퀸에게 향했다.
“…지금 그 몸도 분신인가.”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여유로운 건 믿는 구석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진짜예요.”
“그런 것 치곤 너무 여유로운데?”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녀를 베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너 괜찮아?!”
머릿속에 들려온 이신예의 목소리에 바로 대답했다.
“네. 무사해요. 하은주는 처리했습니다. 퀸도 여기 있어요.”
“퀸이 던전 안에 있었다고?!”
“그보다 아래는 괜찮아요?”
내 물음에 한숨을 내쉰 이신예가 말했다.
“하아, 이제야 숨을 돌릴 수 있게 됐어.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거든. 앙그라마이뉴도 더 이상 우리와 싸울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고, 곧 정리될 거 같아.”
“알겠어요. 저도 퀸까지 처리하고 내려갈게요.”
“조심해.”
이신예와 통신을 마치고 다시 퀸에게 시선을 옮겼다.
“죽지도 않고 묶어둘 수도 없다니… 정말 무적이나 다름없네요.”
“맞아. 여기서 끝이야. 넌 날 이기지 못할 거거든.”
내 말을 들은 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의 웃음은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최현 씨는 어떤 초월 능력이 최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절대 죽지 않는 능력?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아니면, 몬스터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일까요?”
퀸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하은주를 처리했기에 아래쪽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몬스터들이 날뛰면 앙그라마이뉴와 몬스터가 한 번에 팀원들을 공격할 일도 없고, 지휘를 잃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그들에게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그래서 그 능력들을 나한테 줄 테니까 손을 잡자고 하는 거냐?”
“아뇨. 최현 씨는 그런 게 통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살짝 미소를 지은 그녀가 허리춤에 검을 뽑았다.
그냥 가지고 다니는 검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을 다룰 수 있는 건가.
“나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걸.”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녀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정말 그게 방법이 될 것 같아?”
사실 퀸의 본체를 만나는 건 처음이기에 그녀가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검술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의 나를 이길 수 없다.
“네가 날 이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 있었다면, 하은주가 죽는 걸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그건 틀렸어요. 애초에 그녀는 이용 가치가 없었기에 더 이상 살려 둘 의미도 없었을 뿐이에요.”
검을 쥐고 자세를 잡는 퀸을 보며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빈틈없는 깔끔한 자세였다.
자세만 보고 실력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예 검술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런 자세가 나올 수 없다.
“아까 물어봤죠? 어떤 초월 능력이 최강이냐고.”
“……?”
“상대방의 능력을 카피하는 능력이죠.”
그녀가 옆쪽으로 손바닥을 펼치자, 똑같이 생긴 분신이 만들어졌다.
하나씩 하나씩 분신이 늘어나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다는 거 모르겠어?”
“보통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지금 만든 분신은 다를걸요.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쓴 상태니까요.”
“…뭐?”
“복수의 능력이라는 건 2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3가지. 마지막 제 능력은 ‘카피’거든요.”
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이어지면 안 될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신들은 능력을 쓸 수 없지만, 능력을 쓴 상태로 분신을 만들면 그게 이어지죠.”
파악!
내가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퀸의 분신들도 내게 달려들었다.
벌써 5명이나 되는 분신들의 움직임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한 분신들이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둘러쌌다.
그 사이에 퀸은 계속해서 새로운 분신을 만들고 있었다.
4공식, 매화.
쐐액!
검을 끌어당겨서 단숨에 뿜어내 앞에 있는 분신을 두 동강 냈다.
“……!”
사라져야 할 분신은 멀쩡하게 몸이 붙은 채로 서 있었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스킬 이름은 ‘이모탈’이라고 하는군요.”
“너……!”
진짜로 내 능력을 카피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 그리고 이모탈까지 쓴 상태로 만든 분신이에요. 10분 동안은 죽을 일이 없겠군요.”
“카피라니…! 그딴 말도 안 되는…….”
“상대방의 능력을 현재 상태 그대로 훔치는 능력. 거기에 저는 분신 능력도 있죠. 1 : 1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능력 아닌가요?”
웃음을 머금은 퀸을 보고 반대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내 능력치와 라이프까지 훔쳤다는 건가.
그녀 말대로 같은 능력을 가진 채 분신을 만들 수 있다면 이기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최현 씨를 쓰러뜨리면 최현 씨의 능력까지 제가 흡수할게요. 그럼 저는 분신과 라이프, 그리고 카피까지 가진 최강의 존재가 되는 거죠.”
“돈이 목적인 거 아니었어? 하은주랑 같은 야망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
퀸은 현실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돈에 의해 움직이고 이익과 손해를 철저하게 분류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돈은 필요한 걸 갖기 위해 원하는 거죠. 하지만 저 스스로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면 갖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는걸요.”
“제정신이 아니군.”
일부러 대화를 이어가며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파훼할 수 있는 작전을 생각했다.
그녀 말대로 혼자서 카피라는 능력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그녀에겐 분신이라는 능력이 있어서 지금도 점점 분신 숫자를 늘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든 내 검이 그녀를 찌른다고 해도 라이프가 하나 줄어들 뿐이다.
“어때요? 막상 적으로 만나니까 최현 씨의 능력이 얼마나 사기인지 느껴지시나요?”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까진 내가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적이 내 능력을 갖고 있으니 도저히 어떻게 이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최현 씨의 버프 시간을 슬슬 끝나죠?”
“…….”
전처럼 대충 내 스킬이 어떤 게 있는지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히 내 스킬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이기에 숨길 수도 없다.
라이프 파워는 곧 지속 시간이 끝나고, 이모탈은 진즉 끝났다.
그렇다면 상대는 버프를 쓰고 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면 대처할 수단이 없다는 거다.
“그럼 최현 씨도 정말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떨어 보시죠. 이 게이트 안에 제 분신을 모두 풀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
죽어도 부활하면 다시 죽이는 게 가능하다.
그녀의 능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분명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점점 분신이 늘어나면 내가 빠져나올 수 있는 확률도 줄어들겠지.
쌔엥-!
검을 들고 달려드는 수많은 분신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움직였다.
퀸에게는 없고, 내겐 있는 것.
그건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검술밖에 없다.
분신의 검술을 몇 번쯤 보고 나서 바로 깨달았다.
분명 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허접한 정도라는 것을.
“곧 버프가 사라질 텐데 그렇게 도망치고 있을 여유가 있나요?”
“신경 꺼!”
아무리 카피라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퀸은 절대 훔칠 수 없는 것.
1공식, 목란.
단숨에 앞에 있는 분신의 가슴을 꿰뚫고, 이어서 화왕을 사용했다.
쌔엥-!
옆으로 쭉 검을 그으며 분신을 한꺼번에 베었다.
“발버둥 치셔도 제 분신은 죽지 않거든요.”
월하백화식은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런 허접한 검술에 당할 정도로 약한 검술도 아니다.
초월 능력에만 기대는 퀸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 있다.
“항상 내가 듣던 말인데 직접 내 입으로 말하게 될 줄 몰랐네.”
“…그게 무슨 말이죠?”
퀸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그래 왔듯이 방법이 없어도 무식하게 싸우는 게 내 특기다.
“죽을 때까지 죽여 줄 테니까 덤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