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5층 공략전 (4)
“복수의 능력? 여러 개의 초월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그런 케이스가 없었을 뿐, 왜 안 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하은주에게 그 분신 능력을 쓴 건 원래 갖고 있던 것과 다른 능력인가.”
“아뇨. 여러 개의 능력은 제각기 성장하거든요. 분신 능력이 성장해서 다른 사람의 분신을 만들 수 있게 된 것뿐이에요.”
퀸과 대화를 하며 머릿속으로는 하은주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려 봐야 내게 좋을 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무작위로 하은주의 분신을 베고 있는데, 그사이에 숨어 있을 리도 없고, 이런 탁 트인 던전 속에서 하은주가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앙그라마이뉴와 손을 잡은 이유가 뭐지?”
분명 킹이 죽었을 때 앙그라마이뉴와 레인은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저는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주의라서요. 길드 모두를 잃은 저에게 선택권은 없었죠. 앙그라마이뉴에서도 저를 필요로 했고,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다시 거래했을 뿐이에요.”
레인은 확실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그 후로는 계속 외부의 초월 능력 사용을 감지하고 있었는데, 퀸이 던전 안에 있다는 건 SS급 팀으로 처음 매복에 성공했을 때 바로 이곳으로 도망쳤다는 말이 된다.
즉, 처음부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뒀다는 거군.
“미안하지만, 최현 씨는 여기서 저랑 놀아 주셔야겠어요.”
마땅히 다른 장소가 떠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기 있는 분신들을 무시하고 갈 수도 없다.
혹여나 이곳에 정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쌔엥-!
퀸의 분신을 베어 버리고 바로 옆에 있던 하은주의 분신들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찾을지는 다음 문제고, 일단은 이곳에 있는 분신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분신 자체를 이곳으로 이동시키는 능력은 없으니 새로운 분신을 보내면 내게 위치가 발각된다.
“최현 씨는 절대 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콰직!
마지막 하은주의 분신까지 쓰러뜨리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넓게 펼쳐진 사막의 풍경 속에서 눈에 보이는 거라곤 곳곳에 흩어져 있는 푸른색의 게이트 입구뿐이었다.
잠깐… 게이트?
게이트 안에 숨는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바로 근처에 보이는 게이트를 향해 이동했다.
하은주 능력으로 몬스터를 세뇌하는 건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혼자서 계속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세뇌하는 건 버거울 테니 게이트 근처에 숨진 않았겠지.
하지만 미리 다른 길드원들과 게이트 하나를 통째로 점령하고 있다면 그곳을 은신처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느 게이트냐는 건데.”
6층은 아직 전혀 공략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수많은 게이트 속에서 어떤 게이트에 하은주가 숨어 있을지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최현 씨 들리세요?!”
“유미래 씨?”
“지금 저는 이선우 양이랑 같이 있어요. 상황은 이신예 씨에게 대충 전달받았어요.”
유미래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선 동시다발적으로 전투가 일어나서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지만, 6층에서 초월 능력을 감지했어요.”
“그게 어디죠?! 6층에 올라오고 나선 초월 능력을 쓰지 않았으니 제가 아닐 거에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옆에 있는 이선우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나서 다시 내게 말했다.
“일단 최현 씨의 위치를 파악해야 해요. 초월 능력을 써 보시겠어요?”
“초월 능력이요?”
당장 쓸 수 있는 능력은 라이프 룰렛 정도인데 그건 라이프를 소모하게 된다.
굳이 허튼 곳에 라이프를 쓰고 싶지 않았기에 잠시 고민하다 ‘복습’을 사용하기로 했다.
전에 죽은 걸 3자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스킬이며 라이프를 소모하지 않는다.
“위치를 찾았어요. 최현 씨 기준으로 6층 계단을 바라봐 주세요.”
“네. 몸을 틀었어요.”
“거기서 4시 방향으로 대략 300m 지점이에요.”
유미래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게이트를 찾기 위해 달려갔다.
다행히 이 근처에 있는 게이트는 하나뿐이었고, 뜨거운 모래 위에서 숨을 크게 내뱉었다.
“후우.”
제발 이곳에 놈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쐐액!
“……!”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날아오는 묵직한 검이 내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체력이 단숨에 반 토막 나는 걸 보며 옆으로 몸을 굴려 거리를 벌렸다.
“젠장.”
게이트 안으로 들어올 땐 아주 잠깐이지만 정신이 희미해져서 다시 주변을 확인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몬스터가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그 찰나의 순간에 기습하는 일은 없지만, 하은주의 능력이라면 가능하지.
“이런, 한 방에 죽이지 못했네요.”
“…정답이네.”
기습에 성공한 건 하은주 쪽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웃고 있었고, 그녀의 표정은 썩어 있었다.
하은주 주변에 일렁이는 살기만 봐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탐탁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주변에는 10마리가 넘는 데스나이트가 그녀를 지키고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스켈레톤이 내게 무기를 겨눴다.
“많이도 모아 놨네. 5층에 있는 몬스터까지 합치면 수가 엄청나겠는데.”
저번에 유한성의 공간에 모았던 숫자보다 오히려 오늘 본 몬스터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당신에게 당한 이후로 잠도 자지 않고 몬스터만 모았거든요. 당신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집념으로.”
“그런 것 치곤 떨고 있는데?”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그녀의 손은 크게 떨리고 있었다.
내 말에 당황한 하은주는 급히 자신의 손을 숨겼다.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희열 때문이겠죠. 그게 아니라면 분노던가.”
“정말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여기 있는 몬스터들과 네가 만들어 둔 함정이나 전략에 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내 라이프 하나일 뿐이야.”
여기 있는 몬스터를 벨 때마다 내 라이프는 늘어난다.
그리고 아직 라이프 파워 효과가 남아 있으니 능력치를 흡수해서 더 강해지겠지.
“최현 씨의 목적은 뭐죠?”
옆에서 나타난 퀸이 물었다.
“이건 본체인가? 매일 분신만 봐서 본체를 만나는 건 처음이네.”
한 번에 둘을 모두 처리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던전이 공략되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또 무슨 궤변을…….”
“던전은 누군가에겐 끔찍한 곳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자리나 다름없어요. 만약 던전의 완전 공략이 이루어진다면 헌터들은 어떻게 되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전에 류설영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답이라고 생각한 게 모두에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
“던전의 완전 공략이 이루어지게 되면 던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몰라요. 그럼 헌터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어디서 돈을 벌고, 앞으로 뭘 하게 되는 건가요?”
내 동요를 눈치챘는지 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정말 모두가 던전이 사라지는 걸 원하고 있나요? 단순히 헌터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던전에서 얻은 재료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나, 그걸 파는 사람, 그리고 그런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모두 직업을 잃게 되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저희와 손을 잡으시죠.”
퀸은 그렇게 말하며 새하얀 피부의 손을 내밀었다.
“던전이 존재하는 한 저희는 언제까지고 돈을 벌 수 있어요. 결국, 세상은 돈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가질 수 있어요. 아래에 있는 SS급 헌터 팀은 현재 헌터들 중에서 최강자들로 만들어진 팀이죠. 그런 팀이 지금 몬스터 군단에 애먹고 있잖아요. 최현 씨만 저희에게 온다면 저희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겁니다.”
퀸의 말이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푸흡.”
“……?”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의 퀸이 멍하니 나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던전을 완전 공략한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잘못 짚었어. 난 모두를 위해 사는 영웅이 아니거든.”
류설영은 그때 그런 말도 했다.
내가 생각한 정답을 잊지 말라고.
“영웅은커녕 오히려 이기적인 사람이지. 난 어렸을 때 부모님이 던전에서 목숨을 잃고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거든. 딱히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서 던전을 공략하려는 게 아니야. 그 거지 같은 시간에 대해 화풀이하고 싶은 거뿐이지.”
“무슨… 당신은 분명 정의로운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막기 위해 이곳에…….”
하은주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는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냥 너희가 던전 공략을 방해하는 게 싫었을 뿐이야. 누군가는 직장을 잃고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거든.”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백진철은 믿음직스럽고 대단한 사람이다.
던전 완전 공략이 정말 가능한지도 모르고, 그 후의 이야기까지 걱정하기엔 나는 그리 머리가 좋지 않다.
“헌터는 몬스터와 싸우는 사람들이거든. 누군가의 일자리를 걱정하기엔 머릿속이 복잡해서 말이지. 뭐, 그렇게 따지면 몬스터를 죽이며 남은 몬스터의 가족들까지 걱정해 줘야겠네.”
내 비아냥에 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 라이프는 지금 2천 개가 넘거든. 어디 할 수 있으면 날 2천 번 죽여 봐.”
“뭐든 가질 수 있다고! 그 잔뜩 있는 목숨에 다른 초월 능력, 다른 마력계 능력까지 생긴다면 신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 그걸 거절한다고?!”
“제정신이 아니구만.”
잡담은 끝났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타악!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는 순간, 스켈레톤 궁사들이 동시에 내게 화살을 날렸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을 보고 칠흑의 묵갑으로 최대한 멀리까지 블링크를 사용했다.
카가가각!
“……!”
데스나이트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데스나이트는 커다란 검을 들어서 내 공격을 막아 내려 했다.
물론 이 검은 그런 하찮은 검으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데스나이트의 검과 함께 놈을 두 동강 내자, 퀸과 하은주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데스나이트를…….”
처음 게이트에 갇혔을 때 이 데스나이트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라이프를 소모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데스나이트를 이젠 일격으로 쓰러뜨리고 있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로운걸.
한껏 거만한 말을 하긴 했지만, 지금 쓰고 있는 이 검의 내구도는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다른 무기라곤 인벤토리에 있는 하성이 형의 검뿐.
여유롭게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고 있을 순 없다는 뜻이다.
“바로 왕을 잡으러 가 볼까.”
하은주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사이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몰려들었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쪽으로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