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5층 공략전 (1)
결과적으로 보면 레인 소탕은 90% 정도 성공했다.
남은 건 퀸뿐이고, 초월 능력을 감시하고 있는 이상, 전처럼 능력을 쓸 순 없을 거다.
그리고 헌터 협회는 대대적으로 이번 작전이 성공했다고 보도를 냈다.
다시 레인에 가담하는 헌터가 없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은주를 어떻게 잡을 수 있죠?”
도진욱의 물음에 백진철이 내게 시선을 옮겼다.
“다른 분들이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동안 최현 씨가 하은주를 처리하는 겁니다.”
“…진심입니까?”
허무맹랑한 작전에 충격을 받아서 멍하니 백진철을 바라봤다.
애초에 이걸 작전이라고 해도 되나.
“진심이죠. 앙그라마이뉴와 싸우기 위해선 오직 이 작전밖에 없습니다. 물론 상대도 알고 있겠지만, 저희에게 선택지는 없습니다. 어떤 꼼수도 없다는 얘기죠.”
그 말엔 나 역시 동의한다.
항상 앙그라마이뉴와 싸우는 이상적인 그림을 생각해 보지만, 정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숫자도 많고, 몬스터 부대까지 다루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희가 싸우기에 불리해진다는 건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죠.”
“그럼 인원은 저희 6명인가요?”
나, 차윤지, 정보라, 도진욱, 이신예, 그리고 채하나.
문득 팀원 수를 꼽아 보다가 차윤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윤지 씨 몸은 괜찮아요?”
저번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었기에 그녀의 컨디션이 걱정됐다.
“괜찮아. 치료는 다 끝났어.”
아무리 치유계 헌터에게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그런 부상 후엔 후유증이 있기 마련이다.
전에 아르티아와 싸운 후에 그녀는 후유증을 이겨 내기 위해 한참이나 재활 훈련을 해야만 했다.
이번엔 그녀의 전투를 보지 못했기에 얼마나 큰 부상인지 알 수 없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신예 씨?”
“괜찮을 리 없잖아.”
뒤에서 듣고 있던 이신예가 한숨을 푹 내쉬며 차윤지에게 걸어갔다.
“어깨랑 다리 쪽 부상이 심했어. 솔직히 한 달 정도는 쉬어야 하는 부상이었는데 얼마 전에 레인 토벌 작전에도 참가했잖아.”
이신예가 차윤지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워낙 고집불통이라 내 말은 듣지도 않겠지만, 안정을 취하는 게 맞아. 만약 전투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전처럼 과격하게 전투를 하는 건 무리일 테고.”
“큰일이네요.”
조금이라도 전력이 아쉬운 상황에서 차윤지가 소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건 우리 팀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앙그라마이뉴와의 싸움이 살살 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난 괜찮아. 팀에 폐가 된다고 생각하면 말할 테니까.”
“알겠어요. 어쨌든 이 팀의 팀장은 차윤지 씨니까 차윤지 씨의 의견을 따르는 게 맞겠죠.”
그녀가 전투에 있어서 고집이 세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에 매달리는 바보 같은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냉정하게 전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기에 일단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싸워 온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저희가 이길 확률이 높아지겠죠.”
백진철은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어떻게든 하은주만 처리할 수 있다면 이 지겨운 싸움도 끝이니까.
***
“못 보던 검이네.”
“저번에 레인 간부랑 싸우고 뺏은 검이에요. 놈이랑 싸우다가 제 검이 다 망가졌거든요.”
차윤지는 흥미롭게 내가 새로 얻은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든 다 벨 수 있는 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무기지만, 월하백화식을 쓰기엔 좋은 검이 아니었다.
일단 화도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고, 검의 길이가 화도보다 짧았다.
조금의 차이로도 민감한 월하백화식이기에 불편할 수밖에.
“지나갔어.”
우리는 5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몬스터들을 피해서 이동하고 있다.
우리에겐 그 누구보다 우수한 발렌의 후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언제까지 피해서 올라갈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선 전투하고 있었다.
“그보다 정말 놀랐어요. 몬스터가 친구라니…….”
정보라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발렌의 힘을 빌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정보라와 도진욱에게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어떻게 몬스터랑 친구가 될 수 있죠?”
도진욱의 표정은 정보라와는 달랐다.
혐오가 섞인 표정.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은 이해한다.
항상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 왔던 적이 몬스터였으니 몬스터와 동료가 된다는 게 참을 수 없는 거겠지.
하지만 어쨌든 발렌의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그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렌이 없었으면 지금 몬스터들과 하나하나 싸우면서 이동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만큼 전력 손실도 컸을 거고요.”
“…….”
미간을 찌푸린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짜증 나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그와 말다툼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어때 발렌?”
“괜찮아. 이동해도 돼.”
발렌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는 다시 앞으로 이동했다.
“미안해, 발렌.”
“갑자기 왜?”
“이렇게 애써 주고 있는데 저런 소리나 듣게 하는 게 미안해서.”
“뭘 새삼스럽게. 저런 반응이 당연한 거지.”
발렌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진욱보다 발렌이 훨씬 어른이구나.
4층은 3층에 비해 밝은 분위기였다.
넓고 커다란 통로가 이어진 형태의 구조로, 벽이 잿빛이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곳에 처음 들어오는 거라면 끔찍하네요.”
물론 우리에겐 지도가 있다.
예전에 이미 공략을 마쳤던 층이기에 던전 내부 지도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5층으로 가는 계단까지 가장 빠른 길을 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대로 쭉 가면 되는데, 여기선 돌아가는 길이 없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한 번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그나마 계단과 그리 멀지 않은 장소라 다행이다.
몬스터와 싸우면 피 냄새가 나고 그로 인해 다른 몬스터을 불러온다.
그 전에 서둘러서 5층까지 올라간다면…….
“여긴 저 혼자 처리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정보라가 앞으로 나섰다.
“네? 하지만…….”
정보라의 전력은 최대한 아껴 두고 싶었다.
앙그라마이뉴와의 전투에서 그녀의 광범위 공격은 가장 효율적인 공격이었다.
정신력 소모가 큰 만큼, 그 전에는 쓰지 않길 바랐는데…….
“태워 버리면 피 냄새가 나는 일도 없잖아요. 정신력을 쓰는 건 아깝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죠.”
확실히 몬스터는 타는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통째로 태워 버릴 수 있다면 그녀 말대로 다른 몬스터가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일은 없을 거다.
“형씨, 오고 있어.”
발렌의 말에 앞으로 시선을 옮기자, 기괴한 소리와 함께 앞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보엿다.
쿠구구궁!
“케이브 웜, 세 마리.”
그린 라벨의 케이브 웜은 덩치가 큰 거대한 지네 같은 몬스터다.
온몸에 가시가 박혀 있는 몬스터로, 외형에 비해 상대하기 까다롭진 않다.
특히, 정보라에게는…….
“금방 끝내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앞에 선 그녀는 케이브 웜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이내 그녀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양의 화염이 단숨에 케이브 웜을 덮쳤다.
화르륵!
응축된 화염은 태운다는 느낌을 넘어 녹여 버리는 듯한 파괴력이었다.
“끝났네요.”
“…무시무시한 힘이네요.”
마력계에서도 가장 파괴력이 강한 건 정보라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류설영의 전격도 그만큼 강하지만, 정보라의 힘을 따라가진 못했다.
물론 그에게는 전쟁광이라는 초월 능력도 있지만.
“그럼 다시 움직이죠.”
“네, 시간이 없으니까요.”
정보라 덕분에 몬스터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우리는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계단 근처에서 멈춘 우리는 주변을 살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 근처는 앙그라마이뉴가 숨어 있을지 몰라요.”
어차피 5층은 그들이 점령하고 있으니 4층에서 올라가는 길만 감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계단을 올라가면 발각되는 건 어쩔 수 없겠는데요?”
전에 아래로 내려올 때 이곳에서 앙그라마이뉴 길드원들과 전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걸 떠올려 보면 근처에 놈들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발렌, 어때?”
“전에도 그랬지만, 이렇게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다른 인간의 냄새를 찾는 건 쉽지가 않아. 그리고 주변에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냄새가 독하거든.”
어쩔 수 없이 강행군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나.
“이번엔 그럼 내가 나서도록 할까.”
“뭐?! 발렌이?!”
나도 모르게 말이 입 밖으로 나와서 동시에 팀원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평소엔 발렌과 머릿속으로 대화를 했는데 지금은 너무 놀라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쨌든 우리 목적은 발각되지 않고 5층까지 가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럼 놈들이 오크를 본다면 어떻겠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겠지.”
4층은 전혀 공략되어 있지 않은 층이다.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걸 의심할 일은 없다.
“계단 근처까지 가면 숨어 있는 놈들 냄새는 찾을 수 있어.”
“…알겠어. 그럼 해 보자.”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가 그거라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발렌의 작전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팀원들에게 발렌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하자, 다들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팀장인 차윤지의 허락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으니까.
“정말 그 오크에게 맡기겠다고요? 상대는 2위 길드인 앙그라마이뉴라고요. 자칫 오크 때문에 저희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단 말입니다.”
예상대로 도진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일반 헌터가 보기에 오크는 상당히 약한 몬스터니까.
“발렌은 강해. A급 헌터 정도의 실력이에요.”
그런 발렌을 감싼 건 차윤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오크가 A급 헌터라뇨…….”
코웃음 치는 도진욱을 보고 차윤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좋아. 그럼 발렌을 보내.”
“네?!”
도진욱이 깜짝 놀라며 차윤지를 멍하니 바라봤지만, 그런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발렌도 우리 팀원 중 하나라고 생각해. 믿어 봐야지.”
“…알겠습니다. 발렌 들었지?”
“오케이! 맡겨 두라고.”
바로 발렌을 소환했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보라와 도진욱을 실제로 발렌을 보자 더 놀라고 있었다.
“금방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사람 말까지 할 수 있는 발렌의 모습에 두 사람은 더욱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몽둥이를 손에 꽉 움켜쥔 발렌이 의기양양하게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앞으로 가던 발렌을 향해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쒸잇!
“……!”
화살이 어깨에 박히자마자 발렌은 그쪽으로 단숨에 돌진했다.
계단 뒤쪽이라 우리의 시야를 벗어났고, 나는 긴장돼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발렌을 기다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고, 행여나 내 잘못된 판단으로 발렌이 위험에 빠졌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비웃듯이 발렌은 곧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리 끝났어. 나와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