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 레인 소탕 (1)
“이건…….”
“하성이 형 검이야.”
붉은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손잡이와 거울로 써도 될 정도로 반짝이는 검날이었다.
“이걸 어떻게 네가 가지고 있었던 거야?”
“전에 예나 씨를 만났어. 하성이 형이 쓰려고 산 검인데, 한 번도 쓰지 못했다고 하더라.”
하성이 형은 원래 나와 팀을 이뤘던 헌터였고, 예나 씨는 하성이 형의 아내다.
정찰 팀은 수입이 많지 않았기에 하성이 형은 공략 팀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때 쓰기 위해 한동안 돈을 모아서 산 건가.
“이거 비싼 거잖아.”
검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만 봐도 고급스러운 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예나 씨가 준다고 했을 때 거절했어. 그런데 이걸 볼 때마다 많이 괴로우신가 봐. 그렇다고 도저히 팔지도 못하고…….”
“…….”
석준이의 말에 고개를 떨궜다.
자칫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성이 형은 예전부터 나를 아끼고 챙겨 줬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다시 던전에서 활약할 수 없거든. 그래서 기왕이면 네가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만약 하성이 형에게 누가 갖는 게 좋냐고 물어봤어도 이렇게 했을 거야.”
석준이는 빙긋 웃으며 내게 검을 건네주었다.
길게 뻗은 검을 쭉 훑어보다가 검을 받았다.
“SS급 헌터가 됐다는 얘기는 들었어. 내가 아는 최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잖아. 설마 정말 SS급 헌터가 될 줄이야.”
“그러게. 나도 아직 믿기지 않아.”
E급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SS급 헌터라는 계급의 무게는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협회 내에서 일하다 보면 네 이야기도 많이 들리거든. 요즘 레인이라는 길드 때문에 문제가 많다며?”
“그런 것도 아는 거야?”
“뭐, 주워듣는 정도지. 다른 것보다 항상 조심해.”
석준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꽉 움켜쥐었다.
***
계획대로 장지은은 던전 1층으로 옮겨졌다.
백진철은 이번에 그녀를 지키기 위한 수비 팀을 우리 레이브 길드에게 맡겼다.
“어째서 우리 길드일까요? 다른 상위 길드도 많은데…….”
“하긴, 화이트 소드나 신월 같은 길드에 맡기는 게 훨씬 안전할 텐데.”
유미래와 이민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한 거겠죠.”
내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화이트 소드는 대부분 인원을 던전 공략에 투입했으니 움직이기 힘들고, 신월은 레인을 토벌하기 위해 따로 이동했어요.”
“레인을 토벌?”
“저번 전투에서 레인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거든요. 놈들이 이쪽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면 동시에 신월이 근거지를 공격하는 거죠.”
물론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위험성이 컸다.
어쨌든 레인이 장지은을 노리고 있다면 비숍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비숍이 근거지에 있다면 아무리 쳐들어간다고 해도 도망쳐 버리면 끝이다.
즉, 신월은 비숍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아 있는 다른 길드원들을 소탕하는 임무이다.
“길드 전체의 전력을 놓고 보면 저희 길드가 높은 건 아니지만, 개개인의 전력으로 따지면 최상위권 일 거에요.”
대부분이 A급 이상이고 뛰어난 실력자들이다.
특히, 우리 길드처럼 인원이 적은 길드는 항상 함께 싸우기에 호흡도 좋은 편이다.
“저 너무 떨려서 죽을 거 같아요.”
“죽으시면 곤란해요.”
장수주의 말에 옆에서 채하나가 그녀를 달래 주었다.
“그러고 보니 공명준 씨는…….”
“…….”
워낙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라 한동안 그와 만나는 일이 없었다.
아니, 만났던 거 같기도 하고…….
공명준은 내가 이름을 부르자,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내게 보여 주었다.
맞다, 이 사람 술 마시면 강해지지.
강해진다기보단 각성한다고 해야 하나.
“자자, 다들 긴장 풀지 말고 주변 경계 확실하게 해.”
현재 던전은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으면 절대로 던전에 들어올 수 없기에 우리의 현재 위치를 레인에게 발각되지 않겠지.
다른 안전한 곳에서 이선우가 초월 능력을 감지 중이다.
다른 장소로 순간 이동해 온다면 그녀가 금방 알 수 있다.
“발렌은 어때?”
“아, 괜찮은 거 같긴 한데, 역시 전투에는 오래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신아람이 만들어 준 의족은 상당히 뛰어났지만, 언제나 그 내구도가 문제였다.
제대로 된 재료가 아니라 발렌의 체중과 힘을 견딜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발렌은 다시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발렌도 우리 전력 중 하나니까 잘 챙겨 줘야지.”
“…감사합니다.”
문득 신아람이 마스터인 길드에 들어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요?”
“네?”
이민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녀의 말처럼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 검은 로브!”
“전투 준비!”
본부에서 연락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레인이냐?”
“시간이 됐다.”
신아람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한 중저음의 남자는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푸른색으로 번쩍이는 검날은 어쩐지 서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타앗!
그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쐐액!
“뭐야?!”
그가 검을 휘두르자 이민하가 들고 있던 방패는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당황한 이민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언가를 벤다는 느낌이 아니라, 검이 닿는 부분이 알아서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내 방패가 이렇게 부드럽게 잘리다니…….”
“저 자식 비숍이에요!”
내 말에 놀란 신아람이 인상을 구겼다.
“비숍은 순간 이동 능력을 가진 놈이라며!”
“비숍은 둘이잖아요. 저번 전투에서 정보라 씨가 싸웠던 다른 비숍이에요. 뭐든지 벨 수 있는 검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뭐든지 벤다고?!”
꿀꺽.
그때 던전 안에서 놓친 이후로 계속 숨어 있었던 건가.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공격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여긴 제가 막을게요. 아마 혼자서 공격하려고 온 건 아닐 거에요. 다른 놈들도 곧…….”
“방금 본부에서 연락 왔어요. 근처에서 초월 능력이 사용 감지.”
비숍 뒤에 검은 로브를 입은 두 사람이 보였다.
“바로 신월이 근거지로 돌입한다고 해요.”
“좋아. 그럼 우리가 여기만 정리하면 된다는 거군.”
쌔엥-!
“……!”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는 검을 피하고 뒤로 물러났다.
스르릉!
화도를 뽑긴 했지만, 놈이 화도를 베어 버릴까 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긴 제가 맡을게요! 뒤를 부탁해요.”
“알겠어.”
큰소리치긴 했지만, 무기조차 베어 버리는 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놈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검을 들 수밖에 없다.
쌔엥- 쌩!
그의 검은 망설이지 않고 나를 베기 위해 움직였다.
움직임 자체가 빠르거나 위협적이진 않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역습하기엔 검의 존재가 신경 쓰이는데.
라이프 파워를 쓰고 단숨에 끝내는 수밖에.
“와라!”
놈은 내가 스킬을 쓰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지, 자세를 취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내 정보는 다 파악하고 있다는 건가.
어쨌든 기본적인 전투 능력은 내가 압도적으로 높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놈의 검에 당하는 일은 없겠지.
촤아악.
“…?! 안개?!”
공격하기 위해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주변에 자욱한 안개가 깔렸다.
바로 코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에 인상을 찌푸렸다.
정보라 씨는 다른 능력은 없다고 했는데…….
일부러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가.
쌔엥-!
순간 옆에서 튀어나온 검에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검을 들었다.
“크으윽!”
그대로 화도가 가볍게 반 토막 나며 놈의 검이 내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발렌!”
“그냥 안개가 아니야. 냄새까지 완벽하게 가려져 있어.”
냄새로도 찾지 못하는 건가.
위험하다.
어깨의 부상도 부상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놈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미끼를 쓰는 수밖에.
“당장 나와! 어디냐!”
분신을 만드는 라이프 섀도우는 각성을 거쳐서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
지금처럼 분신이 말을 할 수 있고, 내가 분신의 시야를 갖는 것도 가능해졌다.
“비겁한 놈! 어디냐!”
열심히 소리를 지르는 분신을 향해 날카로운 검이 번쩍였다.
지금!
단숨에 놈을 향해 달려들었고, 비숍은 분신의 목을 베어 버린 순간 나를 발견했다.
“…! 같잖은 짓을!”
부웅-!
바로 에렌 셀을 뽑아서 놈을 향해 휘둘렀지만, 옆으로 검을 들어 막아서 오히려 에렌 셀이 잘려 나갔다.
“넌 나를 이기지 못한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겠지.”
바로 바닥에 검을 내려놓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다.
최대한 파고들어서 놓치지 않도록 따라붙었고, 비숍은 어떻게든 나를 떼어 내기 위해 움직였다.
여기서 공격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면 놓치고 말아.
쌔엥-!
“……!”
분명 놈의 검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갔지만, 내 몸은 멀쩡했다.
“잠시 죽지 않는 능력을 얻는 기술인가.”
이모탈.
각성한 이모탈은 발동 시간 동안 통증조차 없애 준다.
물론 라이프 소모는 똑같지만, 지금의 나는 정말 무적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쌔엥-! 쌩!
어떻게든 나를 떼어 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악착같이 놈을 쫓아갔다.
신체 능력이 좋다고 해도 검을 휘둘러 대는 놈과 거리가 영 좁혀지지 않았다.
“라이프만 날릴 뿐이다.”
“그건 모르지!”
푸욱!
놈의 검이 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인벤토리에서 석준이에게 받은 검을 소환했다.
쌔엥-!
내가 들고 있는 검도 비숍의 가슴을 꿰뚫었고, 주변의 안개가 천천히 개어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비숍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혀… 형씨 괜찮은 거야?!”
“아…….”
발렌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냈다.
뭐든지 벨 수 있는 검이라니… 다른 두 자루의 검을 잃었으니까 이 정도는 전리품으로 괜찮겠지.
인벤토리에 검을 집어넣고 바로 몸을 돌려서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다.”
장지은이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침대 옆에 비숍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애초에 밖에 있는 놈은 미끼라는 건가.”
이 자식과 같이 온 다른 놈은 이민하와 공명준이 막고 있었다.
“젠장, 순간 이동 능력을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아무리 신아람과 장수주가 지키고 있다고 해도 비숍이 순간 이동으로 뚫고 들어오면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단순히 비숍에게 당한 게 아니었다.
내가 일부러 놈을 놓쳐서 여기로 들어오게 만들어 달라고 말해 뒀으니까.
“오랜만이야, 비숍.”
이불을 걷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 조민주였다.
씨익 미소를 지은 그녀가 비숍의 팔을 움켜쥐며 그의 로브를 걷어 냈고, 비숍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능력 무효화.
미리 장지은과 조민주를 바꿔치기해 뒀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