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 잃어버린 뇌신 (5)
“좋아요. 여기선 물러나도록 하죠. 하지만 류설영 씨는 저희가 억지로 데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거래하기 위해 저희와 있는 거죠.”
“그딴 거래 나는 원하지 않아.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나를 두고 거래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장지은의 말에 퀸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의사는 상관없어요. 저희는 류설영 씨와 거래하는 거니까요.”
퀸이 이곳에 온 목적은 장지은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단순히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
“정찰인가?”
장지은과 대화하던 퀸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든 화도가 그녀의 목을 그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장지은이 순순히 퀸을 따라나설 리도 없는데 굳이 분신을 여기로 보낼 필요가 있나.
그리고 방에 들어왔을 때 나와 채하나를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이미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장지은 씨를 데리러 왔을 뿐입니다.”
“데리고 가? 어떻게? 설마 걸어서 나갈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정말 장지은을 납치할 계획이었다면 애초에 분신만 보내지 않았을 거다.
“최현 씨는 역시 머리가 좋으시네요. 최현 씨 말대로 정찰이라고 해 두죠.”
“장지은 씨를 건드리지 않는 게 너희에게도 좋을 거야. 어차피 장지은 씨가 너희에게 협력할 일은 없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그녀의 의지는 상관없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쏘아봤다.
“기껏 얻은 류설영이라는 패를 잃는 건 너희도 원하지 않을 텐데.”
내 말에 옆에 있던 채하나와 장지은이 흠칫 놀랐다.
방금 발언은 마치 레인을 위한 말 같았으니까.
“류설영 씨는 SS급 헌터 중에서도 강한 사람이니까.”
실력이 죽었다고 해도 류설영은 차윤지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겠지.
전력으로 싸우면 내가 이기겠지만, 언제든 승패는 바뀔 수 있는 차이다.
“류설영 씨가 있으면 우리 SS급 한 사람을 막을 수 있고, 반대로 적이 되면 다시 류설영 씨를 상대해야겠지.”
즉, 레인의 입장에선 류설영을 데리고 있는 게 상대의 전력을 줄이고 그만큼 자신들의 전력을 늘릴 수 있는 엄청난 이득이라는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류설영 씨는 본인의 의지로 저희에게 붙은 겁니다. 저는 장지은 씨를 치료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치료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건 보면 알겠죠.”
정말 퀸에게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바로 장지은을 치료해 주진 않을 거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류설영이 레인을 도울 이유가 없다.
“그럼 이제 가 봐야겠군요.”
마치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잿빛의 물과 로브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걸까요?”
“우리를 흔들 생각이겠지.”
“네?”
채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분신이지만, 퀸이 이곳을 보고 갔다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럼 우리는 계속 이곳에 장지은 씨를 둬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 새로운 숙제가 생겨요.”
“…심리전이군요.”
“어쨌든 장소는 옮겨야겠지만.”
“확실히 이런 병원에서 전투라도 벌어지면 피해가 크겠네요.”
이 병원은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큰 병원이다.
이런 곳에서 만에 하나 전투가 벌어지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안전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 던전으로 가겠어요.”
“네?!”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장지은은 결심을 한 눈이었다.
“거기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언제 그녀를 납치하러 올지 모르는데 던전에 상주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다.
특히,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으면 그녀의 병이 더 심해질 수 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고, 던전에서 죽는다면 뭔가 나쁘지 않네요.”
“장지은 씨…….”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꽃병의 조각을 내려놓았다.
너무 꽉 쥔 탓인지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 채하나가 바로 그녀를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류설영 씨가 레인에 간 걸 알았을 때부터 장지은 씨를 보호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인상을 구기며 백진철에게 소리치자,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 이후로 바로 지원 가능한 헌터를 모집하긴 했으나, 그렇게 단기간에 실력 있는 헌터를 모으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약 그때 놈들이 제대로 공격해 왔다면 장지은 씨를 빼앗겼을지도 모른다고요.”
여전히 레인이 그때 왜 공격해 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비숍에게 치명상을 입힌 탓에 비숍이 움직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헌터들이 이미 지키고 있다고 판단한 걸지도 모른다.
분신을 순간 이동으로 보낸 걸 보면 능력은 쓸 수 있는 상태인가.
“장지은 씨는 던전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하고 계셨고, 저희도 그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괜찮을까요?”
“던전에서도 그녀가 최대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지원을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한 백진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큰일이네요. 어디에 있든 비숍이 순간 이동으로 나타나서 장지은 씨를 데리고 사라지면 저희는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생각해 봤는데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막을 방법이 있어요.”
놈들을 막기 위해선 비숍의 능력을 차단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 능력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은 딱 한 가지뿐이다.
“제가 가서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 이라면…. ‘조민주’ 씨를 말하는 거군요.”
“네?”
“저번 전투 때 최현 씨가 잡았던 룩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사실 나도 이름을 듣지 못했기에 방금 백진철에게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아, 맞아요.”
“확실히 그녀 능력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저희도 이미 회유를 시도해 봤습니다. 문제는 대화 자체를 거부해서 말이죠.”
고민이 많은지 다시 한숨을 내쉬는 백진철을 보고 어쩐지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었다.
“일단 그럼 만나 보시죠. 최현 씨라면 대화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녀는 따로 갇혀 있었는데, 협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찾아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실력 있는 헌터들이 장지은을 지키고 있으니 괜찮겠지.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나이가 많은 남자가 나를 반겼다.
“최현 씨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그는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를 한 뒤, 나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금방 데리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두 개로 나누어진 방은 마치 교도소 면회 장소처럼 가운데에 테이블이 있고 투명한 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내 안에서 조민주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오랜만.”
“면회를 항상 거절했다고 해서 이번에도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조민주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고, 손은 묶인 상태였다.
머리카락조차 정리하지 못하는 그녀는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인데?”
“당신 능력이 필요해. 비숍을 잡으려면 무효화 능력이 있어야 해.”
어느 정도 예상한 말이었는지, 조민주는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싫은데.”
“우릴 도와주면 앞으로 네 형량을 줄이거나 보상을 해 줄 수 있어. 너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이제 그쪽이랑 더 얽히고 싶지 않거든.”
나를 쏘아본 그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도와서 레인을 완벽하게 소탕한다면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비숍을 그 자리에서 놓친다면 당신들은 내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어?”
“그건…….”
확답할 수 없었다.
정말 비숍을 놓친다면 비숍은 분명 조민주를 가만두지 않겠지.
“그럼 비숍은 왜 진즉 당신을 여기서 빼가지 않은 거지?”
“이미 내가 변절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만약 구하러 왔는데 내가 배신하면 자기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
듣고 보니 그렇군.
비숍이 조민주를 데리러 오는 건 쉬운 일이겠지.
하지만 막상 왔는데 그녀가 배신한다면 위험해지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도와줄 생각 없어. 그럼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조민주를 보고 나도 다급히 따라 일어났다.
“자… 잠깐만!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릴 도와주는데?”
“말했잖아. 내 목숨까지 내걸고 그러고 싶진 않아. 실패하면 난 매일 언제 놈들이 죽이러 올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한다고.”
조민주가 그 후에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선 레인을 완벽하게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실패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나를 설득할 만큼 성공률이 높은 작전을 가져와. 그럼 고려해 볼게.”
“…또 궁금한 게 있어.”
밖으로 향하던 조민주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협회에서 면회를 신청했을 땐 거절한다고 했는데, 나를 보러 나온 이유는 뭐야?”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니까. 반대로 당할 뻔했던 네 입장에선 나를 용서할 수 없겠지만, 여기 나온 건 순전히 내 죄책감 때문이야. 뻔뻔하게 느껴지겠지.”
말을 마친 조민주가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방에서 빠져나왔다.
“어떻게, 대화는 잘 마치셨나요?”
“네.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남자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갔다.
완벽한 작전인가.
“최현?!”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부른 목소리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현이 맞지?!”
“이석준?!”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이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뭐야! 너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아포칼립스 이후에 석준이의 행방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그가 무사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째서인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혹시라도 석준이가 나를 피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억지로 찾아가진 않았다.
“사실 아포칼립스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
너무 놀라서 입만 뻥긋거리고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미안. 연락할 여유가 없었어.”
“아니야. 내가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네.”
아포칼립스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헌터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많이 죽었으니까.
“요새는 어떻게 지내?”
“우리는 정찰팀이었잖아. 난 현이 너처럼 그렇게 실력이 좋은 헌터도 아니라서 전투 계열로는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협회에서 사무직을 맡고 있어. 아 참, 만나면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주고 싶은 거?”
고개를 갸웃거리자 석준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없거든. 집에 있는데, 잠깐 들를래? 가까워.”
“어? 그럼 그럴까.”
오래간만에 만난 석준이와 좀 더 대화하고 싶었기에 그와 함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보다 뭘 주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