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잃어버린 뇌신 (2)
“류설영 씨?”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류설영을 다급하게 불렀지만, 그의 눈엔 내가 들어오지 않았다.
“류설영 씨! 정신 차려요! 진짜 저 자식 말을 믿는 건 아니죠?”
“…방법이 없어. 이대로면 정말 죽을 거라고.”
“놈들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이용만 하고 버릴 거라고요. 이런 뻔한 거짓말에 왜 속으시는 거예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동료들도 시간 벌이용으로 버리는 놈들이 약속을 지킨다고?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그 녀석은 죽을 거야. 그렇다면 0.1%의 확률이라도 걸어 볼 수밖에 없잖아.”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리는 류설영은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천천히 비숍에게 걸어가는 그를 보고 당황해서 팔을 붙잡았다.
“후회하실 거예요. 그 친구분도 류설영 씨가 이렇게 하는 건 원하지 않을 거라고요.”
“네가 뭘 아는데! 만약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 이런 상황이라고 해도 넌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거야? 네 동생이 목숨을 잃을 상황이면 어떻게 할 건데?!”
버럭 소리를 지른 류설영은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게 남아 있는 건 이제 그 녀석뿐이야. 미안하다.”
파지직!
“……!”
그의 주변에 일어나는 스파크가 따끔하게 나를 찔렀다.
깜짝 놀라서 황급히 그에게 손을 뗐고, 류설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비숍에게 걸어갔다.
그런 류설영의 반응에도 비숍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약속은 지킨다.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이니까.”
“개소리하지 마! 그냥 보내 줄 것 같아?!”
류설영을 놈들에게 뺏기기 전에 바로 비숍을 공격했다.
쌔엥-!
날카롭게 화도를 휘둘렀지만, 비숍은 바로 옆으로 순간 이동해서 검을 피해 냈다.
이 자식 일부러 짧게 움직이면서 최대한 힘을 적게 소모하고 있어.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류설영의 어깨에 손을 올린 비숍을 보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대로면 류설영을 데리고 도망치겠어.
“……!”
순간 뒤에서 나타난 정보라를 발견하고 그녀와 찰나에 눈빛을 교환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쐐액!
찌르기는 팔을 쭉 뻗어서 단숨에 공격 길이를 늘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목란이라는 기술은 원래 이런 자세로는 쓸 수 없지만…….
파앗.
이번에도 옆으로 순간 이동으로 피했고, 기다리고 있던 정보라의 눈이 번쩍였다.
화르륵!
비숍의 발아래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처음으로 당황한 그가 옆으로 다시 순간 이동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촤악!
화도가 매섭게 비숍의 등을 찢어발겼다.
이쪽으로 순간 이동할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조금 멀어서 일격에 처리하는 건 실패했다.
콰지지직!
“……!”
“뭐야?! 무슨 짓이야!”
류설영의 전격 때문에 이어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막지 마. 너와 싸우고 싶진 않아.”
“류설영 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
그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무슨 짓이에요?! 왜 류설영 씨가 우리를 공격하는 건데!”
이제 막 이곳에 온 정보라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등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비숍은 바로 류설영에게 손을 대더니 모습을 감췄다.
“놓친 거예요?!”
“…네 아무래도 아예 던전 밖으로 도망친 것 같아요.”
완벽하게 처리하진 못했지만, 분명 치명상이었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치명상.
그런 상태로 다른 곳으로 도망치진 않았을 거다.
“괜찮아요. 밖에서 위치를 쫓을 수 있을 거예요.”
던전을 오가려면 굳이 먼 곳에 근거지를 만들지 않았을 거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류설영 씨가…….”
“아아, 들려?”
“이신예 씨?”
정보라의 말을 끊고 이신예에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의 안부가 걱정돼서 이쪽이 우선이었다.
“지금 윤지랑 발렌, 그리고 도진욱 씨도 만났어.”
“다들 무사한 거죠?”
“우린 괜찮아. 그쪽은 어때?”
나는 정보라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류설영 씨를 비숍이 데려갔어요.”
이왕 설명하는 거 양쪽에 들리게 하면 좋으니까.
“류설영 씨의 친구가 병원에 있는데, 친구를 살려 주겠다는 조건으로 류설영 씨를 데려갔어요.”
“뭐?! 그런 말을 믿었다고?!”
“…보통 일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나는 류설영을 마냥 비난할 수 없었다.
아까 류설영이 만약 율이가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리고 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류설영의 행동이 잘못된 건 사실이지만, 과연 나라면 다르게 행동했을까.
***
“…….”
“자자, 그래도 다들 무사한 게 어디야. 분위기 좀 바꿔 봐요.”
이신예가 우리들 가운데에 서서 밝게 소리쳤다.
비숍을 제외한 다른 간부들은 모조리 승리를 거두었지만, 분위기는 초상집이었다.
류설영을 레인에 뺏긴 건 물론이고, 팀의 리더인 차윤지의 부상이 심각했다.
“차윤지 씨는 어때요?”
“여기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어. 나머지는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해야지.”
우리가 있는 곳은 아직 공략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고, 언제 몬스터가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계속 치료를 하는 건 차윤지에게도 좋지 않겠지.
“우리 상태도 말이 아니니까.”
그나마 가장 정상인 건 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상이 심각했고, 이신예는 차윤지를 치료하느라 대부분의 힘을 써서 다른 사람을 치료할 겨를이 없었다.
“한심하네요. 이제 막 SS급이 돼서 자신만만했는데, 이 꼴이라니…….”
도진욱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윤지와 싸웠던 블랙 룩과 도진욱이 상대했던 화이트 나이트는 죽었다.
문제는 다른 비숍 둘은 놓쳐 버리고 말았다.
특히 정보라가 상대했던 비숍은 마치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일단 돌아가도록 하죠.”
“그러자.”
우리는 분명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돌아가는 모습은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진철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준비시켜 둔 치료계 헌터들로 부상을 치료해 주었다.
“아, 저는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거든요. 저보다 다른 분들을…….”
“고생하셨습니다.”
“죄송해요. 류설영 씨를 지키지 못했어요.”
내 말에 놀란 백진철이 다급히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요. 상황은 이신예 씨에게 통신으로 전달받았습니다. 최현 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시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후의 일은 저희가 대처해야겠죠.”
치료를 마치고 우리는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크게 부상을 입지도 않았고, 큰 전투를 했던 것도 아니라서 남들보다 멀쩡했다.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백진철을 찾아갔다.
“오셨군요.”
“바쁘신 거 알고 있지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괜찮습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시죠?”
하나를 고르라면 고를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한 게 많았다.
“음… 먼저 차윤지 씨 상태는 어떤가요?”
“이신예 씨가 워낙 응급 처치를 잘해 두어서 생명에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
잠시 작게 한숨을 쉰 그는 말을 이어 갔다.
“정신적으로도 괜찮을지는 모르겠네요.”
이신예와 발렌이 차윤지와 합류했을 때, 이미 그녀는 상당히 당한 상태라고 했다.
둘이 옆에서 도와준 덕분에 블랙 룩을 잡을 수 있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녀에겐 부상이 심각하겠지.
“잘 이겨 내길 바라야죠. 그녀는 강한 사람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화이트 룩은 어디 있나요?”
“협회 본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녀가 상당히 협조적이라서 이미 레인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은 상태입니다.”
붙잡힌 후로는 내게도 그런 태도였으니까 더 이상 허튼짓을 하진 않겠지.
어쨌든 그녀를 잡은 건 우리에게 큰 수확인 건 확실했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신가요?”
“마지막으로… 놈들 근거지 위치는 찾았나요?”
백진철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희 쪽에서 계획을 세울 때까지 일단 감시만 할 생각입니다.”
“어째서죠!”
말을 듣자마자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비숍은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요. 지금이 아니라면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놈들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거라면 큰 피해가 생길지도 몰라요. 위험한 걸 알면서 헌터들을 보낼 수 없습니다.”
백진철의 눈은 단호했다.
“그럼 저 혼자서라도…….”
“안 돼요. 허락할 수 없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자, 백진철은 고개를 돌렸다.
“최현 씨에게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전투로 제가 좀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만약 무효화 능력을 가진 그 여자에게 최현 씨가 당했다면 어떻게 됐을 거 같나요?”
“그건……!”
“적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요.”
백진철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화이트 룩이 나보다 검술이 뛰어났다면 죽는 건 내 쪽이었을 테니까.
“그럼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겁니까?”
“언제나 전투는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입니다. 저희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형태로 싸워야죠.”
“이번에 함정에 당했던 레인이 한 번 더 당해 줄까요?”
아마 그들은 이번 기습으로 우리에게 이선우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다.
위치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그들도 쉽게 움직이진 않겠지.
분명 이번에 룩 둘과 나이트를 처리한 건 큰 성과지만, 비숍 둘을 모두 놓친 건 아쉬웠다.
“반드시 올 만한 곳이 있습니다.”
“설마…….”
“‘장지은’씨의 병원이죠.”
확실히 거기라면 다시 레인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레인에게 있어서 류설영이라는 도구는 상당히 매력적인 도구일 것이다.
오랜 시간 헌터의 일을 쉬었고 팔을 잃은 그였지만, 실력만 놓고 보면 다른 SS급 헌터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전성기에 그가 얼마나 강했는지 두려울 정도였다.
“앞으로도 류설영이라는 도구를 쓰기 위해선 레인은 반드시 움직일 겁니다. 정말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든 없든 병원에 오겠죠. 저쪽에서 류설영 씨를 이용한다면, 저희도 이용해야죠.”
어째 씨익 웃는 백진철의 웃음이 살벌하게 느껴졌다.
“류설영 씨는 사적인 일로 배신하고 저희에게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를 동정할 생각은 없어요.”
“…….”
“아, 그리고 다른 비숍에 대한 얘기는 들으셨나요?”
“정보라 씨와 싸웠던 비숍을 말하는 건가요?”
내 물음에 백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순간 이동을 쓰는 그 비숍보다 까다로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나요?”
어째서인지 정보라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말을 돌릴 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네?”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지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진철이 다시 말했다.
“그는 뭐든지 벨 수 있는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