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모어 라이프 (1)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대련은 끝나 있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
S급 헌터인 하일우는 바닥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그를 치료하기 위해 치유계 헌터들이 급히 대련장 위로 뛰어 올라가는 게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재문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쉽군요. 저도 최현 씨와 대련해 보고 싶었는데.”
본래 이 대련은 S급 헌터에게 SS급 헌터로 승급할 만한 실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대련이었다.
대련을 보는 사람이 그걸 판단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재문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차 없이 하일우를 쓰러뜨렸다.
“이 대련의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겠죠?”
살짝 그를 쏘아보며 말하자, 이재문은 콧방귀를 끼며 피식 웃었다.
“제 일격에 쓰러질 정도의 헌터가 SS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채점하기 전에 기본적인 실력이 받쳐 주는 가의 문제입니다. 애초에 자격이 없는 자가 왜 SS급이 되어야 하는 거죠?”
이재문은 점점 목소리를 키웠고, 관중들도 들을 수 있게 크게 말했다.
“헌터는 장난이 아닙니다! 던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데 몬스터들이 그들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SS급 헌터는 절대 지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맞는 말이다!”
“오오!”
정적으로 가득 찼던 대련장에 점점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리고 이젠 이재문의 말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스스로라는 브랜드를 이 자리에서 홍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다음 분은 제가 검을 뽑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좋겠군요.”
이재문은 그렇게 말하며 대련장에서 내려왔다.
그는 허리춤에 나와 비슷한 긴 검을 끼고 있었는데, 이번 대련에선 아예 검조차 뽑지 않았었다.
차윤지나 류설영과는 다른 형태의 강함이었다.
***
“무조건 승급이라니까!”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SS급 헌터를 이겼는데 당연히 승급이지! 어서 축하 파티하자고.”
오늘 해야 하는 입회 경기가 끝나고 신아람은 벌써 술에 취해 있었다.
어디서 마시고 왔는지 술 냄새를 풍기며 파티하자고 조르는 그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셨어요! 대련 굉장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채하나가 다가와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정말 최현 씨는 SS급 헌터가 되는 건가요?”
“아마 그렇겠죠.”
잔뜩 취해 있는 상태긴 했지만, 신아람의 말대로 SS급 헌터인 차윤지를 이긴 이상 승급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내용이 부실했던 것도 아니었고 대련은 충실하게 이루어졌으니까.
“솔직히 나는 네가 떨어지길 바랐거든.”
“……?”
갑작스레 씁쓸한 표정의 신아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왜… 왜요?!”
“이 승급 대련의 목적이 뭔지 너도 들었잖아.”
SS급 헌터를 갑자기 뽑는 이유는 현재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이상적인 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앙그라마이뉴의 하은주와 레인의 퀸을 잡기 위한 팀.
“결국, 협회가 원하는 대로 이용당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지.”
단지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백진철은 무서운 인간이었다.
SS급이라는 타이틀을 상품으로 내걸고 헌터들이 도전하게끔 만들면서 실속까지 챙기는 승급 대련을 만들었다.
“SS급이 아니어도 저는 이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앙그라마이뉴와 레인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두 길드는 나와 지독하게 얽혀 있었으니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레인은 언젠가 다시 나를 찾아와 내 초월 능력을 노릴 것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럼 얼른 축하 파티하러 가자!”
“안 된다니까요!”
달라붙는 신아람을 떼어 놓은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다시 던전에 갈 생각이에요.”
“뭐?! 우리는 지금 휴식기잖아. 쉴 때 쉬는 게 좋지 않겠어?”
이민하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마 SS급 헌터가 확정되면 바로 팀을 꾸려 움직이게 될 거 같아요. 그 전에 여러모로 준비해 두고 싶어서요.”
다른 것보다 미리 라이프를 늘려 두고 싶은 욕심이 컸다.
어떤 몬스터든 쓰러뜨리면 라이프를 한 개 늘릴 수 있으니까 이제 라이프 걱정은 없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파티하자!”
“싫어요!”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민하를 보고 신아람이 울상을 지었다.
라이프만 늘려 둔다면 라이프 룰렛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도 내겐 훈련이랑 비슷한 개념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적당히 날뛰고.”
신아람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길드 마스터인 그녀의 허락이 없으면 갈 수 없었지만, 신아람은 애초에 막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길드원이 혼자서 행동하는 건 당연히 반기지 않는 게 정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레이브 길드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던전에 다시 들어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백진철에게 라이프에 관한 걸 설명하자, 그는 흔쾌히 나를 2층 전장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줬다.
물론 그는 내가 혼자서 움직이는 건 반대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팀을 꾸려 움직이는 게 던전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이었다.
“되게 그리운 그림인데?”
“그렇네요.”
유지한 아저씨가 하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그때랑은 전혀 다른 녀석이 되어서 돌아왔지만.”
“하하하! 그 애송이가 이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어.”
심윤성 아저씨는 또 술을 마셨는지 코가 빨개져 있었다.
그는 거칠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 재꼈고, 전혀 변하지 않은 이 분위기가 반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데?”
이신예의 근본적인 물음에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리가 있는 곳이 여기 밖에 없더라고요. 혼자서는 절대 활동할 수 없다고 해서…….”
아마 백진철이 내가 혼자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것은 내 실력을 의심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레인도 그렇고, 앙그라마이뉴도 그렇고 문제를 일으킨 건 헌터들이었다.
즉, 나를 완전히 신용하지는 않는다는 거겠지.
던전에서 혼자 움직이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팀이 있고 팀장이 팀원들을 관리하면 사람들의 눈에서 피하기 힘들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과거에 스승님이 혼자서 게이트를 돌파하고 다녔던 건 엄청난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난 아직 멀었다는 건가.
“차윤지 씨가 승급 대련을 해야 해서 며칠은 자리를 비울 테니까 최현 씨라면 그 자리에 들어오기 충분하겠죠.”
“…오랜만이네요.”
하루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고, 그녀와 달리 내 표정은 찌푸려졌다.
어째 시간이 흘러도 하루는 묘하게 거북해서 얽히고 싶지 않았다.
“너무 노골적으로 싫은 티 내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최현 씨가 좋거든요.”
“제 마음이 마음대로 되진 않거든요.”
“그런 솔직한 부분도 마음에 들어요.”
하루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인간이었다.
백진철 역시 사람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타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하루는 합리적으로 목적을 이루는 방식에 눈이 먼 것처럼 보였다.
“설마 이번에도……?”
“최현 씨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까지 손을 쓰진 않습니다.”
문득 하루라면 내가 이 팀에 들어오도록 뒤에서 수를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에 저희 길드 팀에서 활동하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하루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자, 그럼 다시 일하러 가 보자고.”
“다녀올게, 마스터.”
잠시 분위기를 살피던 유지한 아저씨가 나와 하루를 떨어뜨리기 위해서인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흔드는 하루를 뒤로하고 2층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유지한 아저씨가 이끄는 이 팀은 게이트 공략이 아닌, 던전 공략 팀이었다.
게이트에서 막 나왔을 때랑 비슷한 상황인걸.
“그런데 제가 던전에 있을 때 여러분도 던전에 계시지 않았나요? 지금 휴식기 아니에요?”
“우리는 현이보다 늦게 던전에 들어왔거든. 우리도 얼마 안 남았어. 아마 원래 네 팀이 들어올 때쯤엔 우리가 휴식기일 거야.”
민혁이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어디 우리 에이스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지 볼까.”
“차윤지 씨 대타라니… 부담스럽네요.”
내가 있던 자리는 원래 차윤지가 있던 자리였다.
그녀가 했던 만큼 해야 한다는 건 상당히 부담이 컸다.
1 : 1 대련에서 내가 이긴 건 사실이지만, 대련과 던전에서의 전투는 다르다.
주변 환경, 팀의 상황, 다수의 적과 기습.
목숨이 걸린 이곳에서 정정당당하게 대련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전위는 나랑 윤성이 형. 후위는 신예랑 민혁이가 맡는다. 그리고 현이는…….”
잠시 말을 멈춘 유지한 아저씨가 나를 보며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대로 날뛰면 돼.”
“…네?”
순간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그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원래 윤지는 포지션이 없었거든.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싸우는 포지션이라고 해야 하나.”
“굉장히 충격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시네요.”
전투 대형에서 포지션은 중요하다.
팀원들이 서로를 믿고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포지션이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라니…….
“듣기 좋은 말이지만, 그렇게 좋은 말은 아니야. 너는 전위와 후위, 그리고 측면에서 파고드는 몬스터들까지 맡아야 한다는 의미거든.”
“아…….”
이신예의 말에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확실히 예전에 차윤지랑 같이 싸웠을 때도 그런 분위기였지.
그땐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어서 대형이나 포지션을 살필 여유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차윤지는 실제로 모든 곳에서 날뛰었던 것 같다.
전위에 있던 몬스터를 베어 버리고 멀리서 공격하는 몬스터까지 처리한 뒤에 어느새 후위를 지원하고 있었다.
“역시 제가 차윤지 씨 역할을 대신하는 건 무리인 것 같은데요.”
“하하하! 다 경험이라고. 우리도 S급이니까 그렇게 심란한 표정 짓지 않아도 돼.”
심윤성 아저씨가 내 어깨를 거칠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직 처음이니까 일단은 호흡을 맞춰 보면서 천천히 하자고.”
유지한 아저씨가 앞에서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보고 말했다.
“자, 그럼 처음 봤을 때 E급이었던 녀석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구경해 볼까.”
정면에 있는 골렘의 묵직한 주먹을 유지한 아저씨의 검이 막아 냈다.
카앙-!
그는 잠깐 시선을 내 쪽으로 옮기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고, 그건 노골적으로 내게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라이프 파워를 쓰고 단숨에 유지한 아저씨의 어깨를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카앙-!
매섭게 쏘아진 화도가 단숨에 골렘의 핵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