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새로운 SS급 (4)
백진철은 진취적인 성향이다.
협회장 자리에 오르고 나서부터 그가 한 행적들은 하나같이 전에 없던 파격적인 행보였다.
이번에 새로운 SS급을 뽑는 선발 대련도 마찬가지다.
협회 내부에서는 대련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여전히 던전 내부에서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이벤트는 보기 안 좋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쓸데없는 고민이었네.”
신아람의 말대로 막상 까놓고 보니 여론은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긍정적이었다.
아포칼립스 이후로 많은 사람이 헌터와 던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만일의 사태에 자신을 지켜 주고 몬스터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직접 뽑을 수 있다는 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그보다 헌터도 엄청 많네요.”
“헌터들도 새로운 SS급 헌터가 나오는 것에 관심이 많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SS급 헌터로 승급한 건 5년 전 차윤지였다.
원래 이렇게 선발을 미루진 않지만, 아무래도 근 몇 년 동안 사건이 많아서 SS급 헌터를 뽑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저도 SS급 되고 싶었는데…. 억울해요!”
채하나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신아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특수계는 S급까지 올라가는 게 쉽잖아.”
“그건 그렇지만…….”
협회는 애초에 SS급 헌터는 전투력으로만 승급할 수 있다고 정해 뒀다.
특수한 상황에서 혼자서 SS급 헌터가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니 특수계 헌터들은 아무래도 제한되는 게 사실이었다.
통신계나 치유계가 혼자서 전투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나마 마력계는 참가가 가능하지만, 지금까지 SS급에 마력계 헌터는 손에 꼽았으니 이번에도 힘들 거라는 의견이 많았다.
류설영은 초월 능력과 마력계,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으니 예외지만.
“그래도 우리 길드에서 새로운 SS급 헌터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신아람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다른 길드원들도 모두 나를 바라봤다.
“최현 씨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당연하지. 내가 열심히 응원할 테니까 꼭 승급하는 거야!”
백진철의 적극 추천으로 나는 떠밀리듯 SS급 헌터 대련에 참여하게 됐다.
신아람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고, 이제 막 초월 능력을 얻은 이민하는 아직 능력을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아 다음 기회를 노린다고 했다.
덕분에 모든 길드원이 내 대련을 응원하러 모였다.
“다들 일 안 해요?! 던전 안에서 다른 헌터들은 몬스터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잖아요.”
“무슨 소리야. 너랑 같이 들어갔다 나왔는데 당연히 우리도 휴식기지.”
이민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한테 꼴사나운 모습 보이기 싫으면 잘하라고.”
그녀 말처럼 현재 던전 공략은 2개의 부대로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다.
하나의 부대가 공략을 진행하는 동안, 다른 하나의 부대는 전투 준비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다음 공략을 대비한다.
우리는 같은 길드면서 같은 팀이었기에 휴식기 역시 같았다.
“그런데 화이트 소드의 길드 마스터도 이번 대련에 참여하는 건가요?”
유미래의 물음에 인상을 잔뜩 찡그린 신아람이 끄덕였다.
“성격은 심하게 뒤틀린 노인이지만, 현역으로 활동할 땐 무서울 정도로 실력이 좋았지. 아마 지금도 웬만한 S급은 쪽도 못 쓸 거야.”
이재문에 대해선 전설적인 일화들이 많았다.
최상층 공략 중 고립된 하나의 팀을 혼자서 구출했다던가, 하루에 5개의 게이트를 공략했다던가 하는 일화들은 유명했다.
“아무리 SS급이라고 해도 하루에 S급이랑 몇 번이나 대련하는 게 가능할까요?”
장수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 말처럼 SS급 헌터는 겨우 3명뿐이었고, SS급 헌터 승급 대련을 신청한 S급 헌터는 20명이 넘었다.
한 사람당 7번은 대련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하루 만에 7번을 모두 하진 않지만, 최소 2번, 3번은 진행하게 되겠지.
“그건 보면 알겠지. SS급이 괜히 SS급이 아니라고. 자, 그보다 늦기 전에 들어가자.”
대련장은 마치 커다란 야구 경기장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빙 둘러서 관중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었고, 그 중앙에 대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굳이 일반인들까지 관람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나.”
사람을 잔뜩 비집고 나온 이민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들은 어차피 그저 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텐데.”
“그 쇼가 중요한 거죠.”
“어째서?”
이민하는 내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협회는 전에 비해 사람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에요. 헌터계에 관한 일은 외부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고 내부에서 처리하니까 더욱 심하죠.”
“하긴, 승급 시험에 뇌물을 먹인다거나 팀을 짤 때 돈을 받고 좋은 헌터들로 구성해 준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보여 주기식 대련을 연 거예요. 실질적으로 투표 점수는 비율이 낮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가 생기는 거죠.”
채점은 협회 내부와 대련을 한 SS급 헌터, 그리고 관중들의 투표로 이루어진다.
관중들의 투표는 전체 점수의 20%밖에 되지 않으니 큰 영향이 없겠지만, 광고 효과는 톡톡히 볼 수 있겠지.
역시 극한의 실리주의자인 백진철다운 생각이다.
“최현 씨는 누구랑 대련하는 건가요?”
“아, 아직 모르겠어요. 오면 알려 준다고 했는데…….”
“나야.”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평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차윤지가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빨간 망토 아니야?”
“차윤지다!”
“실물로 보는 거 처음이야.”
우린 관중석에 있었기에 차윤지의 등장은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기 충분했다.
SS급 헌터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름을 들어 봤을 테니까.
심지어 차윤지는 외모도 빼어나고 나이도 어려서 관심을 많이 받았다.
“차윤지 씨가 제 대련 상대라고요?”
“응. 아까 들었어.”
SS급 헌터들에겐 이미 알려 준 건가.
“봐주지 않을 거니까 제대로 덤벼.”
담담한 얼굴 사이에 묘하게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은 착각이겠지.
***
“첫 번째 대련은 진천우 씨인가.”
긴 창을 들고 대련장 한가운데 서 있는 그는 평소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손을 흔들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한동안 진천우와 함께 싸웠던 적이 있었기에 그의 실력은 잘 알고 있다.
날카로우면서도 저돌적이고 맹렬한 공격.
“처음부터 나라니… 하아, 벌써 피곤한데.”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난 류설영은 이 상황 자체가 싫은 표정이었다.
원래 성격이 이런 건 즐기지 않으니까.
대련 참가자인 나는 관중석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대기석에서 대련을 지켜볼 수 있었다.
“죽일 각오로 덤빌 테니 각오하라고.”
진천우가 씨익 미소를 짓자, 류설영도 입꼬리를 올렸다.
대련은 한쪽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거나, 혹은, 항복하면 끝이 난다.
시간제한이 있어서 1시간 내로 승부가 나지 않아도 대련은 끝난다.
애초에 SS급을 이겨야 승급하는 게 아니라, 경기를 본 사람들의 평가로 승급할 수 있기에 승패가 대련의 전부는 아니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이성연은 이번 대련의 심판 역할을 맡았다.
그와 함께 신아람과 유지한 아저씨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경기장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련 시작!”
파앙!
시작과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간 진천우의 창이 매섭게 뿜어졌다.
쐐액!
허공을 찢어발기듯이 휘둘러진 창은 류설영의 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가볍게 몸을 뒤로 꺾어서 창을 피한 류설영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와아아!”
터프한 진천우의 공격은 관중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기다란 창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류설영을 몰아세우는 진천우의 공격력은 가히 위협적이었으니까.
파아악!
창끝이 아무것도 베지 못하고 류설영이 있던 자리에 박혔고, 진천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천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류설영을 쏘아봤다.
“너무 노골적으로 끌어들이는 거 아닌가? 이 정도 넘어갔으면 슬슬 나오지?”
역시 알고 있었던 건가.
류설영은 처음부터 진천우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진천우의 긴 창은 리치가 길 때는 유리하지만, 품으로 파고들면 그 파괴력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류설영은 그걸 노리고 진천우가 흥분해서 빈틈을 만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보이는 거랑 달리 냉정하시군.”
류설영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확실히 처음 진천우의 전투를 보면 그가 감정적이고 본능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제로 같이 싸우면 알 수 있다.
진천우는 전투에서는 이성적이고 침착한 헌터라는 것을.
“그럼 나도 본격적으로 날뛰어 볼까.”
류설영은 자신이 가지고 온 무기들을 대련장에 뿌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단검부터 시작해서, 활, 창, 도끼, 대검까지 종류별로 대련장 곳곳에 흘렸다.
“…내가 밟고 미끄러지길 바라는 전략이냐?”
“하하하! 그럴 리가! 전력으로 싸우려는 거지.”
그렇게 말한 류설영이 이번엔 먼저 움직였다.
타다닷!
단숨에 진천우와 거리를 좁히는 류설영에 진천우가 창을 짧게 잡으며 끝으로 그를 위협했다.
가볍게 공격들을 피한 류설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주워 그의 공격을 튕겨 냈다.
카앙-!
진천우가 다음 공격을 하려는 순간, 그의 얼굴을 향해 도끼가 날아오고 있었다.
“……!”
아슬아슬하게 몸을 꺾어서 도끼를 피한 진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류설영의 초월 능력은 ‘전쟁광’.
모든 무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무서운 능력이었다.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 무기만 있다면 류설영에겐 두려울 게 없겠지.
“자자, 나는 무기만 쓸 줄 아는 게 아니거든.”
파직, 파지지직!
하나밖에 없는 류설영의 손바닥에서 스파크가 일더니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전격이 뿜어졌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진천우가 전격을 피한 뒤 몸을 굴렸다.
“…SS급 헌터는 다르다는 건가.”
진천우가 살기를 진득하게 내뿜으며 다시 류설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격이 있는 한 진천우가 거리를 벌린다고 해서 좋을 건 없었다.
결국, 그에게 선택권은 류설영에게 거리를 주지 않고 몰아세우는 게 전부였다.
부웅-!
기다란 창이 허공을 가르는 건 류설영에게도 위협적이었다.
창을 피한 류설영이 바닥에 있는 검을 주우려는 순간, 진천우의 창이 검을 밀쳐 냈다.
“……!”
한순간 빈틈이 생긴 류설영을 향해 진천우가 달려들었다.
쐐액!
그러나 진천우의 창은 제대로 휘둘러지지 못했다.
류설영이 들고 있는 단검이 진천우의 목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이 자식…….”
처음부터 검을 주우려고 했던 건 페이크였던 건가.
거기에 속은 진천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왔고, 그대로 게임 오버.
“오오오!”
“멋있어요!”
박수와 함께 수많은 관중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꽤 화려한 대련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류설영이 가볍게 이긴 것처럼 보였다.
자 그럼, 다음 경기는 내 차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