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진화된 능력 (4)
대련의 규칙은 간단하다.
서로 이후 전투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것.
즉, 나는 스킬을 쓸 수 없고 류설영은 전격을 쓸 수 없다는 의미다.
“오랜만에 두근거리는데.”
“봐 드리진 않을 겁니다.”
류설영과는 언젠가 한 번쯤 싸워 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대련을 해 보는 것 정도로도 내게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예전에 차윤지와 대련을 했을 때와는 다르다.
그땐 그녀에게 검술을 배우기 위한 대련이었지만, 지금은 대련 자체를 즐길 수 있다.
“그럼 제가 심판을 볼게요. 이후 전투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부상이라 판단되면 제지하겠습니다.”
다른 조원들도 우리의 대련을 흥미롭게 기다렸고, 심판으로 나선 송인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류설영에게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그는 한쪽 팔이 없다는 핸디캡이 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대련 시작!”
송인혁의 신호에도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검을 한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겐 기본적인 능력치 효과가, 그에겐 전쟁광 초월 능력이 남아 있었다.
“오지 않으면 내 쪽에서 먼저 간다!”
파앙-!
바닥을 박차고 튕기듯이 달려든 류설영은 내가 빌려준 에렌 셀을 힘껏 내리쳤다.
캉-!
에렌 셀과 화도가 맞부딪히며 묵직한 소리를 토해 냈다.
“……!”
검을 맞대는 순간 이질감이 느껴졌다.
류설영의 검이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한 걸음 물러난 류설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방금 내 공격이 상당히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는데.”
“엑?! 아뇨. 그럴 리가요. 뭔가 조금 어색해서.”
무언가 변한 건 확실했다.
드래곤 하트를 먹고 초월 능력이 진화한 탓인지 몸의 감각이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능력치로 인한 신체가 더 강해진 느낌이다.
전엔 능력치 1개가 1의 힘이었다고 하면, 지금은 1.5 정도가 된 기분이다.
즉, 아무 스킬도 쓰지 않아도 1.5배의 능력치를 얻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럼 전력으로 해도 된다는 거네.”
“네? 대련 아니었어요?!”
“싸울 땐 즐겨야지!”
쒸익-! 쿠웅!
묵직한 에렌 셀이 수직으로 내리꽂혔고, 공격을 피하고자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이 움푹 패여 있는 걸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거리를 벌렸다.
“한 손으로 저 정도 힘이라니… 반칙 아니에요?!”
“너도 이런 건 가능하잖아.”
아무렇지 않게 빙긋 웃는 류설영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그보다 이 검 보통 검이 아니구나.”
에렌 셀을 훑어보는 류설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달라. 조금 탐나는데?”
“꿈도 꾸지 마세요!”
이번엔 내가 먼저 움직였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뒤 아래에서부터 화도를 끌어올렸다.
카앙-!
“……!”
상대의 가드를 무너뜨릴 때 주로 쓰이는 ‘앵화’다.
자세가 틀어진 류설영을 보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쌔엥-!
공격은 정확히 들어갔고 한 번 더 류설영의 자세가 무너지면 끝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
하지만 그는 뒤로 피하는 것보다 오히려 앞으로 내게 거리를 좁혀 왔다.
마치 월하백화식의 연화가 떠오르는 움직임이었다.
화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로 붙어서 접근한 그는 에렌 셀을 크게 휘둘렀다.
이미 검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단숨에 화도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만!”
“……!”
송인혁의 신호와 동시에 두 사람의 검이 멈췄다.
서로 상대의 몸에 검이 닿기 직전인 상태였다.
“후우… 안 본 사이에 실력이 훌쩍 늘었는데?”
“대련을 해 보니 아직 멀었다는 걸 알겠네요.”
괜히 SS급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마지막에 내게 달려들 때 원래대로라면 화도가 그의 왼쪽 팔이 있는 곳에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류설영은 팔이 없었기에 그 거리만큼 검에 더 붙어서 접근했다.
덕분에 나는 검의 거리를 재기 어려웠고 아주 약간이지만 반응이 늦어졌다.
“방금 뭐였어? 두 사람 다 어떻게 움직인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민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가왔다.
“눈으로 좇는 것도 힘들었다고.”
“최현 씨 굉장해요! 그 류설영 씨랑 무승부라니!”
“무승부라기엔… 제가 압도적으로 밀린 느낌인데요.”
내 말에 류설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다음에 붙으면 내가 질걸. 아직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내가 흠칫 놀라는 걸 보고 류설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초월 능력이 진화해서 능력치가 급격히 변한 탓에 완벽하게 다루지 못했다.
라이프 파워는 사용한 후에 능력치가 오르면 어느 정도 수치인지 알고 있기에 그에 맞춰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능력치가 이 정도로 뻥튀기되면 금방 적응하긴 힘들단 말이지.
“나도 다시 헌터 일을 하려면 제대로 훈련해야겠는데.”
류설영을 보고 있으면 괜히 천재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오랜 시간 상층에서 시간을 보냈고, 팔을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저 정도다.
“자, 이제 쉬었다가 본격적으로 다시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죠.”
송인혁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정상이라면 이미 진즉 뚫고 갈 수 있었겠지만, 다들 회복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던전에서 몬스터들을 경계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니 쉽게 회복될 리 없지.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송인혁은 우리를 모아 놓고 2층까지 내려가기 위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최현 씨가 구해 온 식량은 보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상태고, 아껴 먹으면 3~4일은 먹을 수 있을 겁니다. 특수계 분들도 정신력을 많이 회복한 것 같으니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도 많아졌고요.”
조금 위험을 감수하고 내려간다면 좀 더 일찍 출발했겠지만, 송인혁은 충분히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견이었다.
좋지 않은 상태로 일찍 출발하는 것보다 회복된 상태로 조금 늦게 출발하는 게 안전하고 오히려 빠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일단 전위는 최현 씨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발렌 씨가 있으니까 주변 몬스터의 위치를 파악하고 움직이기 좋을 겁니다. 바로 그 뒤로 이민하 씨가 붙어서 돌발 상황에 대처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송인혁은 항상 부드럽고 이성적이지만, 오더를 내릴 때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다.
마치 우리를 장기 말 다루듯이 정확하게 필요한 곳에 사용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목숨이 걸린 전투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가장 확실한 곳에 확실하게 쓰는 것 외엔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최후방을 류설영 씨가 맡겠습니다.”
“네?! 제가요?!”
류설영은 송인혁의 말에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 조의 최대 전력인 그를 가장 후방에 배치한다는 건 전력 낭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송인혁은 이미 마음을 굳힌 것인지 단호하게 끄덕였다.
“보통 움직이는 대형이 무너지는 건 후방부터입니다. 적이 후방을 노리게 되면 그걸 막기 위해 전위에 있던 사람들도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되면 전체가 무너지죠. 가장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겁니다.”
송인혁은 나뭇가지로 땅에 대형을 그리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최후방에 믿음직한 전력이 있다면 전위는 앞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앞이 위험하면 지원을 하기에도 좋은 자리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땅에서 류설영에게 시선을 옮긴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의 류설영 씨는 전위를 맡기기에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자존심이 상했는지 류설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류설영 씨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빨리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하시잖아요? 아주 약간의 조급함이 실수로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송인혁의 말을 들은 류설영은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최후방으로 가도록 하죠.”
어쩐지 그의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 뒤로 향하는 류설영을 쫓아갔다.
“괜찮으세요?”
“뭐가?”
“…그냥…….”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류설영의 표정은 어쩐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말했잖아. 내려가면 나는 백운 길드에 들어가겠다고. 만약 아까 거기서 마스터가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면 실망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꼭 백운 길드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그렇군요.”
“너도 나랑 비슷하잖아? 리더에게 필요한 건 다정함 만이 아니니까.”
대열을 짜고 나선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선 나는 선봉과 함께 척후 역할을 맡고 있었다.
“어때?”
“…이쪽은 틀렸어. 한두 놈이 아니야.”
예상했던 대로 주변은 온통 몬스터 천지였다.
물론 이 전력으로 뚫고 가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문제는 몬스터들을 죽이면 그 소리와 피 냄새 때문에 다른 몬스터가 몰려온다는 것이다.
4층에서만 싸우는 게 아니라 3층과 2층도 돌파해야 하니 체력을 낭비할 순 없다.
“어쩔 수 없지. 돌아가자.”
뒤쪽에 수신호를 보낸 뒤에 방향을 틀어 움직였다.
당장은 돌아서 움직이는 게 시간을 소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전투가 벌어지면 더 오랜 시간을 쓰게 된다.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말이지.
“여기도 몬스터 수가 적지 않은데.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하면 여기가 가장 적은 것도 사실이야.”
발렌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몬스터가 잔뜩 깔려 있는데 없는 곳이 있을 리 없지.
몸을 나무에 기댄 채 조금 떨어져 있는 이민하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이쪽을 뚫고 가는 수밖에 없지.
“어떻게 하려고?”
“속전속결뿐이잖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이곳을 뜨는 수밖에.”
물론 그래도 피 냄새는 남아서 몬스터들이 쫓아오겠지만, 그나마 가장 몬스터가 적은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잠시만요.”
“…설소은 씨?”
어느새 앞으로 나온 설소은이 내 옆에 바짝 다가왔다.
“여긴 제가 할게요. 나중에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이동한다고 해도 계단 근처에서 하는 게 좋아요.”
설소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계단 근처라면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도망치기 좋으니까.
여기서부터 피 냄새를 끌고 다니면 4층을 이동하는 내내 시달려야 한다.
“다행히 여기선 제가 활약할 수 있어요.”
설소은은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건진 몰라도 일단 송인혁이 제지하지 않는 걸로 봐선 괜찮겠지.
“키엑? 케에엑!”
몬스터들은 바로 설소은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언제든 몬스터들을 벨 수 있도록 화도에 손을 가져갔고, 접근한 몬스터들을 향해 설소은이 손바닥을 펼쳤다.
촤아악!
“……!”
바닥에서 솟아오른 물기둥이 몬스터들을 덮쳤고, 이내 물이 뭉쳐서 커다란 물방울이 만들어졌다.
그곳에 갇힌 몬스터들은 숨을 쉬지 못한 채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