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진화된 능력 (2)
잠깐의 정적.
“저는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아무것도 못 했으니 빠지겠습니다.”
멋쩍게 웃은 송인혁이 두 손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
평소라면 전리품을 흔쾌히 양보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랐다.
그만큼 드래곤 하트라는 게 헌터들에게 매력적인 물건이라는 거겠지.
“…좋아. 나도 탐나는 건 사실이니까 이해는 하지만, 양보는 못 해.”
먼저 입을 뗀 건 류설영이었다.
“내려온 이상 다시 헌터로 일할 거야. 팔이 이런 상태니까 앞으로는 능력에 더 기대겠지.”
류설영은 자신의 허전한 어깨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식량은 다르게도 얻을 수 있어. 그걸로 양보하는 건 수지가 안 맞지.”
“나도 동감. 전설로만 내려오는 아이템인데 그거랑 식량을 저울 위에 올리는 것부터 잘못된 거 같은데.”
이민하도 류설영을 거들었다.
“드디어 나도 초월 능력을 얻었어. 헌터로서 성장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 없지. 아쉽지만 나도 양보 못 해.”
자연스럽게 시선은 옆에 있던 채하나에게로 돌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그녀는 당황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말했다.
“저는… 최현 씨가 달라고 하면 다 줄 수 있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하는 채하나를 보고 이민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채하나 씨도 갖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런 가식적인…….”
“가식적인 게 아니에요.”
단호하게 이민하의 말을 자른 채하나가 그녀를 살짝 노려봤다.
“가식적인 것도, 헌신적인 것도 아니에요. 최현 씨는 제가 가장 괴롭고 외로울 때 저를 잊지 않고 구하러 와 주셨어요. 뭐든 아깝지 않아요.”
“하아…. 그럼 설소은 씨는?”
이번엔 설소은에게 시선이 향했다.
“…저도 갖고 싶어요. 남들보다 능력을 많이 못 쓰니까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결국, 드래곤 하트에 욕심을 드러낸 건 네 사람이었다.
“그럼 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군요. 그렇다면 저도 굳이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조금 치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
초월 능력과 월하백화식으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젠 성장이 더뎌졌다는 게 느껴졌고, 나 역시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여전히 차윤지나 스승님, 그리고 여기 있는 류설영을 이기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선 드래곤 하트가 필요하다.
“일단 계속 휴식을 취하죠. 제대로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송인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이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욕심일 뿐 서로에 나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정신력만 회복되면 먹지 않아도 내려갈 수 있다고.”
“오호, 한 번 지켜보도록 하죠.”
***
우리가 4층 구석에서 숨어 지낸 지 벌써 3일.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배고픈 상태로는 회복이 더뎠기에 좀처럼 분위기가 나아지지 않았다.
다들 공복으로는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항복. 너 보기보다 고집이 있구나.”
류설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류설영은 내내 조급해 보였다.
어느 정도 회복된 류설영은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나선다면 애써 회복한 정신력을 다시 소모하게 될 것이다.
그럼 내려가는 시간은 더 오래 걸릴 테니까.
“난 포기할 테니까 알아서 해.”
입술을 빼죽 내민 류설영은 묘하게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얄미운 자식.”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하아, 알겠어. 나도 포기할게.”
이민하도 류설영을 따라 드래곤 하트에 손을 떼기로 했다.
“배고파서 방패를 들 힘도 없어. 여기 더 있는 것도 끔찍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 물뿐이었다.
간단하게 세면을 하는 게 전부였기에 몸에서 끔찍한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요.”
설소은의 항복을 마지막으로 거래는 끝이 났다.
“좋아요. 그럼 제가 식량을 구해 오고 드래곤 하트는 제가 갖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네. 마음대로 하세요.”
“어우 얄미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얄미운 표정으로 히죽거린 뒤, 바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혼자서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나 역시 배고파서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어차피 라이프를 소모하는 건 각오하고 있으니 괜찮다.
어떻게든 먹을 것만 구해 오면 문제는 없다.
“조심하세요.”
항상 내 걱정을 해 주는 채하나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지만, 채하나의 이런 표정을 보면 어떻게든 죽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금방 갔다 올게요.”
짧게 인사를 한 뒤 바로 게이트로 걸음을 돌렸다.
게이트는 우리가 숨어 지내는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
문제는 북쪽과 남쪽, 2개가 있는데 게이트의 내부가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식량을 얻기 위해선 기왕이면 정글 지형의 게이트이길 바랐다.
“으윽… 죽을 거 같아.”
“오랜만에 탈출이네.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발렌 역시 탄 냄새를 끔찍하게 싫어했는데 우리가 있던 곳은 탄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기에 그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형씨도 대단하네. 3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으면서 버틸 줄이야.”
“당연하지. 초월 능력을 진화시킬 수 있다니… 엄청나지 않아?”
발렌은 내 말을 썩 이해할 수 없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정글 지형이길.”
잠깐 기도를 하고 푸른색으로 일렁거리는 게이트에 발을 디뎠다.
짧은 어지러움 뒤에 뜨거운 감각에 눈을 뜨자 황금색의 모래 바다가 나를 반겼다.
“…….”
“꽝이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로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
하필이면 사막 지형이라니…….
내가 온 곳은 북쪽에 있던 게이트.
반대쪽에 있는 게이트를 향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기마저 꽝이면 다른 게이트를 찾아야 했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도 들어가는 건데, 그놈들… 잡기 쉽지 않을걸.”
발렌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게이트에 서식하는 동물들은 다른 의미로 잡기 어려웠다.
몬스터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잽싸고 예민하게 진화한 동물들은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발렌은 게이트 안에서 살 때 어떻게 잡았어?”
“나는 몬스터잖아. 그래서 함정을 만들고 기다렸지.”
우리가 갇혀 있었던 게이트에서 데스나이트는 나 외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른 오크들이 발렌을 공격할 리도 없다.
그러니 발렌은 마음 편하게 함정을 만들고 동물이 잡히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쓰기엔 조금 힘든 전략이다.
한 곳에서 오래 있기엔 다른 몬스터에게 발각될 위험이 컸으니까.
“함정을 파 놓고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다른 몬스터들이 잡힌 동물을 가져가면 어떡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거 외엔 방법도 없잖아.”
“…….”
발렌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감각이 예민한 동물들은 가까이만 가도 기척을 느끼고 도망치기에 사냥이 쉽지 않았다.
버프 능력을 써서 잡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날뛰면 다른 몬스터들도 내가 있다는 걸 눈치채겠지.
“일단 게이트 지형을 확인하고 생각해 보자.”
몬스터들이 나를 알아채고 날뛰기 시작하면 동물을 잡는 건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도 도망치는데 몬스터가 날뛰면 눈으로 찾기도 힘들어지겠지.
남쪽에 있는 게이트 근처에 도착했고, 게이트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 때문에 구석에 숨어서 나갈 수 없었다.
“저것들은 왜 저기서 알짱대고 있는 거야?”
“그래도 좋은 소식 아니야?”
발렌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몬스터들을 다시 확인하자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이언트 엔트와 트런트는 모두 정글 지형에서 볼 수 있는 몬스터였다.
만약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라면 내겐 희소식이 맞았다.
“지금이다!”
몬스터들이 게이트에서 조금 멀어지자마자 칠흑의 묵갑을 껴서 단숨에 게이트까지 블링크를 썼다.
몬스터들에게 들키기 전에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고 녹음이 가득한 풍경이 나를 반겼다.
“좋아! 더 이상 다른 게이트를 찾아서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어.”
“정글 지형인 건 다행이지만, 동물들은 어떻게 사냥하게?”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다른 몬스터에게 발각되지 않고 동물을 찾아서 사냥해야 한다.
동물을 사냥하면 피 냄새가 나기 시작하니 그것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기절시켜서 옮기는 수밖에 없지. 가져가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내가 몽둥이로 후려쳐서 기절시킬까.”
“된다면 얼마든지.”
현실은 발렌이 다가가기도 전에 도망치겠지만.
일단 최대한 모습을 숨긴 채 정글 안쪽으로 들어왔다.
정글은 숲이 우거져 있어서 몸을 숨기기엔 좋지만, 반대로 동물을 찾는 건 어려웠다.
“형씨! 저기!”
발렌이 가리킨 곳에 귀가 비정상적으로 큰 토끼가 보였다.
던전 안에 있는 동물들은 저런 식으로 우리가 아는 동물과는 모습이 달랐다.
“좋아. 한 번에 잡는다.”
돌을 하나 주워서 토끼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쐐액! 파악!
“…….”
돌을 던지자마자 눈치챈 토끼는 후다닥 어딘가로 도망쳤다.
이래서야 방법이 없겠는걸.
“형씨,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크게 기대는 하지 않지만, 아무런 대안도 없는 지금이라면 무슨 아이디어든 환영이었다.
“숲에 불을 지르는 건 어때?”
“너 그게 무슨… 괜찮은데?”
잔인한 방법이지만, 발렌의 생각은 기발했다.
숲을 태우면 냄새 때문에 몬스터들은 근처로 오지 않을 테고, 숲에 있는 동물들은 연기를 마셔서 자연스럽게 사냥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다 타 버리기 전에 불타는 숲에서 동물들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건데.”
“지금처럼 그림자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정곡만 찌르는 발렌의 말에 울컥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숲에 불을 지르는 건 확실한 전략이지만, 만약 실패하면 뒤가 없다.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다른 게이트로 또 이동해야 한다는 의미다.
“불을 지르고 탈출로를 만들면 동물들을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게이트 전체가 정글 지형이라 너무 크긴 하지만… 좋아, 한번 해 보자.”
불을 붙이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그 불이 원하는 형태로 번지게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불을 지르고 세 방향에서 몰면 충분히 가능해.”
“세 방향?”
아무리 발렌이 나와서 도와준다고 해도 둘인데?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스킬이 떠올랐다.
“내가 두 명이 되면 해결되는 문제였군.”
“바로 그거지!”
발렌을 소환하고 라이프 섀도우를 사용해서 분신을 만들었다.
분신을 다룰 수 있는 시간 동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럼 시작한다.”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사냥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