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새로운 최강 (5)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어야 카룬의 얼굴이 보였다.
덩치가 커진 카룬은 붉은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봤다.
반짝거리는 검은색 비늘과 세상을 덮을 듯 커다란 날개, 그리고 매서운 발톱은 그 위용을 뿜어내고 있었다.
“폴리모프 상태에서도 힘들었는데, 이거 이길 수 있는 건지 모르겠네.”
“하는 데까지 해 봐야죠.”
라이프 파워의 지속 시간은 2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안에 끝내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카룬의 체력은 여전히 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전체 체력이 늘어나더라도 남은 체력은 비례해서 유지되는 모양이었다.
“파괴력은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겠지만, 움직임은 둔해졌어요.”
“자, 오시죠!”
쿠웅!
카룬의 한 걸음 내딛자 바닥이 흔들렸다.
“검 좀 빌릴게!”
에렌 셀을 든 류설영이 카룬을 중심으로 빙 돌아서 움직였다.
그와 반대로 움직이며 카룬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어쨌든 양쪽을 다 볼 수는 없으니 놈에게 빈틈을 만들려면 이런 식으로 넓게 자리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System : 공격력 버프가 적용됩니다. 공격력이 41% 상승합니다. -1:00-]
채하나의 버프를 보자마자 위로 힘껏 뛰어올랐다.
어떻게든 놈의 날개를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기는 건 쉽지 않다.
“뻔하군요.”
파앙-!
“……!”
카룬이 날개를 힘차게 움직이자 단숨에 폭풍이 일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까이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잖아.
“형씨. 우리가 노릴 수 있는 건 아까 만든 상처뿐이야. 거기를 공략하고 빈틈이 생겼을 때 공격을 퍼붓는 수밖에.”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놈의 상처는 등에 있다.
거기까지 우리가 도달하는 게 쉽진 않겠지.
“문제는 내 다리가 슬슬 삐걱거린다는 거지.”
발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능력치는 전보다 강해진 것 같은데 이 의족은 그걸 버티지 못해. 오래 싸우긴 힘들어.”
“나를 위로 던져 줘.”
“뭐?!”
발렌은 내 말에 흠칫 놀라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미친 짓이야! 아까도 날개 때문에 가까이도 못 갔잖아.”
“놈에게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건 무리지만, 놈의 위쪽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룬의 바로 위로 시선을 옮겼다.
“하아,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너만 믿는다.”
발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지만, 결국 내 부탁을 들어줄 거다.
이대로 전투가 계속되면 우리에게 승기는 없다.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서 흐름을 바꿔야 한다.
“작전 회의는 끝난 모양이군요.”
카룬의 쩍 벌린 입에서 불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 주변을 둥글게 뒤덮었다.
“제가 만든 전장이 마음에 드십니까?”
“…변태 같은 취미네. 류설영 씨!”
“알았어!”
내 말을 듣자마자 류설영이 카룬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카룬은 가소롭다는 듯이 몸을 회전시키며 묵직한 꼬리를 휘둘렀다.
빠악!
꼬리에 맞은 류설영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
그러나 그가 들고 있던 에렌 셀이 꼬리에 박혀 있었다.
꼬리를 휘두르는 힘을 이용해서 쑤셔 넣은 건가.
“얕보지 말라고 도마뱀 자식아.”
“발렌 지금이야.”
카룬의 시선이 류설영에게 돌아간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젠장, 난 어떻게 돼도 모른다?!”
발렌이 내 발목을 잡고 공중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무시무시한 힘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카룬의 위까지 날아오른 상태였다.
“정확해!”
화도를 검날이 아래쪽으로 향하게 움켜쥔 뒤 팔을 최대한 뒤쪽으로 당겼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튕기듯 검을 내던졌다.
쐐애액!
매섭게 쏘아진 화도는 정확히 아까 만든 상처로 빨려 들어갔다.
콰직!
“크아악!”
맞은 데 또 맞는 것보다 아픈 건 없지.
카룬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상처 부위도 커진 게 다행이었다.
몸부림치는 카룬의 등 위에 내린 나는, 박혀 있는 화도를 움켜쥐고 놈의 등을 내달렸다.
촤아악!
나를 따라 카룬의 흉터가 쭈욱 찢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쿠에에엑!”
원래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이미 검이 박혀 있는 상태라면 상처를 찢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나를 어떻게든 떨어뜨리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카룬의 앞에 발렌이 뛰어올랐다.
“형씨만 보면 질투 나잖아. 나도 좀 봐 달라고!”
부웅- 빠악!
발렌의 몽둥이가 카룬의 머리통을 가격했고,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파앙!
다급해진 카룬은 날개를 펼치고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등이 펴지며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최현 씨!”
“저는 괜찮아요.”
채하나가 서둘러 내게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카룬은 아까보다 진득한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이런 죽음의 위기를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저도 전력으로 당신들을 죽이겠습니다.”
입을 벌린 카룬에게 푸른색의 빛이 모이는 게 보였다.
젠장, 이건…….
이미 한 번 본 기억이 있다.
드래곤 최종 병기 브레스.
“브레스에요. 얼른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요. 브레스는 말도 안 되는 범위와 파괴력을 가진 기술이에요. 전에는 던전에서 아예 빠져나와서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럼 어쩌죠?”
지금으로선 브레스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놈이 공중에 있는 상태여서 공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주변을 뒤덮은 불의 울타리는 설소은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없앨 수 있다고 쳐도, 범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제가 막아 볼게요.”
우리 앞으로 나선 채하나가 정면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막을 수 있을 리가…….”
“그렇다고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자신의 키보다 몇 배는 큰 대형 베리어를 만든 채하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애초에 방어형 치유계가 아니라 베리어의 내구도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채하나를 보고도 다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만한 크기에 밀도를 최대로 높였으니 그녀의 정신력이라고 해도 버틸 수 없겠지.
“괜찮아. 베리어가 뚫리면 내가 막을게.”
채하나와 베리어 사이로 들어온 이민하가 커다란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난 방패수인걸. 적의 공격을 막아서 아군을 지키는 게 내 역할이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즐거웠습니다.”
카룬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쿠우웅!
빛이 닿는 땅이 일그러지며 뭉개졌고, 채하나의 베리어에 닿았다.
3초, 아니 2초인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막아 내던 베리어는 균열이 일어나더니 힘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브레스는 그 뒤에 있던 이민하를 덮쳤다.
“어떻게든 막는다!”
물론 드래곤의 브레스가 방패에 막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이민하의 앞에 베리어와 비슷한 형태의 투명한 방패가 나타났다.
“저… 저게 뭐죠?!”
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방패는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 내고 있었다.
촤아악.
브레스가 점점 사라지자 이민하의 앞에 있던 방패도 그 모습을 감추었다.
“……!”
“브레스를… 막았어?!”
“이민하 씨!”
힘없이 쓰러지는 이민하에게 채하나가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채하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정신을 잃은 것뿐이에요.”
“방금 그건…….”
얼떨떨한 표정의 송인혁에게 말했다.
“아마도 초월 능력인 것 같아요.”
“초월 능력이라면?!”
“이민하 씨가 방금 상황에서 초월 능력을 각성한 거죠.”
초월 능력은 어떠한 욕망에서 나온다는 설이 있다.
내가 죽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 쳤을 때 이 초월 능력을 얻은 것처럼, 이민하는 막아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로 초월 능력을 얻은 걸지도 모른다.
“…설마하니 브레스를 막다니.”
여전히 공중에 날고 있는 카룬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브레스를 쓰고 난 직후엔 드래곤의 힘이 상당히 약해진다.
다시 회복하기 전까진 내려오지 않을 생각인가.
“이번엔 제 차례에요. 앞에서 그런 모습을 봤는데 구경만 할 수는 없죠.”
앞으로 나선 설소은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무언가 중얼거리자 바닥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주먹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얇은 물줄기는 단숨에 카룬이 있는 곳까지 솟아오르더니 카룬의 날개를 관통했다.
“……!”
“수압?!”
평소에 사용하는 물기둥을 압축시켜 수압을 끌어올린 것이다.
이내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얇은 물기둥이 솟아올랐고, 카룬의 날개 곳곳에 구멍을 뚫었다.
원래대로라면 카룬에게 통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떨어진다!”
“뒤를 부탁드릴게요.”
설소은 역시 정신력이 한계였기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발버둥 치던 카룬은 날개의 구멍 때문에 더 이상 날 수 없었고,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쿠웅!
묵직하게 충돌한 카룬이 다시 몸을 일으키기 전에 놈에게 달려들었다.
월하백화식 화왕.
쌔엥-!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놈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화왕부터 시작해서 매화, 앵화, 목란으로 이어졌다.
검이 닿을 때마다 피를 뿜어내는 카룬은 괴로운 듯 몸을 비틀거리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싸우는 건 즐겁다며!”
빠악!
발렌이 카룬의 턱을 힘껏 후려갈겼고, 놈의 목에 류설영의 에렌 셀이 박혔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카룬을 보고 그제야 숨을 토해 냈다.
“허억… 허억…….”
놈이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화도를 휘두르느라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주… 죽은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여전히 우리가 이겼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카룬의 몸이 잿빛으로 변하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드래곤을… 잡았다!”
“살았어요!”
울먹거리는 채하나가 내게 안겨 왔고 그녀를 떼어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Level Up!]
[Level Up!]
연속 2업?!
드래곤은 드래곤이구만.
[System : 퍼플 스톤x1, 드래곤 하트x1, 검은 비늘x3, 드래곤의 발톱x1을 획득했습니다!]
전리품을 얻자마자 인벤토리에서 꺼내 모두 앞에 보여 줬다.
“드래곤 하트!”
류설영이 드래곤 하트를 보고 깜짝 놀랐고, 옆에 있던 송인혁도 놀란 얼굴이었다.
“드래곤 하트는 특별한 아이템인가요?”
“나도 들은 얘기라 확실하진 않지만 드래곤 하트를 먹으면 헌터의 능력이 한 단계 진화한다고 해. 초월 능력이라던지, 특수계 능력이 강화된다는 거지.”
“네?! 그런 게 가능해요?!”
류설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해 보지 않으면 나도 모르지.”
“아무래도 이건 쉽게 나눌 수 없을 것 같네요.”
솔직히 나도 탐나는 게 사실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탐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을 수밖에.
“일단 네가 갖고 있어. 이민하 씨가 깨어나면 얘기해 보자.”
“그게 좋겠어요.”
어찌 되었건 이번 싸움의 최대 공적을 쌓은 건 이민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