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새로운 최강 (4)
“평범한 놈이라면 처리하는 게 빠르겠지만, 맡아 본 기억이 있는 냄새야.”
발렌은 인상을 구기며 내게 말했다.
“형씨도 기억하지? 그 드래곤 자식.”
“뭐…? 드래곤이라면… 카룬?”
“……!”
카룬이라는 이름에 옆에 있던 채하나도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그녀 역시 던전에서 탈출할 때 같이 있었으니 카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처음엔 폴리모프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나중에 드래곤 형태로 변하는 바람에 죽자고 튀었지.
“하나 씨도 아는 거야?”
“그 드래곤 때문에 윈드버드를 타고 탈출했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감했다.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별종이라고 하던데, 저 녀석은 싸움광이예요.”
“싸움광?”
류설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자 그대로 싸움에 미친 녀석이더라고요. 강한 상대랑 싸우는 것을 즐기고 그걸 위해 살아가는 놈이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조금 서운하군요.”
“……!”
카룬이 풀숲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우리는 동시에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반가운 얼굴이군요.”
“…반갑다는 뜻을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화도로 손을 가져가며 언제든 뽑을 준비를 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강한 분이 많다는 걸. 누가 먼저 저를 즐겁게 해 주실 거죠?”
그의 붉은 눈이 번쩍였다.
역시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다는 건가?
여기서 카룬이랑 붙었다간 무사히 넘어가진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카룬을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싸울 수밖에 없어.”
“……!”
류설영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오히려 도망치는 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적어. 알고 있겠지?”
“…그건 그렇지만, 드래곤이라고요.”
드래곤에 대한 정보는 매우 희박하지만, 퍼플 라벨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르티아와 블랙 퀸이 퍼플 라벨이었던 걸 생각하면 당연히 쉽지 않겠지.
“우린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 선택을 강요받은 거지.”
류설영의 손에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
모두가 살아서 내려가기 위해선 싸우는 수밖에.
“오지 않는다면 먼저 가겠습니다!”
아직 인간 형태로 폴리모프 중인 카룬이 매섭게 주먹을 뻗어 왔다.
평범한 공격이지만, 저 주먹에 맞으면 몸에 구멍이 날지도 모른다.
[System : 속도 버프가 적용됩니다. 속도가 21% 상승합니다. -7:13-]
“서포트할게요!”
채하나의 판단은 정확했다.
카룬은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노리고 있는 먹잇감은 나였다.
저번에 그런 식으로 나를 놓치고 뒤통수를 맞았으니 마음에 안 들겠지.
카가각!
화도를 단숨에 휘둘렀지만, 카룬의 비늘을 뚫을 수 없었다.
“아직 제대로 할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시끄러워!”
놈이 말하는 건 라이프 파워다.
그땐 버프를 쓰고 싸웠으니 지금 내 움직임과는 전혀 달랐겠지.
캉! 카앙-!
지금은 카룬의 공격을 월하백화식으로 받아치는 게 전부였다.
놈의 새까만 비늘은 웬만한 갑옷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고, 마치 쇳덩이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숙여!”
뒤에서 들려온 류설영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아래로 내렸다.
파지직!
내게 달려들던 카룬의 얼굴에 류설영의 전격이 정통으로 쏟아졌다.
촤라락!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송인혁의 사슬이 카룬의 손목을 휘감았다.
“역시 보통 실력들이 아니군요. 만족스럽습니다.”
파앙!
“……!”
카룬은 전격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슬에 묶인 손을 안쪽으로 당기자 송인혁은 힘없이 카룬 쪽으로 딸려 갔다.
쌔엥-!
다급히 화도로 쇠사슬을 베었고, 송인혁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대로 끌려갔다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우, 감사합니다.”
“조심하세요.”
카룬이 팔에 감겨 있는 쇠사슬을 처리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버프를 모두 쓰면 인간 형태의 카룬은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놈이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손 쓸 수가 없다.
“역시 화력이 부족해.”
“어떡하죠?”
류설영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의 전격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전격을 쓰는 게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괜찮아요! 절 믿고 싸워 주세요.”
채하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고, 모두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는 아직 멀쩡해요. 버프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상태고,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해 보죠.”
송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의 먼지를 털어냈다.
“든든한걸.”
“맡겨 주세요.”
빈말이 아니었다.
울보인 데다가 겁이 많은 그녀가 당당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믿을 수밖에 없지.
확실히 채하나의 비정상적인 정신력은 지금까지 전투에서 능력을 썼다고 해도 넘쳐날 정도다.
“저랑 이민하 씨가 전위로 나서겠습니다.”
“알겠어!”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채하나는 전투 센스 또한 뛰어났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완벽하게 그녀를 믿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쓰고 단숨에 카룬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앗!
“……!”
쌔엥-!
화도가 놈의 목을 노리고 뿜어졌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한 카룬이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제대로 할 생각이 드셨나 보군요.”
자세가 무너진 나를 향해 놈의 주먹이 파고들었다.
쩌엉-!
우리 둘 사이로 끼어든 이민하가 자세를 낮춘 상태로 카룬의 주먹을 막아 냈다.
“크윽……!”
그녀의 방패가 살짝 일그러지는 걸 보고 놈의 힘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알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당연하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런 걸 몇 번 더 막으면 내 방패는 종잇장처럼 찢어질 거야.”
위협적인 파괴력이었지만, 그렇다고 공격 속도를 늦출 순 없었다.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꾸준히 공격을 이어 가는 수밖에.
[System : 공격력 버프가 적용됩니다. 공격력이 41% 상승합니다. -1:00-]
채하나의 버프를 받고 바로 다시 카룬에게 달려들었다.
캉! 카앙!
카룬의 공격을 피하며 놈의 몸에 연신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능력치가 상승했기에 지금 제대로 공격이 먹힌다면 카룬의 비늘을 뚫을 수 있다.
“혼자서 비등하게 싸우고 있어.”
“…안 본 사이에 더 강해졌는데?!”
아니, 오히려 전투를 압도하고 있는 건 내 쪽이었다.
스킬과 버프를 받은 상태에선 카룬의 인간 모습은 내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는 내 공격을 흘리거나 받아치는 게 전부였다.
“최현 씨!”
“알고 있어요.”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몇 번이나 제대로 공격이 들어갔는데 카룬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단순히 놈의 비늘이 단단한 게 아니다.
“이 자식… 공격 타이밍에 맞춰서 베리어를 두르고 있어요.”
화도가 닿기 직전에 그 부분에만 밀도 높은 베리어를 만들어서 대미지를 최소화하고 있다.
좁은 범위에 순간적으로 베리어를 발생시키는 거라 정신력 소모도 크지 않을 거다.
애초에 드래곤의 정신력은 인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이지만.
“계속 그렇게 버틸 생각인가?”
“버티다니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대로 싸워 봐야 카룬이 나를 압도하진 못한다.
그런데도 드래곤 형태로 돌아가지 않는 건 그가 말한 대로 싸움을 즐기고 있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내 버프가 끝나는 걸 기다리고 있다던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지.”
카앙-!
단숨에 놈과 거리를 좁혀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사방에서 검이 들어오는데 타이밍에 맞춰 베리어를 만들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괴물 같은 전투 방식인 셈이다.
“이렇게는 끝도 없겠어.”
“어쩌죠?!”
둘의 싸움에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끼어들 수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에렌 셀을 꺼내 놈의 가슴 가운데를 노리고 찔러 넣었다.
파악!
“……!”
가볍게 내 손목을 발로 찼고, 에렌 셀을 놓쳐서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 어쭙잖은 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네.”
인상을 구긴 나는 다시 화도를 매섭게 휘둘렀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격을 피하던 카룬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미 늦었어!”
“……!”
놈이 반응하지 못하도록 목란을 써서 얼굴을 노렸다.
아주 약간의 빈틈이었지만, 이 공격이 들어가면 카룬에게 치명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옆으로 피했고, 뒤에서 류설영이 내가 놓친 에렌 셀을 힘껏 카룬의 등에 꽂아 넣었다.
카앙-!
“젠장, 마치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는 거 같잖아!”
“비켜!”
에렌 셀은 카룬의 비늘을 뚫지 못했지만, 발렌이 몽둥이를 힘껏 휘둘렀다.
빠악! 콰직!
몽둥이가 에렌 셀 손잡이 아랫부분에 정확히 명중했다.
카룬의 베리어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에렌 셀이 놈의 등에 깊게 박혔다.
“무시무시한 괴력이구만. 나도 질 수 없지.”
파지지직!
등에 박힌 에렌 셀을 쥐고 전격을 안으로 집어넣을 셈인가.
“……!”
류설영의 몸에서 전격이 일어나는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설소은이 카룬에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대량의 물이 카룬을 단숨에 덮쳤고, 휘말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뒤로 물러났다.
“후으읍!”
콰지지직!
류설영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전격이 사방을 뒤덮었다.
“크아아악!”
처음으로 카룬의 비명이 들려왔다.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나서야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비틀거리는 류설영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한계를 넘은 상태에서 저만한 전격을 썼으니 정신력이 멀쩡할 리 없겠지.
몸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카룬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쓰러뜨린 건가?”
“아니. 아직 멀었어.”
카룬의 체력바는 여전히 반이나 남은 상태였다.
드래곤의 무지막지한 생명력을 생각해 보면 방금 공격으로 반이나 깎은 게 기적이었다.
그렇게 흠뻑 젖은 상태로 류설영의 전격이 몸 안쪽에 파고들었으니 이런 대미지를 입는 것도 이해가 간다.
“발렌, 너 원래 그렇게 힘이 강했나?”
“나도 모르겠어. 어쩐지 평소보다 몇 배는 강해진 기분인데.”
발렌의 능력치는 내 능력치와 비례한다.
그렇다면 내가 스킬을 쓰면 버프가 지속되는 동안 발렌의 능력치도 상승하는 건가.
“역시 즐겁군요. 강한 자들과 싸운다는 것은.”
여전히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카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붉은 눈이 더욱 매섭게 번쩍이며 우리를 훑어봤다.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사이좋게 죽여 드릴 테니 전력으로 덤비십시오.”
일어난 카룬은 등에 박혀 있는 에렌 셀을 거칠게 뽑아냈고, 그의 등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몸이 뒤틀리는 것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등 뒤에서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촤아악!
“……!”
“본격적으로 즐겨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