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새로운 최강 (3)
잠깐의 정적.
“푸흡.”
웃음을 터뜨린 건 꽁꽁 묶인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민하였다.
오크가 이렇게 멋있게 등장하기도 힘들지.
그녀와 채하나는 발렌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 오크가… 말을?!”
“그보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우리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헌터들이 당황한 사이 류설영의 몸에서 전격이 일어났다.
“잠깐 따끔합니다!”
콰지지직!
깔끔하게 우리 뒤에 있는 두 사람에게만 전격이 덮쳤고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됐다.
기다리고 있던 발렌이 묶여 있는 밧줄들을 모조리 풀어 주자 상황은 단숨에 역전됐다.
“이 자식들… 너희도 교주님이랑 같은 능력을 가진 거냐?!”
“난 세뇌 따위 당한 게 아니다.”
부웅-! 카앙!
다른 헌터들에게 달려든 발렌이 힘껏 몽둥이를 휘둘렀다.
“내 의지로 움직이는 거야.”
발렌의 듬직한 등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울컥한단 말이지.
다시는 같이 싸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발렌은 누구보다 든든하게 내 앞에 서 있었다.
“송인혁 씨!”
“네!”
멍하니 발렌을 보고 있던 송인혁은 내 외침에 바로 사슬을 움직였다.
촤라락!
그의 사슬은 정확히 발렌과 검을 맞대고 있는 헌터의 손목을 낚아챘다.
“윽……!”
빈틈이 생기자마자 발렌의 묵직한 주먹이 그의 턱을 강타했고, 자세가 무너지자 매서운 몽둥이가 얼굴을 후려쳤다.
빠악!
바닥을 한참 뒹군 헌터가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헌터들도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뭐… 뭐야. 보통 오크랑은 차원이 달라.”
“당연하지! 이 몸은 오크가 아니라 발렌이거든!”
당당하게 말하는 발렌을 보고 최대한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이번엔 멋있으니까 건들지 말아야지.
물론 여기 있는 헌터들이 오렌지 라벨인 몬스터에 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무려 2위 길드의 정예 인원들이니까.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말하는 오크가 다른 오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면 나라도 당황하겠지.
“더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비키지?”
남은 건 5명.
그들이 우리를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그들을 보고 굳이 따라붙지 않았다.
이미 우리도 한계까지 지친 상태였고, 여기서 싸운다고 해도 득이 될 건 없었다.
류설영과 설소은은 더 이상 능력을 쓸 수 없을 정도니까.
“돌아간다.”
“…! 하지만…….”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체격이 큰 남자가 휙 돌아섰고, 다른 헌터들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곳에서 목숨을 내놓고 싶다면 남아도 좋다.”
우리가 추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헌터들은 우리를 경계하며 서둘러 그에게 따라붙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아, 다들 무사하신 거죠?”
“무사하다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너덜너덜해진 서로의 모습은 안쓰러워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쪽은…….”
“아, 저는 류설영입니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고 다들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전격을 쓰는 걸 보고 설마 했는데…….”
“진짜 류설영 씨라고요? 그 행방불명된?!”
류설영은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자연스럽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정이 좀 있어서요. 현이랑은 애틋한 사이죠.”
“누가 애틋해요! 그리고 냄새난단 말이에요.”
“너무해.”
달라붙는 류설영을 억지로 떼어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멍하니 나와 류설영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최현 씨가 류설영 씨와 친한 사이로…….”
“하하, 어쩌다 보니…….”
“하여간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이번엔 류설영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쉬지 않고 계속 전투를 이어 왔고, 자력으로 탈출하려고 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렸겠지.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뭘, 나도 혼자서 던전을 나가는 건 버거운 참이었으니까 만나서 다행이지.”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발렌에게로 돌아갔다.
설소은이 조심스럽게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이분은…….”
“풉.”
발렌에게 존칭을 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고 어쩐지 발렌의 얼굴이 붉어진 게 보였다.
“그만 웃어!”
“아, 미안. 소개할게요. 제 친구예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돌연변이인데 초월 능력 덕분에 함께 다닐 수 있거든요.”
“친구……?!”
설소은과 송인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류설영은 신기하다는 듯이 발렌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이야, 지금까지 살면서 오크랑 인간이 친구라는 건 들어 본 적도 없거든.”
“이제 들어 봤네. 그만 조물딱거려!”
발렌의 굵직한 팔뚝을 만지작거리는 류설영의 모습은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았다.
어쨌든 앞으로도 발렌과 계속 싸우려면 위에도 보고하는 게 맞겠지.
몬스터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언젠간 거쳐 가야 할 일이다.
“그럼 일단 장소를 옮겨서 쉴까요?”
***
던전의 구석 쪽에서 벽을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발렌을 만나게 된 경위와 류설영과 17층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 주었다.
마치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그들은 나름 귀엽게 느껴졌다.
“발렌 씨는 멋진 분이군요.”
“발렌이 없었다면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발렌에겐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발렌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발렌은 내게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였고, 그런 발렌을 다른 동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나는 다른 동료들이 있지만, 나와만 소통을 해 왔던 발렌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길 바랐다.
“오, 아가씨가 물을 다루는 능력을 마력계 헌터구만.”
설소은을 발견한 류설영은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이렇게 작은 체구로 헌터를 하다니… 대단한걸.”
“…….”
뭔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느낌의 설소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어디론가 숨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하하하! 아까 흠뻑 젖은 녀석들에게 전격을 먹이니까 효과가 기가 막히더라고. 나중에 길드에 들어가야 한다면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좋겠네.”
“……!”
류설영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며 바라봤다.
“기… 길드를 그렇게 쉽게 정하셔도 되는 거예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이민하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너도 뜬금없이 우리 길드로 왔으면서.”
“…그것도 그렇네요.”
원래 협회 소속으로 활동했던 나는 스승님께 검술을 배우고 갑작스레 레이브 길드에 들어왔다.
사실 나도 딱히 큰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나중에 이 아가씨랑 같이 싸우면 우리 화력 엄청날 것 같지 않아?”
능글맞은 류설영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둘의 능력이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SS급 헌터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류설영 씨가 헌터계에 복귀하시면 난리가 날 텐데, 좀 더 좋은 길드로 가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송인혁은 침착하게 류설영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설소은이 속한 길드인 백운의 길드 마스터는 다름 아닌 송인혁이군.
두 사람만 봐도 백운 길드가 얼마나 괜찮은 길드인지는 알 수 있었다.
송인혁은 리더십도 뛰어나고 남을 배려하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저희 길드 입장에선 와 주신다면 감사하지만, 류설영 씨에게 어울리는 곳이…….”
“좋아! 정했어요. 역시 이 길드에 가겠어요.”
“자… 잠깐! 방금 제 얘기는 못 들으신 건가요?!”
류설영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이렇게 저를 생각해서 말해 주는 것부터 이미 합격이라는 거죠. 송인혁 씨가 마스터라고 했으니 분명 좋은 길드겠네요.”
“아뇨, 그렇지는…….”
손을 휘휘 젓고 있었지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니 내심 좋은 모양이다.
나중에 류설영에게 잔뜩 휘둘리는 송인혁의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 그럼 이제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방법이랄 것도 없지.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몬스터들 처리하면서 천천히 내려가는 수밖에.”
던전 내부의 크기는 굉장히 넓었기에 몬스터들과 싸우며 이동하는 건 상당히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심지어 4층부터는 게이트 공략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몬스터의 수도 많았다.
안전성을 따진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만…….
“죄송하지만, 저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시한부인 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거든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류설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혼자서 내려가려고 했고, 여기서부터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류설영을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방식에 따라선 우리 조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류설영과 친분이 있는 나는 쉽사리 나설 수 없었다.
“아뇨. 혼자 가게 둘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건 송인혁이었다.
그는 가만히 류설영을 보며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더더욱 길드원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도록 둘 수 없습니다.”
“에엑? 하지만 저는 아직 길드에 들어가지 않은걸요!”
“예비 길드원이잖아요.”
이내 송인혁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아무리 조장이라지만,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저 혼자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원하지 않으신다면 저 혼자 류설영 씨를 따라가겠습니다.”
“……!”
그의 말에 류설영을 포함한 모두가 놀라서 바라봤다.
우리가 알고 있던 송인혁은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렇기에 조장에 어울렸고, 그의 리더십이 뛰어나다고 느낀 것이었다.
“하아, 알겠어요. 그럼 일단 같이 움직이도록 하죠. 하지만 저는 이 두 사람을 책임지는 팀장이기 때문에 만약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이민하의 말에 송인혁이 반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처음 본 류설영을 위해 저런 모습을 보이는 송인혁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리더라는 자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그럼 조금 뻔뻔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혼자서 가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니까요.”
정상적인 상태의 류설영이라면 오히려 혼자 가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상도 심각하고 능력도 많이 써서 지친 상태였다.
속도를 떠나서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들 고개 숙여!”
발렌의 다급한 목소리에 우리는 그의 말을 따라 몸을 낮추었다.
“무슨 일이야?”
“몬스터 냄새가 다가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