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새로운 최강 (1)
“이건 또 무슨 능력이지?”
화도가 퀸의 어깨에 박혀 있는데도 피가 나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가만히 서 있는 퀸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죄송해요. 혹시나, 최현 씨가 저를 공격하지 않고 망설일까 시험해 봤어요. 그랬다면 실망했겠지만요.”
“…애초에 잡힐 수가 없어서 그렇게 당당했던 거군.”
그녀를 찔렀을 때 분명 검이 들어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살아 있는 생물을 찔렀을 때의 감각이 아닌, 찰흙 같은 무언가를 찌른 느낌이었다.
“분신인가?”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분신이라곤 하지만, 실제 저와 의식을 공유하고 있어요. 육체만 가짜일 뿐 저라는 거죠.”
파악.
그녀에게서 화도를 뽑아 허리춤에 다시 집어넣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퀸이 가짜라면 지금 이 분신을 해치우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정보를 빼내야 한다.
“그보다 오크를 다룰 수 있다니, 전혀 상상도 못 했어요.”
퀸의 고개가 내 쪽에서 발렌에게로 돌아갔다.
“다루는 게 아니야. 내 친구거든.”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씨익 웃더니 갑자기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이내 그녀의 하얀 피부와 함께 얼굴이 드러났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짙은 검은 색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 있었다.
하얀 피부 때문인지 붉은 입술이 도드라졌고, 초승달 모양의 눈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몬스터와 친구라… 하은주 씨의 능력과는 전혀 다르군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흠칫 놀라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앗…!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능청스러운 그녀의 연기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노려봤다.
“이건 또 뭐 하는 거지?”
“글쎄요. 그냥 말실수했을 뿐인걸요.”
그녀가 말한 하은주라는 사람은 아마도 앙그라마이뉴의 교주라고 불리던 그 여자겠지.
킹이 내 능력을 뺏는 걸 실패한 순간부터 앙그라마이뉴와 레인이 굳이 같은 길을 갈 필요가 없어졌다.
애초에 실세인 퀸은 그쪽에 전혀 관심도 없어 보이고.
“저는 지극히 현실주의자거든요. 몬스터 군단을 만들어서 세상을 정복한다던가, 던전을 완전 공략해서 몬스터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던가…. 그런 거 싫어하거든요.”
퀸은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도 최현 씨는 그렇게 싫지 않아요.”
“그거참 고맙네.”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꿈을 꾸면 어쩐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든요.”
그렇게 말한 퀸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이 힘으로 돈을 벌 거예요. 최현 씨가 믿든, 안 믿든 당분간 최현 씨의 능력은 노리지 않을게요.”
“노려도 돼. 그 전에 내가 잡아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을게요.”
퀸이 말을 마치자마자 분신의 몸이 점점 잿빛으로 변하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분신을 만들 수 있는 게 초월 능력이라면 다른 헌터의 능력을 뺏고 심어 주는 건 초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면, 실제로 ‘수술’이라는 걸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가.
지금 생각해 봐야 알 수 없지.
“고마워, 발렌. 덕분에 살았어.”
“너무 싱거워서 아쉬운데. 간만에 몸 좀 풀어 보나 했는데 이대로 다시 들어가야 하다니…….”
“금방 또 활약할 수 있을 거야.”
입맛을 다시는 발렌을 다시 시스템에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다행이다! 무사하셨군요!”
“그건 저희가 할 말이거든요.”
바닥에 쓰려져 있는 남자는 비숍인 듯했다.
역시 믿음직한 사람들이라니까.
“방금 막 쓰러뜨린 참이야. 생각보다 강해서 애먹었어.”
블링크 능력에 그만한 괴력이라면 까다로운 것도 당연했다..
“안에서 킹이랑 퀸과 싸우고 오신 건가요?”
송인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와 이리저리 살폈다.
“네, 킹은 처리했어요.”
“……!”
나는 최대한 간추려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애초에 퀸은 그를 리더로 따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네요.”
“그런 것 같아요. 능력을 뺏고 옮기는 것만 가능하다면 킹이 없어도 아무런 영향이 없을 테니까요.”
주변을 이리저리 살핀 뒤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유한성은 도망친 건가요?”
“밖으로 나갔어요.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할지 얘기 중이었어요.”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있는 문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유한성이 들어온 그 문을 통해 나가면 아마 5층으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유한성은 우리가 1층에서 들어온 문은 없애고, 이곳에 있는 문만 남겨 두었다.
대놓고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거다.
“선택권이 없네요.”
“뚫고 나가는 것밖에는 없나.”
밖으로 나가면 아마 앙그라마이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퀸이 말했던 하은주라는 여자가 다시 몬스터 부대를 늘렸을 가능성도 크다.
“그런데 그렇게 인원이 많으면 음식이나 그런 게 부족하지 않을까요?”
채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던전에서 반년이나 숨어 살았기에 살아남기 위해 식량 조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채하나의 말처럼 앙그라마이뉴는 인원이 많았고, 심지어 그들은 몬스터가 먹을 음식까지 준비해야 한다.
“아마 그렇겠죠. 게이트와 던전에서 어느 정도 구할 수는 있겠지만, 한계가 분명할 테니까요.”
지금은 그때처럼 다루는 몬스터의 숫자가 많지 않다.
그래도 식량의 압박은 존재하겠지.
“유한성이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외부와 연결된 문을 만들어 뒀을 거야.”
이민하의 말에 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능력은 다른 두 장소를 연결하기에 좋은 능력이니까요.”
원래 있던 곳에 공간과 문을 만들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그 공간과 연결된 또 다른 문을 만들면 두 공간을 연결할 수 있다.
직접 이동해야 문을 연결할 수 있다는 단점만 빼면 사기적인 능력인 건 틀림없다.
“아무튼, 그럼 저희끼리 나갈 수밖에 없네요.”
이곳은 독립적인 공간이라 외부에 있는 통신계 헌터와 연결도 되지 않는다.
즉, 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결국 앙그라마이뉴와의 전투는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역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군요.”
송인혁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5명.
5명이 하나의 길드를 상대해야 한다.
전에 혼자서 앙그라마이뉴와 싸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땐 아직 앙그라마이뉴의 길드원이 다 모이지 않았었고, 모아둔 몬스터도 유한성의 공간 안에 있었다.
즉석에서 하은주가 몬스터를 세뇌해서 쓰긴 했지만,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일단은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보죠.”
“그게 좋겠어요.”
“나가서 앙그라마이뉴를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1층까지 가는 게 쉽진 않을 거예요.”
앙그라마이뉴가 있는 건 5층.
우리가 1층 본대로 복귀하기 위해선 4층부터 2층까지 돌파해야만 한다.
겨우 5명으로 던전을 뚫고 내려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단 앙그라마이뉴를 뚫고 4층까지 도망치는 게 최우선 과제군요.”
“쉽지 않겠네요.”
앙그라마이뉴는 많은 길드 중에서 2위를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헌터가 많다.
그런 헌터들을 뚫고 도망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입구에서부터 다들 공격할 태세로 기다리고 있겠지.”
이민하가 인상을 구기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차피 우리가 나갈 수 있는 입구는 하나였고, 그들은 그 주변만 철저하게 막으면 된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좁은 곳을 뚫고 나가는 건 다수의 인원으로도 힘든데, 저희는 심지어 적은 인원이잖아요. 정공법으론 무리에요.”
“그럼 좋은 생각이 뭔가요?”
나는 검지를 들어 보이며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먼저 포위망을 돌파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설소은 씨가 해 줄 겁니다.”
“……?!”
손가락 끝이 그녀에게로 향했고, 그대로 모두의 시선이 옮겨 갔다.
흠칫 놀란 설소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첫 번째 돌파를 위한 작전을 설명하죠.”
***
“괜찮으세요?!”
“전 괜찮은데…….”
물 위에 머리만 둥둥 떠 있는 우리 모습은 썩 우스꽝스러웠다.
유한성이 만든 공간은 제법 넓었지만, 이 정도 공간이라면 설소은의 능력으로 충분히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문틈 사이로 조금씩 물이 빠져나가긴 했으나, 채워지는 속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슬슬 준비하세요.”
공간을 가득 채운 물 때문에 더 이상 고개를 내밀고 숨을 쉴 수도 없어서 잠수해야 한다.
“후우웁!”
이민하를 선두로 다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물속에 들어갔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수압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사람의 힘으로 문을 열려고 했을 때다.
다들 문 근처로 헤엄쳐서 다가왔고, 송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고리를 꽉 움켜쥐고 있는 힘껏 당기는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물이 단숨에 밖으로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살… 살려…….”
문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토해 내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헌터들은 속수무책으로 물살에 떠내려갔다.
앞을 지키고 있던 포위망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고, 물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다들 괜찮으세요?!”
“허억… 허억… 괜찮은 것 같아?”
이민하가 숨을 헐떡이며 미역이 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화부터 내시는 걸 보니까 괜찮으신 것 같네요.”
송인혁도 어느새 우리 뒤에 따라와 있었다.
그의 어깨엔 정신을 잃은 채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저도 능력을 많이 써서 힘든 것 외엔 괜찮아요. 물이랑은 친하니까요.”
설소은까지 온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헌터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키에에엑!”
그때 우리 앞에서 튀어나온 스킬라가 몸에 붙어 있는 뱀이 이빨을 드러냈다.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려는 거죠?”
스킬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좋은 전략이었지만, 스킬라는 원래 물에서 사는 몬스터거든요.”
“…하여간 짜증 나는 녀석이네.”
하은주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는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먼저 가세요. 금방 따라갈게요.”
“그건……!”
“지금은 이것뿐이에요. 아시잖아요.”
이민하는 더 이상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헌터들이 정신을 차리고 쫓아오기 시작하면 빠져나가기 힘들 거다.
차라리 혼자라면 어떻게든 나갈 수 있었다.
“바로 따라와. 명령이니까.”
“네.”
이민하에게 짧게 대답했고, 그녀는 다른 조원들과 함께 서둘러 이동했다.
채하나가 정신을 잃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있었다면 떼어 놓기 더 힘들었을 테니까.
“희생정신이 투철하시네요.”
다른 사람들이 멀어지는데도 하은주는 반응하지 않았다.
한 번 내게 당한 이후로 지금 몬스터를 움직였다간 혹시 내가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지.
“자, 그럼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 볼까, 하은주 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