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1층 수복 작전 (2)
“여기요.”
“아, 고마워요.”
채하나가 건네준 생수를 받았다.
던전 주변의 몬스터를 소탕하는 첫 번째 작전은 계획대로 마무리되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전투는 상당히 피곤했지만, 계획보다 빠르게 끝난 건 사실이다.
지금 풍경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았던 몬스터가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채하나 씨, 괜찮아요?”
뒤에 있던 이민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전 괜찮아요. 몬스터랑 직접 싸우지도 않는걸요.”
“특수계는 정신력 소모가 크잖아요. 하나 씨는 버프에다가 회복, 방어 계열 능력까지 같이 쓰니까 걱정돼서요.”
일반적인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회복이랑 방어 계열 능력은 애초에 채하나의 특기가 아니라 그 효과가 뛰어나진 않다.
솔직히 말하면 그 분야의 톱클래스인 이신예와 함께 싸워 봤기에 내 눈이 높아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프는 얘기가 다르다.
쓰는 즉시 정신력이 소모되는 회복과 방어 능력과 달리, 버프는 지속 시간 동안 계속 시전자의 정신력을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차윤지와의 전투에서 채하나가 짧게 여러 번 주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아직은 멀쩡해요! 무리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먹을 불끈 쥐며 웃는 채하나를 보고 이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왜 저는 걱정 안 해 줘요?”
“뭐? 너는 멀쩡하잖아! 원래 튼튼한 녀석이고.”
“차별이다, 차별!”
입술을 빼죽 내민 내 투정에 이민하가 귀를 막았다.
“그보다 역시 실감이 나지 않네요. 아포칼립스 이후로 다시는 던전을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채하나는 고개를 들어 높게 솟아 있는 던전을 올려다봤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처음 아포칼립스가 발동하고 주변 도시가 초토화되며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던전 1층 수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리는 게이트 공략조야. 우리랑 같이 움직이는 길드는 ‘백운’ 길드네.”
던전 내부로 들어가면 던전 자체를 공략하는 ‘던전 공략조’와 ‘게이트 공략조’로 나누어진다.
게이트를 공략하지 않으면 몬스터가 게이트에서 계속 나올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백운이라면… 설소은 씨가 있는 길드네요.”
“설소은? 그건 누구예요?”
갑자기 목소리가 가라앉으며 매섭게 나를 쏘아보는 채하나에 애써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내가 왜 눈을 피해야 하는 거지.
“그… 전에 헌터 선발 시험 때 같은 시험관이었던 분이에요.”
“흐응…….”
알 수 없는 침묵과 함께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자, 슬슬 다시 움직이자.”
이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 뒀던 장비를 착용했다.
원래 같은 길드끼리 게이트 공략을 들어가기로 했지만, 우리처럼 인원이 적은 길드들은 어쩔 수 없이 합쳐서 조를 만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백운 길드 길드장인 ‘송인혁’입니다. 반가워요.”
부드러운 인상의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와 채하나, 그리고 이민하를 향해 한 번씩 인사를 건넸다.
“하하, 많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려요.”
짧은 머리에 체격이 작은 그는, 어쩐지 따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송인혁에 대해선 조금 알고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가 다루는 무기는 사슬이었다.
평범하진 않은 무기였기에 기억에 남아 있다.
“어?”
“……?”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설소은을 보고 나 역시 흠칫 놀랐다.
“설소은 씨?!”
“…최현 씨가 왜 여기 계시죠?”
“그야 저도 이번 작전에 참여했으니까요.”
설소은은 어쩐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서 반가웠다.
평소에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인 그녀는 여전히 대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외부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을 때 설소은은 의지할 수 있었다.
“…….”
“왜요?”
“…….”
옆에서 매섭게 나를 노려보는 이민하와 채하나의 눈빛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희 같은 편이거든요? 그런 눈은 몬스터한테나 해 주세요.”
불안하긴 하지만, 우리 다섯이 같은 조로 게이트 공략에 들어가기로 했다.
던전을 몬스터들에게 빼앗긴 이후, 처음으로 다시 던전 공략의 시작인 것이다.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던전 공략조는 선봉으로 들어가서 던전 내부에 있는 몬스터들을 처리합니다. 게이트의 수가 많기에 아마 1층에 있는 게이트를 모두 공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던전 입구 쪽에 서 있는 백진철은 전체적인 작전의 형태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게이트 공략조가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도록 던전 공략조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게이트 공략조의 안전을 확보해야 합니다. 저희의 목표는 1층의 완전 공략입니다. 던전 주변을 정리하는 것과 비교하면 쉽지 않을 겁니다.”
은빛의 갑옷을 두르고 있는 백진철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스르릉!
그의 검에 햇빛이 닿아 번쩍였다.
“그렇기에 제가 최전선에서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백진철은 바로 돌아서서 던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어가던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마지막엔 돌격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런 백진철의 옆에 수많은 헌터가 따라붙었다.
“던전을 되찾자!”
“와아아!”
백진철은 스스로 실리주의자라고 말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렇기에 방금 그가 했던 말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분을 투자해서 헌터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니까.
“저희도 서두르죠.”
우리 조의 지휘는 송인혁이 맡기로 했다.
이민하가 해도 되지만, 그녀는 백운의 길드장인 송인혁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던전 안으로 들어오자 익숙한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죠!”
“네!”
카앙! 캉!
쿠구구궁!
시끄러운 굉음이 쉬지 않고 귀를 찔러 댔고, 조금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 정신까지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먼저 들어온 던전 공략조가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그들 사이를 뚫고 게이트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먼저 다른 조가 들어간 게이트 앞에는 붉은색 깃발이 세워져 있었기에 겹쳐서 들어가는 경우를 막았다.
“여기로 들어가죠!”
구석진 곳에 있는 게이트는 푸른색으로 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붉은 깃발을 꺼내서 게이트 앞에 세워 두었다.
“…?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뇨! 듣기만 한 능력이라 실제로 보니 신기하다 싶어서요.”
송인혁은 내가 인벤토리에서 깃발을 꺼내는 걸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되네요. 최현 씨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조금 부담스러운데…….”
“하하하, 약간의 부담은 긴장을 풀기에 좋죠. 자,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해 보죠.”
그렇게 말한 송인혁의 눈빛이 단숨에 예리하게 변했다.
***
“수고하셨어요!”
“이걸로 3개째.”
게이트 공략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 멤버로 게이트 공략에 애를 먹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나와 설소은, 그리고 송인혁은 S급 헌터였고, 이민하와 채하나도 S급 못지않은 A급 헌터다.
게이트의 난이도가 들쑥날쑥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한 게이트가 아니면 다 공략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일단 조금 쉬도록 하죠. 저는 잠시 지휘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송인혁은 흔히 말하는 만능이었다.
통신계 헌터이자, 전위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와 몇 번 전투를 함께하다 보니 그의 지휘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주변의 지형지물, 그리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그에 맞는 작전을 지시한다.
“길드장님이 엄청나시네요.”
“…그런가요?”
설소은은 내 말에도 평소처럼 반쯤 풀린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신계 능력이 없으셨어도 S급엔 충분히 올라오셨을 것 같은 실력인걸요.”
사슬을 무기로 쓰는 헌터는 처음 봤기에 그에 대해 기대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내 기대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줬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쇠사슬은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익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보다 최현 씨는 정말 놀랍네요.”
“네?”
어느새 보고를 마쳤는지 우리 쪽으로 다가온 송인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실력이 좋은 헌터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아르티아를 혼자서 쓰러뜨렸다는 게 사실인가 보네요.”
“아뇨, 그건…….”
“하하하하! 그렇죠?”
중간에 끼어든 채하나의 어깨가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이게 우리 최현 씨의 실력이란 말이죠. C급에서 한 번에 S급이 될 정도로 엄청난 분이거든요!”
“흐하하, 그렇네요.”
어쩐지 채하나 때문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
처음엔 자기도 C급이라고 나 무시했었으면서.
“사실 하루 만에 3개의 게이트를 공략한 건 고무적입니다. 원래 계획은 오늘 2개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송인혁의 말대로 우리가 강행군으로 움직인 건 사실이다.
이틀 전부터 던전 외부의 몬스터를 처리하고 바로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하루 만에 게이트를 3개나 공략했으니 슬슬 피로가 쌓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떨까요?”
나는 체력을 안배해 가며 전투를 해 왔기에 큰 무리는 없었지만, 설소은과 채하나는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특히 설소은은 채하나와 달리 정신력의 총량이 적었고, 오래 전투하는 게 불가능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버텨 준 게 고마울 지경이지.
“그게 좋겠네요. 던전 입구 쪽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고 하니, 그쪽으로 가도록 하죠.”
우린 게이트를 공략하며 점점 던전 안쪽으로 들어왔기에 입구랑은 거리가 있었다.
던전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피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계속해서 들리는 굉음에 귀가 따가웠다.
“신월 길드네요.”
“……!”
던전 공략조로 빠진 신월은 이번 작전에서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마치 앞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처럼 몬스터들을 유린하고 날뛰는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쌔엥-!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몬스터를 베어낸 차윤지가 얼굴의 피를 닦다가 나를 발견했다.
“…….”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기에 날 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차윤지의 모습에 옆에 있던 이신예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최현! 살아 있었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이신예를 보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최현 씨는 신월 길드랑도 인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이건 정말 놀랐네요.”
감탄한 송인혁이 나와 이신예를 번갈아 바라봤다.
“하하, 그냥 조금 아는 사이입니다.”
좋은 사람들이라는 건 알지만, 내겐 묘한 거리감이 남아 있다.
멀찌감치에서 신월 길드의 활약을 잠시 구경하다 베이스캠프로 걸음을 돌렸다.
어쨌든 같은 편일 때는 누구보다 든든한 사람들인 건 사실이지.
톡톡.
“……?!”
뒤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감각에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엔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쓴 키 작은 남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단검이 내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현 씨. 저는 ‘레인’ 길드의 길드 마스터입니다.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