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S급 헌터 최현 (3)
“드시죠.”
“…….”
이재문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외진 곳에 있는 낡은 찻집.
누가 봐도 오래된 것 같은 이곳은 할머니 한 분이 운영하시는 곳 같았다.
“제가 이런 곳으로 모셔 와서 당황하셨나요?”
“세련된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하, 맞는 말입니다. 저는 세련되고 깔끔한 걸 좋아하죠. 하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즐긴답니다.”
이재문이라는 사람은 도통 알 수가 없다.
가끔은 정신 나간 미친 사람 같고, 가끔은 1위 길드의 마스터라는 지위답게 카리스마를 보여 주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내겐 크게 상관없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그러도록 하죠. 월하백화식에 대해 말씀드리죠.”
그에게 제시했던 거래 내용은 월하백화식의 완성을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와 거래를 하는 건 탐탁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월하백화식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나요?”
“결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이걸 받으시죠.”
이재문은 가방에서 꺼낸 책 한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오래된 낡은 공책은 상당히 두꺼웠다.
그리고 공책을 펼쳐 보자 내게 익숙한 자세들이 그려져 있었다.
“한때 월하백화식을 연구하며 직접 만든 책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곳엔 월하백화식의 모든 걸 훔쳐 놨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어째서 당신은 월하백화식을 완성하지 못한 거죠?”
그가 월하백화식을 익히지 못한 건 월하백화식이 단순해 보임에도 정교한 검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옆에서 훔쳐보는 것만으로는 훔칠 수 없는 수준의 정교함.
하지만 그의 공책에 있는 그림과 주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월하백화식에 집착을 가졌는지 느껴졌다.
“자만이었죠.”
“자만이요?”
차를 마신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하백화식은 짜임새 있는 검술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보이는 게 전부라면 그렇게 칭송받을 검술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 말엔 동감이다.
처음 월하백화식을 봤을 땐 몰랐지만, 직접 검술을 익히기 시작하며 이 검술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월하백화식을 얕보지 않았기에 저는 심화한 부분만 탐냈죠. 기본적인 자세에 심화를 더하면 월하백화식이 완성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허리에 있는 화도를 흘겨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죠. 월하백화식의 핵심은 기본이었습니다. 기초적인 자세가 조금만 엇나가도 절대 그 힘을 제대로 끌어낼 수가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재문은 월하백화식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월하백화식을 이루고 있는 기본자세들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하면 전혀 다른 검술이 되어 버린다.
나는 스승님께 직접 월하백화식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기본자세에 대해 꾸준히 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기본자세는 확실히 익혔다.
반대로 이 공책엔 내가 얻지 못한 부분들이 담겨 있었다.
“사실 최현 씨의 검술은 이미 8할 이상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완벽하게 익히면 지금보다 정교해지겠죠.”
월하백화식은 각 형을 연결하는 검술이다.
이 공책엔 그 검술들을 어떻게 연결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었다.
“이후는 최현 씨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시나요?”
“…전에 만났을 땐 왜 이런 공책이 있다는 걸 말해 주지 않으셨죠?”
그를 살짝 노려보며 물었다.
“하하, 아직 그 공책이 남아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괜히 헛된 희망을 드렸다가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재문은 내가 원하는 답을 꺼내 주었고, 나는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으니까.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마 이른 시일에 다시 뵐 수 있겠죠.”
찻잔을 비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나 역시 일어났고, 그는 나를 보고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최현 씨가 완성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완성이요?”
“당신은 아직 전혀 완성되지 않은 원석입니다. 제가 보석으로 가공하는 것도 재밌지만, 보석이 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휙 돌아서 가게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미친 게 틀림없다고.
“이번 작전엔 최현 씨도 참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이재문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째서죠?”
“아직 공식적으론 공개되지 않은 정보지만, 특별히 제가 아끼는 최현 씨에게만 말씀드리도록 하죠.”
고개를 돌려 씨익 웃음을 머금은 그는 한껏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나를 약 올리는 것처럼.
“앙그라마이뉴 길드 마스터인 ‘유한성’의 초월 능력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뭐… 뭐라고요?!”
“조만간 그들은 최현 씨에게 접근해 올 겁니다. 유한성을 무너뜨리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저는 이만…….”
이재문은 낡은 찻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
“그래서? 노란 코런덤이랑 아르스드 촉매제는 구하지 못했다는 거네?”
“하하… 그대로 휘말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급한 건 아니니까.”
신아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단 재료 없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둘게.”
“감사합니다.”
그녀에겐 발렌의 의족 제작을 부탁지만, 재료를 구하다가 앙그라마이뉴 사건에 휩쓸렸다.
“다른 장비는 정비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신아람은 내가 맡긴 화도와 에렌 셀, 그리고 방어구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흐으음… 글쎄. 양이 많기도 하고, 너도 알겠지만 지금 상태가 안 좋아. 안 좋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정도랄까.”
“…죄송합니다.”
“아냐! 너한테 뭐라고 한 건 아니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
안형석이 무기를 만들어 주기 전까진 화도와 에렌 셀로 전투를 이어 갔고, 덕분에 장비 내구도는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용케 망가지지 않고 버텼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내가 아는 대장장이 중에선 신아람이 가장 뛰어났기에 그녀에게 맡기기로 했다.
“미안해, 발렌.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리겠어.”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고. 나 때문에 형씨가 고생하는 걸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래도 언젠가 다시 발렌과 함께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게 발렌만큼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는 없으니까.
“아, 오랜만에 우리 길드도 회의할 생각이야. 너도 따라와.”
“회의요?”
“그래. 모든 길드원이 작전에 투입되는 건 아니니까.”
신아람이 말하는 작전이라는 건 앙그라마이뉴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되는 것이다.
그녀를 따라서 길드 아지트 중심에 있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당연하겠지만, 협회의 회의실과 비교하면 너무나 조촐한 모습이었다.
“그거 맛있어? 나도 줘.”
“안 돼요! 어렵게 구한 거라고요.”
“거… 과자 가지고 쩨쩨하게 굴래?!”
“…….”
커다란 테이블을 두고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어째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다른 길드원이 모두 모여 있었고, 채하나가 나를 발견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여기로 오세요.”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바로 신아람이 모두를 주목시켰다.
“자, 모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각 길드에 따라 전체 전력의 어느 정도를 작전에 투입해야 하는 게 의무야. 그래서 우리 길드도 인원을 뽑아야 해.”
신아람은 협회에서 받아 온 종이에 적힌 걸 쭉 훑어보며 말했다.
“뭐, 지원하는 사람은 그만한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성과에 따라선 승급도 가능하니까 나쁘지 않은 조건이야.”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우리 길드의 통신계와 치유계를 모두 담당하고 있는 유미래가 물었다.
“내가 가야지. 너희를 억지로 보낼 생각은 없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길드는 애초에 인원이 적어서 의무적으로 포함된 전력도 적거든.”
“저는 참가하겠습니다.”
내가 손을 살짝 들고 말했다.
이번 작전에 꼭 참여할 이유는 없지만, 이재문이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만약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초월 능력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도 제작 재료를 얻기 위해서 5층에 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최현 씨가 가면 저도 갈래요!”
옆에서 팔짱을 끼는 채하나를 보고 이민하가 인상을 팍 구겼다.
“하나 씨도?! 진심이야?!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괜찮아요! 최현 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걸요.”
아까보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 이민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참가할래.”
이민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언제까지 A급으로 있을 순 없으니까.”
그녀는 내가 S급이 된 걸 신경 쓰는 듯 보였다.
“뭐야, 현이가 S급 돼서 자존심 상한 거야?”
바로 정곡을 찌르는 거냐?!
신아람이 음흉하게 웃으며 묻자, 이민하가 발끈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거든! A급으로 제법 오래 있었으니까 이제 더 올라가고 싶은 것뿐이야!”
“알았어, 알았어. 귀청 떨어지겠네.”
신아람은 들고 있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다시 우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우리 길드는 현이, 하나, 민하 셋이 참가하는 걸로 할게.”
“네!”
“알겠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장수주가 나를 불렀다.
“최현 씨!”
허겁지겁 달려온 그녀는 아지트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현 씨를 찾아오신 분이 계세요.”
그녀의 말에 서둘러 밖으로 향했고, 그곳엔 김정태가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빙긋 미소를 짓는 김정태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귀여운 후배이자, 우리 가게 VIP 손님 만나러 왔지.”
그는 뒤쪽에 있는 커다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부탁한 재료 대부분은 구했어. 최근엔 앙그라마이뉴가 그렇게 돼서 다시 헌터 시장에 물건이 들어오고 있거든. 다 구하진 못했지만, 나머지도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야.”
“감사해요. 정말 덕분에 살았어요.”
“뭘,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내가 고맙지. 그보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김정태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부탁이요?”
“진천우 그 양반 잘 좀 부탁한다고.”
그는 민망한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알잖아. 매일 무리하고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거. 이번 작전에도 참가한다고 하시는데 걱정이 돼서 말이지. 내가 부탁할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다.”
“알겠어요. 저만 믿으세요.”
김정태에게 진천우라는 사람이 갖는 의미는 남달랐다.
옆에서 그걸 봐 왔기에 그가 하는 말들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김정태가 아니었다면 저 많은 재료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나는 같이 싸울 수 없으니까. 원수 같은 인간이지만, 그래도 오래 살았으면 좋겠거든.”
멋쩍게 웃는 그를 보고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동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