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S급 헌터 최현 (2)
“이제 좀 실감이 나시나요?”
갈색빛의 더벅머리인 백진철은 자신의 머리 색과 같은 갈색 양복을 입고 내게 물었다.
그가 준 S급 헌터증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진 않았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저는 C급 헌터였는데…….”
한 번에 3단 승급을 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최현 씨가 C급이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군요. 최현 씨의 공적이나 실력만 놓고 봐도 S급 헌터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백진철은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내게 다가왔다.
헌터 협회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윤서훈의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오직 실용성을 위한 사무실인 듯 까만색의 가구만 몇 개 배치되어 있었고, 그 외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전 협회장은 그런 사람이었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니 융통성이 없는 일 처리를 보여 줄 수밖에요.”
“…이런 말을 하셔도 되는 건가요?”
“흐하하하!”
내 질문에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어차피 헌터 등급이라는 건 협회에서 멋대로 정한 기준일 뿐입니다. 이미 S급의 실력을 갖춘 헌터에게 C급 헌터증을 쥐여 주는 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죠.”
백진철은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자, 그럼 따라오시죠. 이제 최현 씨도 저와 함께 갈 수 있는 자격이 생겼으니까요.”
“네? 어딜……?”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백진철은 방에서 빠져나가 길게 뻗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의 뒤를 따라 이동했고, 백진철은 도착한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
순간 넓은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백진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가식적인 웃음을 유지한 채 회의실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자, 편한 곳에 앉으시죠. 저희에겐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자 소리가 회의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따가운 나는 황급히 가까운 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곳에 모인 이유에 대해선 다들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듣진 못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충 어떤 이유인지는 예상 가능했다.
앙그라마이뉴 때문이겠지.
회의실에 앉아 있는 헌터 대부분이 길드 간부거나 협회 수뇌부였다.
혹은, S급 이상의 헌터라던지.
그제야 내게 자격이 생겼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아쉽게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는 최대한 빨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뭐, 그렇게 복잡한 문제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건 화이트 소드의 길드 마스터 ‘이재문’이었다.
“시간을 주면 앙그라마이뉴는 다시 세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처리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겁니다.”
타악!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친 하루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앙그라마이뉴가 있는 곳은 5층이에요. 5층까지 돌파하는 게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면 저희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고생을 했을까요?”
그녀의 말이 핵심이었다.
앙그라마이뉴는 던전이라는 천연 요새 안에 자리를 잡고 꾸준히 세력을 키우는 게 가능하다.
“애초에 그들이 모았던 몬스터는 저희가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력으로 던전 내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블랙 유니콘의 길드 마스터 오민선이다.
검은색 곱슬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장내를 훑었다.
“만약 그들이 이미 다 죽은 상황이라면 저희의 돌파는 헛된 희생을 만들지도 모릅니다.”
“…….”
이내 정적이 흘렀고, 가만히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백진철이 내게 미소를 던지며 입을 열었다.
“최현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
다시 이목이 쏠렸고 속으로 백진철을 원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왜죠? 아시다시피 던전 한 개 층을 공략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아무리 2위 길드라고 하지만, 길드 하나의 전력으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민선이 발끈하며 말했고, 나는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뒤에 다시 말했다.
“다른 층이라면 그렇겠지만, 5층은 상황이 다릅니다. 5층은 섬 형태의 지형이라 다른 층에 비해 면적 자체가 좁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을 때도 이미 5층의 몬스터는 대부분 정리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가만히 내 얘기에 집중하고 있었고, 백진철은 나를 보채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5층에 있는 많은 게이트는 공략하지 못했겠지만,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만 세뇌하며 전력을 키운다면 그것도 시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이재문이 일어나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넓은 회의실에 그의 박수 소리만이 울려 퍼졌고, 다들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훌륭한 분석입니다. 그의 말대로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서둘러 전력을 모아 5층까지 돌파하는 것이죠.”
물론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동감이다.
과거와 다르게 낮은 층이라고 약한 몬스터만 나오는 게 아니다.
여러 라벨의 몬스터가 섞여서 나오기에 최상층 공략에 비해선 어렵지 않겠지만, 높은 라벨의 몬스터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위험 요소가 있다.
“현실적인 얘기로 넘어가죠. 화이트 소드의 전력은 어느 정도죠.”
팔짱을 낀 채로 불편하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신아람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선 저희 전력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죠.”
“나도 동감이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잖아.”
옆에 있던 진천우가 말을 보탰다.
“당신 길드로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같은 편으로 싸우려면 가지고 있는 패는 다 까야지.”
진천우 특유의 매서운 눈빛이 이재문에게 향했다.
이재문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말도 맞군요.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협력하시겠다면 저 역시 숨기지 않죠. 저희 길드 멤버 전원의 프로필과 전력, 그리고 가지고 있는 물자를 모두 공개하도록 하죠.”
“……!”
그의 말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이 들은 것이 정말 사실인지 의심할 뿐이었다.
“왜들 그렇게 놀란 눈치죠? 이걸 원하시던 거 아니었나요?”
꿀꺽.
누군가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역시 이재문은 보통 사람이 아니군.
지금 상황은 그에게 그다지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던전 주변의 몬스터가 거의 정리되었고 이대로 다시 던전 공략에 들어가면 화이트 소드는 그가 원하는 대로 명예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끼어든 앙그라마이뉴가 재를 뿌리려고 하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전력을 공개하는 것도 썩 반갑진 않겠지만, 이재문은 지금 조급한 거겠지.
“그럼 화이트 소드는 이 회의가 끝나면 협회로 전력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이죠. 저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번 대응팀에 합류하는 길드는 다들 전력을 공개하시는 거겠죠?”
이재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짜로 주진 않겠다는 거군.
“하하, 왜 다들 말씀이 없으시죠? 같은 편으로 싸우려면 패는 까야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전력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거 아니었습니까? 설마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건 아니죠?”
날카로운 살기가 장내에 퍼져 나감과 동시에 백진철이 손을 살짝 들며 마이크로 입을 옮겼다.
“이재문 씨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길드 역시 전력을 협회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 길드처럼 초소형 길드는 크게 상관없지만, 화이트 소드를 견제하는 신월 같은 길드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반갑진 않을 것이다.
“전체 전력을 정리하고 나서 던전 공략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회의는 여기까지로 하고…….”
백진철은 슬그머니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가만히 좀 두면 어디가 덧나냐.
“잠시 일어나 주시죠, 최현 씨.”
“네? 네.”
백진철은 아까와는 달리 미소를 지우고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최현 씨를 S급 헌터로 승급시켰습니다.”
“……!”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나와 백진철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내가 S급 헌터라는 걸 납득하는 걸 떠나서 C급 헌터가 한 번에 S급 헌터가 되는 건 누구나 놀랄 만한 일이었다.
“최현 씨를 아시는 분이라면 그가 S급 헌터가 된다는 것에 이의를 가지는 분은 없을 겁니다. 실력이나 경험, 그리고 공적까지 S급이 되기 충분하죠.”
백진철은 다른 사람들을 쭉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고리타분한 게 싫습니다. 틀에 얽매이고, 그로 인해 쓸모없는 소모가 생기는 게 싫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지금까지 만들어져 있던 형식을 버릴 겁니다.”
결국, 이건 거래였던 건가.
백진철은 나라는 상징을 만들어서 자신이라는 사람을 피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S급 헌터라는 지위를 얻으면서 동시에 율이가 앞으로도 약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저 인간이랑 얽히면 머리가 아파지겠군.
“헌터 협회라는 곳이 얼마나 중요한 기관인지 알고 있기에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내게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니까 이번 거래엔 흔쾌히 응해 주기로 했다.
짝짝짝!
내 박수 소리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나를 따라 호응했다.
짝짝짝!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백진철이 말했다.
“이것으로 회의는 마칩니다. 조만간 다시 소집할 때까지 대기해 주십시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내게 다가온 신아람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 저런 뒷배를 얻은 거야?”
“뒷배라뇨….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그보다 재료 구해 오라니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녀는 살짝 화난 표정으로 내 볼을 꼬집었다.
“으아아! 으쯜스 읍으드그으!”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어?! 너 바보야?”
볼은 놓은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왜 자꾸 스스로 위험한 곳에 몸을 던지는데? 하나가 돌아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남 걱정시키는 것도 민폐야.”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 나중에 또 그럴 거면서.”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선 반박할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는 나를 보고 신아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목숨 걸고 나서지 않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야. 다 짊어지려고 하는 것도 자만이라니까.”
대화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고, 듬직한 체격의 이재문이 서 있었다.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하군요.”
“알면 끼지 마시죠.”
“하하, 중요한 얘기라서요.”
이재문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는 신아람을 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재문은 신아람의 어깨너머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전에 했던 얘기를 이어 가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