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1 vs 길드 (2)
날카로운 검이 훑고 지나가자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
스킬라.
물이 있는 곳에서 자주 보이는 몬스터로, 블루 라벨이다.
비늘로 덮여 있는 여자 같은 상체와 주변에 6개의 뱀의 머리가 자라 있었다.
그리고 거미 같은 다리가 12개나 되는 기괴한 몬스터다.
내 검에 뱀의 머리 중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져서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흥미롭네요. 자신의 신체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키에엑!”
스킬라의 뱀 머리들이 송곳니를 드러냈고,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역시 몬스터들이 거슬려.
차라리 헌터들만 있으면 신경 쓰지 않고 싸울 수 있을 텐데,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쉽게 움직일 수 없다.
“처음엔 혼자서 아르티아를 쓰러뜨렸다는 걸 믿지 못했어요. 아르티아는 이미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최현 씨의 움직임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네요.”
그녀를 중심으로 스킬라 세 마리가 더 모여들었다.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손을 써 둔 건가.
“어떤가요? 저희 쪽에 서시는 건?”
“……!”
그녀의 말에 놀란 건 나뿐이 아니었다.
뒤에 있는 붉은 로브를 쓰고 있는 다른 헌터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닥치세요.”
“…….”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가 단번에 제지당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살기가 사방을 적셨다.
“모든 건 제가 결정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살기를 거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최현 씨가 아군이라면 누구보다 든든할 거예요. 저희와 목적을 함께하는 겁니다.”
“…내가 그쪽에 설 것 같아?”
“물론 당장은 생각을 바꾸기 힘드시겠죠. 처음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가 계획한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신다면 달라질 거예요.”
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다.
정말 나를 아군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세상은 변할 겁니다. 제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거죠.”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인간은 몬스터와 달라.”
“알고 있어요. 저는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죠. 총을 맞고, 칼에 찔리면 죽는 인간. 하지만 던전 안이라면 누구도 저에게 다가올 수 없어요.”
로브 안쪽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획이 성공하면 던전은 저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끝없이 병사를 만들어 내고, 밖에선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자원이 가득하죠. 아포칼립스를 보고 느꼈어요. 인간이 몬스터를 상대로 얼마나 무력한지, 몬스터라는 존재보다 강한 무기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 몬스터를 이용해서 다른 헌터들을 죽이고 던전을 점령하겠다는 거야?”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멋지지 않나요? 새로운 세상의 왕이 되는 거죠. 그리고 최현 씨도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자격이 있어요.”
그녀는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완전히 미쳐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정말 몬스터 군대를 만들어서 움직인다면 현재 상황에선 대처할 방법이 없다.
그 후에 던전까지 점령당하면 지금보다 던전을 공략하기 훨씬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본능으로만 움직이던 몬스터들이 이젠 이성을 갖게 되는 거다.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다.
“아쉽게도 나랑은 정반대에 있는 얘기라서 말이지. 나는 던전을 완전 공략할 거거든.”
“…최현 씨도 저 못지않게 몽상가셨군요.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 던전을 공략하겠다는 건가요?”
“기왕이면 꿈은 거창한 게 좋잖아.”
잠깐이었지만, 그녀와 대화를 하고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막지 않으면 정말 이 사람이 하는 말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었다.
블루 라벨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부터 이미 그녀의 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다.
초월 능력은 다른 능력과 근본부터 다르다.
통신계 치유계 마력계 능력은 자신의 정신력을 소모한다.
즉, 능력의 한계가 명확하다.
하지만 초월 능력은 능력을 사용할 때 소모되는 것이 없다.
내 스킬은 라이프를 소모하지만, 애초에 그 라이프도 초월 능력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정작 내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쉽네요. 이런 인재를 여기서 죽여야 한다는 게.”
“그런 이유라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휙 돌아서 다른 헌터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지금은 이쪽을 먼저 노리는 게 정답이다.
몬스터를 상대하며 시간을 소모하고 있을 수 없다.
아래에서 놈들의 길드원이 더 올라오면 상황은 악화된다.
그 전에 여기 있는 녀석들이라도 처리하는 수밖에.
“이 자식… 우리도 A급 헌터라고!”
“죽여!”
사방에서 달려든 헌터들이 동시에 검을 내리쳤다.
카앙-!
“……!”
“무슨…!”
화도 하나로 그들의 공격을 모두 받아 냈고, 로브가 벗겨진 몇몇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제부터 진심으로 간다.”
***
다른 헌터들은 전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실력은 압도적으로 내가 우위에 있었지만, 수의 힘을 무시할 순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나를 쓰러뜨리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내 스킬에 시간제한이 있다는 걸 알고 최대한 버틸 뿐이었다.
“후우… 후우…….”
“형씨 괜찮아?”
“난 괜찮은데, 상황은 그렇지 않네.”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쓰고도 겨우 4명밖에 처리하지 못했다.
놈들은 체계적인 조직 전투가 숙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계속 몬스터가 끼어들어서 타이밍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4명이나 쓰러뜨리고 다른 놈들도 큰 부상을 입힌 내가 대견한걸.
“이대로 쭉 가면 돼.”
발렌의 말을 따라 이동하자 나를 발견한 채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최현 씨! 괜찮아요?”
“죄송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최악이었어요.”
“말하지 마요! 얼른 누우세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를 바닥에 눕혔다.
헌터들과 싸우고 있던 도중 스킬라의 뱀 머리 중 하나가 내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덕분에 옆구리부터 아래쪽까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채하나는 급히 치유 능력을 써서 부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주 능력이 버프지만, 기본은 치유계 헌터니까.
그녀에게 치료를 받으며 상황에 대해 알려 주었고, 내 말을 듣고 있는 채하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다른 앙그라마이뉴 길드원들이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고, 나를 놓친 놈들은 분명 숲을 뒤지기 시작했을 거다.
“결국, 우리는 독 안에 든 쥐라는 거군요.”
“채하나 씨, 던전에 들어오면 제 말 듣기로 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녀는 벌써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리한 걸 시키진 않을 거예요. 절 믿어 주세요.”
“믿어요! 믿으니까 걱정하는 거예요. 위험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잖아요.”
울먹거리는 채하나의 표정을 보니 큰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치유 능력 덕분에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채하나 씨도 지금 무리하고 계시잖아요. 치유 능력을 이렇게 쓰다니…….”
“전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계속 치유 능력을 쓰는 채하나를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강한 치유 능력일수록, 빠르게 치료를 진행할수록 정신력의 소모가 크다.
심지어 그녀는 치유 능력에 특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채하나 씨만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채하나 씨에게 부탁할게요.”
“최현 씨 부탁이라면 뭐든 할게요.”
“던전에서 나가는 거예요. 앙그라마이뉴는 전력으론 화이트 소드에 뒤처지지만, 길드원 수는 오히려 더 많아요. 놈들이 작정하고 저를 처리할 생각이라면 저는 던전에서 나가기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럼…….”
부상이 거의 다 아문 걸 보고 상체를 일으켰다.
“채하나 씨가 먼저 밖으로 나가서 이 상황을 길드와 협회에 알리셔야 해요.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더라도 조사만 들어가면 충분히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럼 최현 씨를 두고 가라는 건가요? 그리고 아래에 앙그라마이뉴 길드원들이 지키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살점이 뜯겨 나갔던 곳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고 손으로 쓱쓱 피를 닦아 냈다.
“그건 제게 맡기세요.”
우리는 발렌의 후각에 의지해 놈들을 피해서 숲 외곽으로 이동했다.
최대한 계단과 가까우면서, 으슥한 곳을 찾아 숨었다.
아무리 5층이 다른 층에 비해 좁은 지형이라고 해도, 전부 뒤지고 다니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찾으려면 결국 흩어져서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왔어, 형씨. 하나뿐이야.”
발렌의 말을 듣자마자 나무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파악!
뽑지 않은 화도로 아래를 지나가던 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일격에 기절한 그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고, 서둘러 놈이 입고 있는 붉은 로브를 벗겨 냈다.
“이걸 입고 있으면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다른 앙그라마이뉴 길드원까지 합류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섞여서 던전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채하나에게 붉은 로브를 건네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놈들은 애초에 채하나 씨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의심받진 않을 거예요.”
“최현 씨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제 쿨타임 때문에 스킬도 쓸 수 없다면서요. 아까보다 위험한 상황이 된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은 정론이었다.
스킬도 없고 인원이 늘어나면 도망 다니는 것도 여의치 않겠지.
“괜찮아요. 만약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되면 위층으로 올라갈 거예요. 쉽지 않겠지만, 10층까지 올라가면 던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요.”
“…….”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채하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채하나 씨의 힘이 필요해요. 협회와 길드의 지원을 받으면 바로 던전으로 인원을 투입할 거예요.”
채하나가 나를 믿어 주는 만큼, 나 역시 그녀를 믿는다.
애초에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주섬주섬 로브를 챙겨 입는 채하나를 보고 무거운 짐을 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저도 헌터예요. 매일 바보같이 울기만 하고 최현 씨에게 기대기만 하지만, 지금까지 던전에서 몬스터와 싸워 왔던 헌터라고요.”
내게 손을 펼친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몸에 빛이 깃들었다.
[System : 공격력 버프가 적용됩니다. 공격력이 19% 상승합니다. -25:04-]
방금 무리해서 치유 능력을 썼으면서 버프까지 쓰는 그녀는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
“…제가 실수했네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살짝 끄덕인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채하나의 모습은 생각보다 든든했다.
자, 그럼 나도 본격적으로 내 능력을 보여 줄 때다.
아까의 전투로 알게 된 게 있다면 놈들은 내 버프형 스킬은 알지만, 다른 스킬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이용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
아니, 혼자니까 싸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