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1 vs 길드 (1)
“…그러니까 이 오크가 최현 씨 친구라는 거예요?”
“오크가 아니라, 발렌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발렌이 채하나의 말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앞으로 그녀와 자주 함께한다면 언젠가 말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발렌의 의족을 만들기 위해 여기까지 아이템을 구하러 왔으니 그녀에게도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방금 몬스터를 조종하는 인간들을 봤는데, 갑자기 이런 타이밍에 몬스터 친구를 소개해 준다니요.”
“발렌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달라요.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그러니까 채하나 씨를 믿고 소개해 준 거예요.”
그녀는 자신을 믿는다는 말에 급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조… 좋아요. 그러니까 발렌이 몬스터 냄새를 맡아서 알려 준 덕분에 지금까지 피해서 이동할 수 있었다는 거죠?”
“그런 거죠.”
채하나는 발렌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녀의 반응이 정상적인 거겠지.
지금까지 서로 죽이겠다고 싸웠던 종족인데 갑자기 친하게 지낼 순 없는 거다.
그런 면에선 신아람이 이상한 사람인 건 확실하다.
“최현 씨는 정말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네요.”
“하긴, 나도 처음엔 인간은 다 형씨 같은 줄 알았지.”
채하나의 말에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발렌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둘이?”
“게임 캐릭터라는 초월 능력을 갖고 있어서 죽어도 부활하고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는 월하백화식의 계승자. 거기다 오크랑 친구인 사람이라고요. 누가 봐도 평범하지 않은걸요.”
“…….”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특이한 케이스인 건 사실이니까.
“아무튼, 발렌은 던전에서 나갈 때까지 다시 잘 부탁해.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거니까 열심히 하라고.”
“하여간 오크 되게 잘 부려먹네.”
툴툴거리는 발렌이 다시 시스템으로 들어갔다.
앙그라마이뉴 덕에 생각보다 주변에 몬스터의 수가 많지 않았다.
“5층으로 올라가죠.”
“점점 위험한 일들에 무뎌지기 시작했어요.”
“기쁜 소식이네요.”
“던전 10층에서 윈터 버드를 타고 내려오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까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채하나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투덜거리면서도 막상 잘 따라다니는 그녀가 대견했다.
그녀의 버프를 머릿속에 인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게 느껴진다.
5층은 다른 층과 달리 독특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넓은 섬과 같은 느낌의 환경이라 주변이 온통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5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우리를 반겼다.
“벌써 내려가고 싶어졌어요.”
“노란 코런덤이랑 아르스드 촉매제를 구해야 하네요.”
검붉은 결정과 달리, 다른 두 재료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즉, 5층을 제법 돌아다녀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추운 게 낫지, 더운 건 영 괴롭단 말이지.
“더위를 덜 느끼는 버프는 없나요?”
“있었으면 저한테 썼겠죠.”
채하나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5층은 특히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다.
해변이 존재하기에 물속에 사는 몬스터도 있다.
1~4층까진 해수가 없으니 그런 몬스터는 5층에 전부 모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발렌은 좋겠다. 거긴 안 덥지?”
“뭐야?! 그런 거예요?! 저도 시스템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위험한 소리 하지 마요!”
이내 발렌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왔으면 얌전히 아이템만 채집하고 돌아갔을 텐데, 채하나가 따라와 준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다.
던전은 층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5층은 반 이상이 바다라 다른 층에 비해 좁게 느껴진다.
“해안가 절벽 쪽으로 가 볼까요?”
“아무래도 안쪽에 있는 숲보단 광석이 있을 가능성이 크긴 하죠.”
찜통 같은 더위에 삶아지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도중, 발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씨, 인간의 냄새가 나. 바람 때문에 몰랐는데, 방향이 바뀌어서 눈치챘어.”
“설마… 아까 그 녀석들이야?”
“그런 것 같아. 한 사람이었으면 이 정도 거리의 냄새는 맡지 못했을 거야. 아직 저쪽은 우리 위치를 파악하진 못한 거 같아.”
발렌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에요?”
채하나는 나와 발렌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날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그 녀석들이 따라온 거 같아요. 일단 몸을 숨기죠.”
“네?! 던전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요?!”
놈들이 아직도 여기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정말 우리가 목적인 걸 수도 있고, 아직 조종할 몬스터를 찾아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내게 발각된 시점에서 던전을 빠져나가 상황을 정리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여기 있다는 건 역시 내 목숨을 노리는 건가.
해안가 절벽 쪽으로 이동하던 우리는 급히 방향을 바꿔 숲으로 향했다.
울창한 숲에 숨는 쪽이 놈들에게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이런 상황에선 안일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보다 최악을 가정하는 게 좋아요.”
“최악이요?”
“노골적으로 말하면 다른 목적이 아니라 저를 죽이러 따라왔다는 거죠.”
“하지만 저희가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있었잖아요. 어떻게 5층에 있는 걸 알고 올라온 거죠?”
채하나의 물음의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래에 다른 일행이 있는 거죠.”
“……!”
그거라면 말이 된다.
내가 놈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밖에 있던 다른 일행이 던전으로 들어왔다면 말이 된다.
결국, 다른 층으로 이동하기 위한 계단은 하나뿐이다.
통신계 헌터가 있다면 포위망을 좁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던전 자체가 나를 잡기 위한 커다란 함정이 되는 거다.
“제가 안일했어요. 처음부터 저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그럼 어떡하죠?”
“다시 한번 싸우는 수밖에 없죠. 그리고 죽을 겁니다.”
“…….”
채하나가 내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요. 다른 방법을 찾고 싶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전력으로 놈들과 싸우는 건 위험 부담이 커요.”
스킬을 모두 사용하고 채하나 버프까지 받는다면 나 역시 쉽게 지진 않을 거다.
어쩌면 놈들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만약 내 모든 패를 보여 주고 싸웠는데 진다면 내가 누군지 특정된다.
“아직은 놈들은 제가 누군지 몰라요.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여 주면 의심하지 않고 돌아갈 거예요. 계속 저렇게 나를 찾아다니다가 채하나 씨까지 발각되면 위험하니까요.”
“…알겠어요. 최현 씨 말을 잘 듣겠다는 조건으로 따라온 거니까 그렇게 할게요.”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몬스터를 조종하는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실력이 좋은 헌터들이다.
혼자서 덤비는 건 위험하다.
고양이 가면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울먹거리는 채하나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내가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당연하게 슬퍼하고 있다.
죽는 고통을 느끼는 것 자체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거다.
“놈들 위치를 찾아 줘.”
“정면에서 북동쪽.”
발렌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죽는 건 끔찍하게 싫다.
하지만 내가 한 번 죽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다면 목숨을 내줄 수밖에 없지.
***
“고양이맨, 등장.”
“……!”
가면을 쓰고 놈들 앞에 나타나자마자 그들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바쁘니까 본론만 말하도록 하죠. 지금부터 당신을 죽일 겁니다.”
키가 작은 몬스터 컨트롤 능력을 가진 여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귀찮은 절차를 생략하는 건 좋아하는 편이거든.”
검술이나 전투 방식은 몸의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세나 버릇 같은 것들이 전투 도중에 자기도 모르게 보이게 된다.
오래 싸우는 건 자칫 놈들에게 내 정체가 뭔지 들킬 가능성도…….
“이상한 가면은 치우셔도 돼요. 최현 씨.”
“……!”
그녀의 말에 당황해서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아까 착용하고 있던 새까만 갑옷은 아르티아의 것이죠?”
처음 놈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땐 블링크로 빠져나오기 위해 ‘칠흑의 묵갑’을 착용한 상태였다.
설마하니 칠흑의 묵갑을 알고 있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 못 했다.
“언젠가 제 능력이 성장하면 아르티아 같은 몬스터도 컨트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르티아에 대해서 많은 관찰과 연구가 진행됐죠. 덕분에 놈의 외관이나 특징은 지겹도록 봐야 했고요.”
“그래서 그 갑옷을 알아봤다는 건가.”
“최현 씨가 아르티아를 쓰러뜨렸다는 건 대외적으로 공개되진 않았지만, 알 사람은 아는 내용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가면을 벗었다.
“이름 최현, ‘플레이어’라는 초월 능력을 가지고 있죠? 월하백화식의 계승자. 죽어도 죽지 않는 인간.”
“내가 그렇게 유명인인지는 몰랐는데.”
“저희 길드를 너무 우습게 보셨네요. 나름 2위 길드인데 이 정도 정보력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젠장, 젠장.
내가 가정했던 최악보다 최악의 상황이다.
굳이 놈들이 나를 쫓아왔다는 건 이곳에서 완벽하게 나란 존재를 없애겠다는 뜻이다.
“자, 이제 다 들켰으니 마음껏 날뛰어 보시죠. 최현 씨의 라이프가 0이 될 때까지 죽여 드릴 테니까요.”
로브 안쪽에서 씨익 웃는 그녀의 입꼬리를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와 동시에 그녀 주변에 있던 다른 헌터들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카앙-!
검을 마주한 상태로 다른 헌터들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사방으로 퍼져서 포위망을 만들었다.
“말씀드렸죠? 저희는 심심풀이로 이번 일을 계획한 게 아니거든요.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어선 안 돼요. 완벽하게 계획을 설계해야만 합니다. 그 계획에 최현이라는 사람은 없고요.”
“후우…….”
천천히 심호흡하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금 이것저것 생각해 봐야 별수 없다.
최선의 방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너희는 내 목숨이 0이 될 때까지 죽이면 이기는 거고, 나는 그 전에 너희를 모두 제압하면 이기는 건가.”
“정답! 최현 씨의 능력은 파악하고 있거든요. 다른 길드원이 올라오고 있으니 최현 씨는 부활할 때마다 쉽게 죽일 수 있어요.”
5층은 넓지 않은 공간이었고, 곳곳에서 내가 부활하길 기다렸다가 바로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이다.
“저희만으로 힘들다면 몬스터를 쓰면 돼요. 최현 씨가 빠져나갈 곳은 없답니다.”
“빠져나가? 내가?”
카각!
검을 맞대고 있던 헌터를 밀쳐 내고 오히려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놈이 따라온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똑똑히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봐 둬. 사람 잘 못 건드렸어.”
파앗!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쓰고 단숨에 정면에 있는 여자를 향해 힘껏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