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앙그라마이뉴 (1)
“죄송해요. 신입 길드원 못 데려와서…….”
“괜찮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무사히 돌아온 게 어디야.”
빙긋 웃은 신아람은 내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리고 새내기 헌터는 아니지만, 든든한 신입 길드원이 들어왔거든.”
“네?”
신아람의 시선을 따라 내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 으에엑?!”
“그 반응 뭐예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채하나가 검지로 내 가슴을 쿡쿡 찔러 댔다.
매섭게 나를 쏘아보는 그녀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반가운 표정이 아니죠?”
“그… 그건 채하나 씨가 여기서 나올 거라곤…….”
“호오, 제가 나오면 안 되는 건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신아람이 킥킥대며 보고 있었다.
“선발 시험에서 아무도 못 데려왔지만, 다른 데서 따라온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아.”
물론 채하나가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길드에 들어오는 것보다 이미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 편하니까.
그리고 채하나의 버프 능력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다.
“저는 오직 최현 씨를 위한 버퍼예요!”
딱 달라붙는 채하나를 보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너무 가깝잖아!
“오, 매일 일만 하는 재미없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할 건 다 하고 다녔구나.”
“아니거든요!”
히죽거리는 신아람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보다, 채하나 씨 괜찮은 거예요?”
애써 말을 돌리며 채하나를 옆으로 떼어 냈다.
내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하나는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무섭긴 하지만, 최현 씨가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해 줄 거니까요.”
“그런 무책임한…….”
채하나는 반년이나 던전에 홀로 갇혀 있었다.
그 트라우마로 인해 다시 던전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 길드로 들어올 줄이야…….
“최현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10층에서 갇혀 있거나, 죽었을지도 몰라요. 최현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또 나를 보고 눈부실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그녀였다.
채하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최현 씨는 제 은인이에요!”
“…신아람 씨? 이분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럼! 괜찮고말고! 앞으로 잘 챙겨 주라고.”
그렇게 말한 신아람은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 봉투를 채하나에게 건네주었다.
“협회에 가서 정식으로 길드원 가입서 제출하고 와.”
“네! 다녀올게요!”
어쩐지 전에 봤을 때보다 활기찬 그녀가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원래 저런 성격이군.
하긴, 던전에 반년이나 갇혀 있으면 밝은 성격인 게 이상하지.
“자, 그럼 우리도 우리 일을 시작해 볼까.”
“우리 일이요?”
“뭐야, 나한테 의뢰한 거 까먹었어? 어쨌든 헌터 선발 시험에 가 줬으니까 나도 부탁을 들어줘야지.”
그제야 신아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펫 스테이터스창을 열어 발렌을 바로 앞에 소환했다.
신아람은 발렌이 나오자마자 다리가 불편한 발렌 앞에 의자를 가져다줬다.
“정밀 측정이야. 체중을 견뎌야 하니까 이것저것 측정해야 하거든. 특히 다리는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곳이라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안 돼. 심지어 전투까지 하려면 그만큼 내구도도 중요하고… 또…….”
“아… 알겠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래퍼처럼 말을 쏘아 대는 신아람에 귀를 막은 발렌이 투덜거렸다.
발렌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신기해서 옆에서 구경하기로 했다.
신아람은 발렌의 체중부터 키, 다리의 부위별 길이, 발 크기 등 쉬지 않고 측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굳어 있지 않아도 돼!”
파악!
신아람은 피식 웃으며 발렌의 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흠칫 놀란 발렌을 보고 더욱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발렌은 몬스터인데, 신아람도 참 별종이구만.
내 능력이랑 발렌에 관해서 말해 줬다고 해도 신아람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됐어! 측정 끝! 고생했어.”
발렌은 이 어색한 상황이 피곤했는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이거 받아.”
신아람은 내게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그곳엔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물건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설마…….”
“그 설마야.”
“네?! 이걸 다 구해 오라고요?!”
목록에 적혀 있는 아이템 수가 너무 많아서 한눈에 보기도 힘들었다.
몬스터 전리품은 헌터 시장에 가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던전 내부에서 구할 수 있는 광석 같은 건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지경이었다.
“대체품은 없어. 발렌은 체중도 어마어마하고 우리보다 힘도 훨씬 세잖아? 웬만한 거로 만들면 금방 망가지고 말걸? 전투 중에 장비가 고장 나면 자칫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만약 거기 있는 물건들을 못 구해 오면 의족은 만들 수 없으니까 그런 줄 알아.”
“…이런 부분에선 철저하네요.”
“이래 봬도 대장장이 자부심이 있거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그녀를 보고 더 이상의 반론은 포기하기로 했다.
신아람이 한 말들은 맞는 말뿐이었으니까.
일단 발렌을 시스템으로 집어넣고 시장에 가 보기로 했다.
***
“‘브루의 뿔’, ‘버그 베어의 발톱’, ‘코아틀의 비늘’, ‘카번클의 머리’.”
“이걸 다 구할 수 있어?”
“후우, 어쩔 수 없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모아 보는 수밖에.”
“…미안해 형씨, 나 때문에…….”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내가 발렌에게 도움받은 걸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
발렌의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헌터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터 시장은 말 그대로 헌터들을 위한 시장이다.
헌터가 전투를 할 때 필요한 것부터 시작해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게이트와 던전에서 얻은 채집물을 팔기도 한다.
아포칼립스 전에는 몬스터 전리품의 가격이 채집물 가격보다 높았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다.
던전 내부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져서 광석이나 약초를 채집하는 게 불가능해졌으니까.
“설마 이 넓은 곳을 다 돌아다녀야 하는 거야?”
헌터 시장은 그 규모가 엄청나서 한 바퀴 돌려면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넓은 길을 따라서 양옆에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평소엔 사람이 가득 차서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움직여야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한산했다.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까지 풍기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휑한 곳이야?”
“그럴 리가. 원래는 엄청 활기찬 시장이거든. 헌터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몬스터 전리품은 다른 곳에서도 많이 쓰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보통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넓은 시장을 전부 돌아보는 게 가장 현명하다.
가게마다 아이템 가격이나 종류가 다르니 발품을 팔면 그만큼 이득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장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향한 곳은 ‘JT Market’이란 가게였다.
이름과 달리 새하얀 건물은 크고 깔끔했다.
딸랑!
안으로 들어가자 문에 달린 방울이 내가 왔다는 걸 힘껏 알려 주었다.
“어서 오세… 최현?! 현이야?!”
“저 왔어요! 그보다 가게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니까요.”
“하하하! 나는 완전 마음에 들거든?”
김정태는 F-5 구역에서 진천우를 도와 베이스캠프를 이끌어 가던 사람 중 하나다.
동그란 안경을 쓴 곱슬머리의 그는, 진심으로 나를 보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나를 훑어보더니 내 팔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잘 지냈어?”
“음… 굳이 따지자면 못 지냈지만, 열심히 살고 있어요.”
“푸흡, 그게 뭐야? 전보단 여유가 있어 보이네. 들어가자.”
통신계 헌터였던 그는 사무적인 능력이 뛰어나서 진천우를 보좌하는 일을 했었지만, 결국, 헌터를 그만두고 가게를 차렸다.
처음엔 놀랐지만, 뭔가 그와 잘 어울리는 일인 것 같다.
가게 내부는 그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물건의 종류가 많아서 시간만 많으면 하나씩 구경하고 싶을 정도였다.
“팀장님은 뭐라고 안 했어요?”
“그 사람이 그냥 보내 줬겠니? 처음에 그만두고 가게 차릴 거라고 했더니 그러면 가게에 와서 다 부술 거라고 했다니까?! 완전 제정신이 아니야.”
머릿속에 진천우의 목소리가 그대로 떠올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 둘이 부러웠다.
“그보다 오늘은 무슨 일이야?”
“아, 필요한 물건들이 있어서요. 혹시 구할 수 있을까 해서…….”
“귀중한 손님이었구나! 뭐가 필요한데?”
주머니에 고이 접어 뒀던 필요 아이템 목록을 김정태에게 건네주었다.
목록을 본 그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나와 종이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정말?! 이게 다 필요해?”
“그렇네요. 구할 수 있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김정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평소라면 구하기 쉬웠겠지만… 아무튼 찾아볼게.”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이래 봬도 나름 시장에 발이 넓거든. 그보다 이거 돈이 제법 들 텐데?”
김정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목록을 쭉 훑어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죠. 꼭 필요한 거거든요.”
사실 돈은 크게 걱정이 없다.
꾸준히 사냥을 통해서 돈을 모아 왔기에 이 정도 아이템을 구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시장에 사람이 없네요.”
내 말에 김정태는 흠칫 놀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아, 사실 요즘 시장에 문제가 좀 생겼거든.”
“문제요?”
“어떤 사람들이 시장에 물건들을 어마어마하게 사가고 있어.”
그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가는 물건은 대부분 몬스터의 고기, 그리고 장비를 만드는 재료들이야.”
“그래서 사람이 이렇게 적었군요.”
헌터 시장의 주 거래 물건은 방금 김정태가 말한 것들이었다.
몬스터의 고기는 일반적으로 냄새가 심해서 사람들은 먹지 않지만, 윈터 버드처럼 맛있는 고기도 존재했다.
뭐든 먹어 치우는 사람들이 그런 걸 마다할 리 없었고, 헌터 시장에서도 그런 고기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장비를 만드는 재료 역시 헌터 시장의 메인 상품이었다.
“처음엔 장사꾼으로서 좋은 거라 생각했는데, 한동안 물건을 싹 사가니까 매번 허탕만 치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헌터 시장은…….”
“헌터 시장은 사재기할 만큼 좁은 곳이 아니지.”
넓고 큰 시장인 만큼, 물건의 수도 엄청나게 많은 시장이다.
그런데 사람들 발길이 끊길 정도로 사 간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다는 뜻이다.
“사실 나도 궁금해서 이미 알아봤거든. 그 정도의 돈을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까.”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내게 다가와 말했다.
“2위 길드인 ‘앙그라마이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