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금의환향 (4)
“흥미롭군요. 마치 장사치의 눈을 하고 있어.”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체격을 가진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새까만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이재문은 팔걸이에 팔을 괴고 있었다.
그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조차 놓치면 안 된다.
여긴 호랑이 굴이었고, 정신을 못 차리면 분명 물려 죽을 테니까.
“협상 전에 어디서 제가 월하화백식에 대해 알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셨는지 궁금하군요.”
“그렇게 안 보였는데 생각보다 뻔뻔하시군요.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하시다니.”
이재문은 내 도발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떤 정보든 공짜로 줄 생각은 없다.
모든 것이 그와 협상 요소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퍼플 스톤은 아르티아를 사냥해서 얻은 겁니까?”
“맞습니다.”
“호오, 다른 하나는 어디 있죠?”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을 달성한 거라, 가보로 간직하려고 합니다.”
이재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그가 다른 하나의 퍼플 스톤도 노릴 거라는 걸 알았다.
하루가 했던 말처럼 퍼플 스톤은 부르는 게 값이 될 정도로 귀한 물건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고, 퍼플 스톤을 써서 장비를 만들면 분명 어떤 장비보다 뛰어난 장비가 될 테니까.
그런 퍼플 스톤을 이재문이 독점한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원래 이런 느낌이 아니셨던 거 같은데, 어른스러워지셨군요.”
“한창 철들 나이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밖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과 대조적으로 20층 건물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화이트 소드의 아지트는 그래도 전선과 조금 떨어져 있어서 근처는 멀쩡했지만, 조금만 고개를 들면 초토화된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볼수록 그 반짝임이 탐이 나는군요. 어떻게든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월하백화식에 대해서 알려만 주신다면 퍼플 스톤을…….”
“아뇨, 제가 말하는 건 최현 씨, 당신입니다.”
이재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할 말을 잃고 그의 넓은 등만 바라봤다.
“지금은 아직 모르시겠지만, 나중엔 분명 제 그림자가 필요하시게 될 겁니다.”
“…그림자보단 빛이 필요해서요. 그보다 거래를 계속하시죠.”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쭉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얼른 목적을 달성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그렇군요. 저는 일찍이 월하백화식을 탐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그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며 말을 이어 갔다.
“서진욱 씨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던, ‘서준환’은 저의 친우이기도 했죠.”
“……!”
“저는 그가 병에 걸린 걸 알았고, 그에게 월하백화식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재문이 하는 얘기가 거짓말로 들리진 않았다.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지어내서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물론 거절당했죠.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에게 전수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월하백화식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후… 훔치다니…….”
“그의 자세, 전투 방식, 움직임까지 모든 걸 따라 하며 월하백화식을 제 것으로 만들려고 했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마저도 실패했지만요.”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월하백화식은 전수 받은 사람만 쓸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검술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다른 검술보다 움직임 자체는 단순하고 간단했다.
“왜 실패했는지는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재문이 실패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먼저 이재문에 관한 정보는 들은 게 많지만, 그가 월하백화식을 쓴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월하백화식을 스승님께 직접 전수 받았는데 나 역시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하고 간단한 움직임이기에 그 힘을 제대로 끌어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실패한 제게 월하백화식에 관해 물어보는 이유가 뭐죠?”
그는 모든 걸 꿰뚫을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스승님께 월하백화식의 가르침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게 해결법을 알려 달라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이재문은 천천히 내뱉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건을 받은 이상, 최선을 다해 해결법을 생각해 보겠지만, 그게 정답이 될지는 모르는 겁니다.”
당연한 얘기였다.
이재문이 제대로 월하백화식을 배운 것도 아니었고, 반쯤 배운 나와 스스로 독학했던 그를 합친다고 완성품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월하백화식이 나를 마지막으로 끝나는 걸 바라진 않으니까.
“욕심이 많은 노인이지만, 양심은 있습니다. 제대로 월하백화식이 완성되지 않는다면 물건은 돌려드리도록 하죠.”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밖에서 하얀 제복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머리를 하나로 땋은 그녀는 사무적인 얼굴로 서류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욕심은 많지만, 양심은 있습니다. 이 거래에 대한 계약서 같은 거죠.”
거기엔 퍼플 스톤을 넘기는 조건과 차후에 이재문이 내 월하백화식을 최선을 다해 업그레이드 시켜 준다는 조항들이 있었다.
상대가 이재문이었기에 몇 번이나 서류를 검토한 뒤에 이름을 적었다.
“아무래도 당장은 힘들 것 같고, 시간이 되면 저희 길드가 운영하는 훈련소에 방문해 주시죠. 먼저 최현 씨의 검술을 보고 그 후에 해결책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내가 아는 이재문이라는 사람은 좀 더 흉악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정신 나간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평범한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인자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내 실력을 확인하겠다고 자기 길드원 여럿의 목숨을 내던진 사이코패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거래에서도 그가 원하는 것은 있을 거다.
어떤 가면에도 속지 않아.
***
“다녀왔습니다.”
“…최현 씨.”
레이브 길드 아지트로 들어오자마자 장수주의 곤란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무슨 일 있나요?”
“손님이 오셔서 최현 씨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루와 신아람, 그리고 이재문까지 만나고 온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으니까.
“벌써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계세요. 연락했는데, 받으시질 않으셔서…….”
그제야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부재중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어쩔 수 없이 길드 응접실로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이 날 반겨 주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색의 정장을 추스른 윤서훈은 날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으로 안경 가운데를 스윽 올린 그는 여전히 깔끔한 인상이었다.
“오랜만이네요. 1시간이나 저를 기다리신 이유가 뭐죠?”
전보다 쇠퇴했다곤 하나 여전히 헌터 협회는 무시할 수 없는 거대 조직이다.
그런 조직의 협회장인 윤서훈이 1시간이나 의미 없이 기다렸다고 생각하긴 힘들다.
분명 중요한 용무가 있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굳이 예의를 차릴 때는 아닌 것 같군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는 지친 내 얼굴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아르티아와 블랙 퀸의 토벌 공적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윤서훈의 말에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 남자가 나에게 원하는 게 뭔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헌터 협회는 안 그래도 아포칼립스 이후로 그 지위가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C급 헌터가 협회에서 구성한 특수팀도 쓰러뜨리지 못한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사냥했다는 건 여러모로 그림이 좋지 않겠지.
“아예 공적을 숨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발표하는 시간을 늦춰 주시기만 해도 됩니다.”
“그건 헌터 협회의 지위 때문인가요?”
“…….”
윤서훈은 내 물음에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고 나는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 화이트 소드는 협회의 권한까지 탐낼 정도로 노골적으로 야망을 드러내고 있죠. 만약 지금 최현 씨의 공적을 발표하면 아슬아슬한 이 균형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하는 윤서훈의 모습에도 인상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요?”
“…네?”
윤서훈은 당혹감이 서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내가 말한 건지 확인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엔 만나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을 너무 자주 만나서인지 이젠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저 귀찮고 피곤할 뿐.
내게 어떤 이득도 되지 않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는 없다.
C급 헌터로 지내면서 알게 된 게 있다면 나 역시 등급을 올리지 않으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거다.
“물론 공짜로 해 달라는 파렴치한 인간은 아닙니다.”
또 거래인가.
가진 것도 없는 내게 뭘 그렇게 원하는 것들이 많은지.
“최율 씨 병의 신약을 가장 먼저 독점적으로 공급해 드리도록 하죠.”
“……!”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 반응을 읽었는지, 그가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재수 없는 자식.
“대대적으로 공표되었으니 아마 최현 씨도 소식은 전해 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이다.
해외에서 율이가 가진 병에 대한 특효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건 들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환자에게까지 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포칼립스 이후로 율이의 병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병이 호전되어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상황을 겪고 다시 심해진 거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가능합니다.”
자신만만한 그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다른 사람이 아닌, 이 남자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겠지.
내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건 짜증 나지만, 이 거래에서 내가 물러날 곳은 없다.
율이는 내게 그런 존재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약의 공급과 다른 부분에 대해선 따로 서류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뻔뻔한 표정의 윤서훈을 보고 있으니 어째 내가 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감사 인사인데, 이번 헌터 선발 시험에 시험관으로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걸 왜 윤서훈 씨가 인사를 하시는 거죠?”
“글쎄요. 새로운 좋은 헌터가 많이 늘면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닐까요.”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윤서훈을 보며 이 남자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