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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96화 (96/176)

96화 : 금의환향 (3)

화원에서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나를 맞아 줬다.

하루와의 긴 대화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는 질문들로 그녀 역시 많은 걸 알아냈겠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이신예 특유의 은발 곱슬머리가 달빛에 비쳐서 그 빛을 더하고 있었다.

“아, 그러게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따악!

“읏?!”

이신예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때리더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율이한테 없는 얘기 만들면서 매일 네가 무사하다고 보고했다고.”

“아…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실제 몬스터를 보고 위험한 상황을 겪은 율이는 전보다 내 걱정이 배로 늘었다.

이신예는 병원 구조 때 이후로 율이를 진짜 동생처럼 아껴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컸다.

“하여간 맨날 걱정이나 시키고. 혼자 던전에 들어가서 그런 괴물들이랑 싸우는 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좀 더 죄송하도록 해! 통신도 안 닿고, 매일 내가 얼마나…….”

이신예는 그렇게 말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채하나가 있는 병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저 사람은 정말 던전에서 구해 온 사람이야?”

“아, 채하나 씨요? 그 긴 시간을 10층에서 혼자 살아남으셨어요. 어쩌다 우연히 만나게 됐고요.”

“흐응, 그럼 던전에서 계속 같이 있었다는 거네?”

이신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가, 같이 있긴 했지만! 탈출할 때 잠깐뿐이었는걸요.”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어쩐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하루보다 상대하기 힘들지도…….

“난 네가 그렇게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하면 무섭거든.”

“네?”

“갑자기 우리 앞에서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신예는 쓸쓸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보름달을 바라봤다.

“우리가 가진 이 능력은 보통 사람은 없는 능력이잖아. 어느 순간 갑자기 생긴 능력이고. 그래서 난 혹시라도 갑자기 우리 능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며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내가 사용하면 베리어가 생길 걸 알면서도 막아 내기 직전까지 무서워. 모든 게 사라질 것 같아서.”

“저는 사라지지 않아요. 언제나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요.”

이신예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지키지 않으면, 내가 죽일 테니까.”

***

“으어어, 피곤해. 이러다 정말 과로로 죽을 거라고.”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 좀 더 부려 먹어도 되겠는걸?”

침대에 엎드린 채로 나는 방문에 서 있는 신아람을 쏘아봤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정말 그럴까 봐 무섭다고요.”

“알았어. 미안해.”

오히려 사과해야 할 쪽은 나였다.

내 멋대로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쫓아간 바람에 신아람은 곤란한 상황이 됐고 징계까지 받은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폐를 끼쳐서.”

“뭐야, 그런 것도 생각할 줄 아는 거야? 워낙 제멋대로라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했는데, 다행이네.”

화난 신아람에게 빌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의외의 반응에 당황했다.

내게 다가온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잘했어.”

“…화 안 내시나요?”

“뭐야, 나 그런 이미지였어? 힘들게 싸우고 온 사람에게 화낼 정도로 야박한 사람은 아니거든.”

어쩐지 미안해지는 기분인걸.

“마음 같아선 한동안 푹 쉬게 해 주고 싶지만, 절차 때문에 보고는 받아야 하거든. 이것만 끝나면 휴가 줄 테니까.”

“야근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하루에게는 숨기고 숨기던 얘기들을 신아람에겐 허심탄회하게 쏟아 냈다.

그녀에겐 정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 신세를 졌으니 그에 대한 사죄의 의미라고나 할까.

“뭐?! 류설영이 17층에서 살고 있다고?!”

“쉿, 목소리가 커요.”

류설영에 관한 건 하루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느라 하루도 어림짐작은 하겠지만, 17층에 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하겠지.

류설영은 내가 던전에서 나가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 관한 걸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적어도 신아람과는 숨기는 게 없는 신뢰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알겠어. 위에 보고할 땐 알아서 필요한 부분만 올릴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하나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는 펫 시스템창을 열어서 발렌의 소환 버튼을 눌렀다.

푸른 빛에 휘감겨 나온 발렌을 보고 놀란 신아람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격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미리 발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고, 신아람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발렌이 내 옆으로 딱 붙었으니까.

“저번에 말했던 그 발렌이라는 친구야?”

“맞아. 내가 발렌이다.”

“에에에엑!”

발렌의 말을 들은 신아람은 이번엔 격한 반응을 보였다.

말을 내뱉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신아람을 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크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진 듣지 못했다고!”

“원래 조금 특별한 친구거든요.”

“그래서? 그 부탁이라는 건 이쪽인가?”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서로 죽이기 위해 싸웠던 몬스터인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발렌에게 다가왔다.

원래 다리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는 아래쪽으로 신아람의 시선이 내려갔다.

“의족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비용은 제대로 내겠습니다.”

“흐으음.”

그녀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은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것들이 필요하거든. 일단 이 친구도 너와 같이 싸우는 쪽이라면 몬스터의 공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여야 해. 그러려면…….”

타악.

나는 인벤토리에서 퍼플 스톤을 꺼내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퍼플 스톤을 처음 본 그녀는 노골적으로 탐욕스러운 눈으로 퍼플 스톤을 보고 있었다.

꿀꺽.

“이게… 퍼플 스톤?”

“…신아람 씨?”

“다… 당장 두드려 보고 싶어! 이걸 제련하려면 역시… 아니! 아니야! 그보단 이런 식으로 하는 게 강도를 높이기에 좋을 거야.”

혼자 무언가 중얼거리는 신아람을 보고 잠시나마 걱정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더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제가 구해 올 테니까 알려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무릎을 꿇자, 신아람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발렌도 깜짝 놀랐다.

“뭐, 뭐 하는 거야! 일어나!”

“형씨! 형씨 탓이 아니었잖아!”

아니, 발렌을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내 탓이다.

내 가장 소중한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릎을 꿇는 것 정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하아, 알겠으니까 일어나. 이런 부분까지 막무가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저… 정말요?! 의족을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래. 이 퍼플 스톤에도 상당히 호기심이 생기고, 사람이 아닌 오크의 장비를 의족을 만드는 것도 흥미롭거든. 난 헌터이면서 대장장이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단, 나도 조건이 있어.”

신아람이 검지를 세우며 근엄하게 말하는 걸 보고 긴장했다.

웬만한 비용이면 충분히 낼 수 있지만, 그녀가 내 예상치보다 높은 금액을 말할까 걱정이었다.

대량의 몬스터 사냥이 이루어지면서 과거보다 스톤 가격이 내려갔으니까.

“헌터 선발 시험에 시험관 자격으로 나가 줘.”

“…네?”

순간 내 귀를 의심해서 갸웃거리자, 그녀는 확인 사살을 해 줬다.

“선발 시험 시험관을 해 달라고.”

“네?! 제가요?! 저는 겨우 C급 헌터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자, 잠깐 이건 진짜 무리라고요!”

손을 내저으며 말하는 날 보고 신아람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의족 얘기는 없었던 거로.”

“…완전 치사해. 마녀.”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어. 선발 시험에 시험관으로 가면 새로 선발된 헌터들 중에서 길드로 영입할 수 있거든. 너라면 좋은 신입을 데려올 거 같아서.”

정말이지 곤란한 부탁이었다.

아직 나 역시 경험이 부족한 헌터인데 다른 헌터 시험관이 되라니…….

“지금은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 아르티아와 블랙 퀸에 관한 건 워낙 큰 사건이라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될 거야. 그럼 너도 단숨에 유명 인사가 되겠지.”

“그런가요? 기왕이면 조용히 살고 싶은데…….”

“하하하, 그런 거라면 이미 글렀어. 헌터들 사이에서 가장 시끄러운 녀석이 너거든.”

내 씁쓸한 표정을 보고 신아람은 더욱 즐거운 얼굴을 하고 방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럼 이 거래는 성사된 거 맞지? 발렌이라고 했나?”

“어? 나?”

“앞으로 잘 부탁해. 어쨌든 최현 친구라면 우리 동료니까. 아, 그리고 시간 되면 이것저것 측정할 게 많으니 대장간에 들르고.”

말을 마친 그녀는 휘리릭 사라져 버렸다.

발렌의 의족을 만들 수 있게 된 건 다행인 일이었지만, 선발 시험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시험관으로 참가하려면 먼저 헌터 협회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종합적으로 판단하기에 시험관에 적합한 사람이면 시험관 자격을 얻게 된다.

본래라면 C급 헌터는 힘들지만, 아무래도 나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일단 지금은 다 집어치우고 자고 싶어.”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나는 지쳐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겨우 열흘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구나.

마치 침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행복감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마음 놓고 이렇게 잘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잘자, 발렌.”

“자… 잠깐 형씨! 나는 다시 집어넣고 자야지! 형씨!”

***

“저 사람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헛소문 아니야?”

복도를 지나는 동안 수군거리는 소리가 모두 내 귀에 들어왔다.

하얀색 제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 떠들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화이트 소드의 아지트.

헌터라면 누구라도 알 만한 유명 인사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하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르티아를 토벌하신 영웅께서 여기까지 행차해 주시다니, 영광이군요.”

“먹음직스러운 공적을 빼앗겨서 아쉬운 표정이신데요?”

내 말에 그는 껄껄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저를 찾아오신 연유가 무엇인가요?”

그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나머지 퍼플 스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월하백화식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건 제 협상 카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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