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x9999-95화 (95/176)

95화 : 금의환향 (2)

내가 던전에 있었던 건 겨우 열흘이 채 되지 않는 시간.

아포칼립스가 발생하고 7개월 정도가 흘렀다.

4개월 정도는 사태를 수습하고 방어 체계를 갖추는 데 소요됐다.

본격적인 토벌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건 3개월.

심지어 그조차도 몬스터의 영역이 넓어지는 걸 늦추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겨우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던전 근처까지 몬스터 토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먼저 왜 하루 씨만 이곳에 있는지 말씀하시죠.”

차를 한 모금 마신 하루는 나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내려와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휴식을 취한 뒤 바로 하루에게 끌려왔다.

작은 건물 안에 있는 화원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꽃향기와 풀 내음이 가득한 화원 한가운데에 작은 티 테이블이 우리의 무대였다.

“일단은 최현 씨가 던전으로 혼자 갔을 때 제가 지휘관이었고, 책임자였으니까요.”

어쩐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살기가 느껴졌다.

확실히 신아람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했지만, 지휘관인 하루도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었겠지.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이곳에 그녀밖에 없는 건 정보의 독점.

내가 던전에서 보고 겪은 정보를 가장 먼저 얻으려는 것.

하루의 생각을 안다고 해서 내 행동이 달라지진 않는다.

“간단하게 보고를 받긴 했지만, 정말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쓰러뜨린 건가요?”

“네. 제 초월 능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몬스터를 사냥하면 아이템을 얻고 경험치가 오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었다.

리치왕 보스룸에서 아르티아와 블랙 퀸은 확실하게 쓰러뜨렸다.

나는 토벌 파티에서 단독으로 나와서 어떻게 놈들과 게이트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게이트에서 어떻게 사냥에 성공했는지 설명했다.

하루는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차를 홀짝거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미 체력이 깎여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혼자서 그 둘을 사냥한 건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하지만…….”

웃고 있던 하루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날카롭게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장에서 지휘관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건 어떻게 해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건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일부러 나를 몰아붙이고 있다.

그쪽이 나를 휘두르기 편할 테니까.

“하지만 그 전투에선 이미 저희들은 패배한 상태였습니다. 그대로 돌아간다면 아르티아와 블랙 퀸은 다시 회복하고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겠죠.”

“판단은 지휘관이 하는 거예요! 그렇기에 지휘관이 모든 책임을 지는 거고요!”

격앙된 하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최현 씨는 그곳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면 책임질 수 있었나요?!”

“블랙 퀸과 아르티아를 그대로 놓치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곳에서 저희 파티가 전멸했다면 하루 씨는 책임질 수 있나요?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

그녀는 나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테이블에 앉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하루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그저 허세 한 장이라는 것.

그녀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면 지금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내게 소리치는 일도 없었을 거다.

문득 다른 사람과 이런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에 염증이 느껴졌다.

“지휘관은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결단을 내리는 거예요.”

“거기서 하루 씨는 저를 포함한 모두를 데리고 퇴각하는 것으로 결단을 내리셨죠. 하지만 그곳에서 아르티아와 블랙 퀸에 관한 것, 그리고 저의 전력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어요.”

하루는 처음으로 내게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다.

하지만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냥 당해 줄 수 없지.

“후우… 최현 씨는 예전과 달리 많이 변하셨네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인걸요.”

차를 마시려다가 찻잔이 빈 걸 본 하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쪽에 준비된 카트에서 찻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그때의 최현 씨도 좋았지만, 지금은 더 매력적이네요. 더 갖고 싶어졌어요.”

“…저는 물건이 아닌걸요.”

“최현 씨를 탐내는 곳이 많다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쪼로로록.

그녀는 차를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졌네요. 본격적으로 다시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이 자리가 협상하는 자리였다는 건 방금 알았네요.”

하루는 다시 진정이 된 표정으로 내게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말씀드리죠.”

처음부터 그녀는 알고 있던 거다.

원래라면 순순히 던전에서 있었던 정보를 말했을 내가, 물러나지 않은 건 이것 때문이었다.

“외부 토벌이 이렇게 진척된 건 어떻게 된 거죠?”

여전히 던전 밖에도 몬스터가 존재했지만, 이젠 던전 주변에만 몬스터가 남아 있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의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방증이다.

긴 시간도 아닌데 던전에 있는 동안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진 과정을 듣고 싶었다.

“화이트 소드가 움직였어요.”

“……! 그게 무슨 의미죠?”

하루는 아까와 똑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화이트 소드는 지금까지 전력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때가 그 전력을 꺼낼 때라고 판단한 거죠.”

“그게 무슨… 이런 세상에서 최강의 길드가 무슨 이유로…….”

하루에게 되묻던 나는 스스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이재문,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아포칼립스가 발생하고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건 ‘헌터 협회’다.

“그 사람은 이 사건을 좀 더 키우고 싶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누가 어떻게 좀 해 줘’라고 말할 정도로 간절해지길 바란 거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 ‘짠’하고 등장해서 정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웅이 되겠지.”

“정답이에요. 이재문은 이미 SS급 헌터라는 명예와 최강의 길드의 마스터라는 지위가 있어요. 사람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역시 이재문은 달라’라며 호전된 상황만 놓고 그를 칭찬하겠죠.”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헌터 협회가 힘을 잃었어도 지금까지 화이트 소드의 전력을 놓치고 있었다는 건 이해가 되질 않아요.”

“이재문은 최현 씨가 상상하는 것보다 영악한 사람이에요. 그는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건 미리 손을 써 두거든요. 이재문은 아포칼립스가 터졌을 때 길드의 주요 전력들을 행방불명으로 처리했어요.”

하루의 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말은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는 거군요.”

“맞아요. 이재문은 그들을 꼭꼭 숨겨 놨어요. 지난 7개월 동안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토록 많은 곳이 무너져 내렸고,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재문은 그걸 지켜보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요! 7개월이나 행방불명이라니…….”

“던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겨우 살아서 나왔다고 하면 더 이상 캐물을 수 없는 거죠.”

하루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입만 뻥긋거렸다.

왜냐면 나는 정말 던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봤으니까.

채하나와 류설영은 던전 안에서 보란 듯이 그 긴 시간을 살아남았다.

“다들 이재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정황 증거는 증거가 될 수 없으니까요.”

확실한 물증이 없다면 그들이 어떤 거짓말을 해도 밝혀낼 수 없다는 거다.

“결국, 모든 건 이재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어요. 주변 몬스터를 빠르게 정리하고 위험 구역까지 수복하며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죠.”

“…믿을 수 없네요.”

“다시 던전을 공략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최현 씨의 궁금증이 조금은 풀렸을까요?”

빙긋 미소를 짓는 하루는 대놓고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표정이었다.

“좋아요. 하루 씨가 궁금한 건 뭔가요?”

“네? 설마 하나만 가르쳐 주려는 건가요?”

“저는 이제 길드도 있고, 더 이상 하루 씨는 제 지휘관도 아닌걸요. 저희는 지금 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래를 하는 것뿐입니다.”

내 말에 하루는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눈으로 나를 욕하며 말했다.

“그럼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공략한 방법부터 알려 주세요.”

“그렇게 하죠.”

말한 것처럼 여기는 하루와 나만을 위한 은밀한 거래 장소였다.

이 거래의 전제 조건은 서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하루는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남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지만, 나를 적으로 돌릴 정도로 의미 없는 도박을 하진 않을 거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의 거짓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얘기를 전했다.

“직접 들어도 믿기지 않네요. 아르티아와 블랙 퀸의 능력을 파악한 것도 그렇고, 자신이 갇혔던 게이트를 그렇게 이용하다니…….”

그녀는 조금의 숨김도 없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삼 최현 씨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느끼네요. 리치왕을 이용한 것까지 완벽해요.”

“하루 씨가 그렇게 칭찬해 주니 뭔가 묘한 기분인데요. 나중에 칭찬 값 달라고 하는 거 아니죠?”

“글쎄요. 최현 씨라면 조금은 할인해 드릴지도.”

장난스럽게 웃는 하루를 보면 영락없이 아직 여고생인데,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인가.

“그럼 퍼플 스톤이 나왔겠군요. 보여 주실 수 있나요?”

“호오,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다음 목적까지 달성하시겠다?”

어깨를 으쓱한 하루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씩 걸고넘어지는 남자는 여자한테 인기 없거든요.”

“…….”

갑자기 뼈를 때리다니.

퍼플 스톤을 하루에게 보여 주는 건 나 역시 원하는 거다.

인벤토리에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퍼플 스톤을 꺼냈고, 하루는 주먹만 한 퍼플 스톤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진짜 퍼플 스톤이네요. 그래서? 이건 어디에 파실 거예요? 지금까지 퍼플 스톤은 한 번도 세상에 나온 적이 없어요. 아마 최현 씨가 부르는 게 값일 거예요.”

“정말 군침 도는 얘기지만, 이건 이미 쓸 곳을 정해 뒀거든요. 하나는요.”

“그럼 다른 하나는?”

하루가 눈에 퍼플 스톤을 가져가 스톤을 통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거래용이라고 할까요?”

“파는 건 아닌데, 거래용이라……. 흥미롭네요. 말해 주지 않으실 거 같으니 묻진 않겠습니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제법 긴 대화를 이어갔는데도 하루와의 대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할수록 더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자칫 실수하면 나도 모르게 뭐든 말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자, 그럼 저희 거래를 이어 가도록 하죠. 또 제게 궁금한 게 뭐죠?”

하루의 물음에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류설영이라는 헌터에 대해 알고 싶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