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금의환향 (1)
10층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을 향해 이동했다.
일단 10층 지형은 파악하고 있으니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채하나가 내 기대 이상으로 활약을 해 주고 있었다.
항상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 것만 빼면 완벽할 텐데.
“굉장해요! 최현 씨는 정말 엄청나요!”
“하하, 알겠으니까 그만 좀…….”
“최현 씨 같은 분은 본 적 없어요! 최고의 헌터예요!”
“하아…….”
계속 이런 식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편하게 사냥을 해 본 적은 없어요! 최현 씨 덕분이에요!”
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녀의 버프 능력은 기본적으로 다수 대 다수의 전투에선 그다지 빛을 보지 못 한다.
애초에 버프는 한 사람에게만 걸어 줄 수 있다.
한 번 사용하면 한동안 쓰질 못하니 계속 전투가 이어지는 전장에선 크게 의미가 없다.
그에 비해서 지금은 나와 둘이 호흡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전투를 최대한 피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몬스터를 처리하며 이동하고 있다.
덕분에 전투 때마다 그녀의 버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말은 아예 던전에서 나가고 해도 늦지 않아요.”
“…나갈 수 있을까요?”
살짝 미소를 지은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죠. 지금까지 잘하고 있잖아요.”
“혼자 있을 땐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나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난 채하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동굴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녀에겐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드디어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왜 저런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거지.
“나가면 다시 헌터 일을 하지 못 할 거 같아요. 여기서 겪었던 일들이 제 머릿속을 뒤집어 놔서…….”
그녀는 울먹거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입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펑펑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성인이 되고 바로 헌터 일을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게이트와 던전에서 몬스터와 싸우는 것밖에 해 본 적이 없는데 헌터를 할 수 없게 되면 저는 도대체 뭘…….”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오며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는데, 감히 내가 그녀의 생각을 헤아리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만약 내가 채하나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나 역시 같은 고민에 빠졌을 거다.
“나가는 게 무서워요.”
“같이 찾아봐요.”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놀란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무사히 던전에서 나가면 채하나 씨가 다시 할 수 있는 걸 찾도록 도와줄게요.”
“아뇨 아뇨! 아니에요! 이미 폐를 잔뜩 끼친걸요. 애도 아니고, 그런 건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손을 휘휘 저으며 거절하는 채하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헌터라는 게 단순히 전장에서 싸우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무직이라던가, 관리직이라던가 분명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여태껏 해 온 일들이 부정당하는 건 누구나 두렵다.
지금 내게서 헌터를 지운다면 과연 나는 뭐가 될지 나조차 알 수 없다.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지금은 여기서 무사히 나가는 것만 생각하죠.”
눈물을 닦아낸 채하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10층은 전체적으로 낙원 같은 느낌이지만, 아래층의 영향 때문인지 계단 근처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계단으로 가까이 갈수록 말라비틀어진 나무들과 황폐한 땅, 그리고 연노랑 빛 갈대가 전부였다.
덕분에 몰래 이동하기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바로 옆에 밖으로 이어지는 창문이 있어서 마음 같아선 바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채하나가 아니었어도 추락해서 죽는 건 후유증이 커서 하지 않았겠지만.
갈대숲에 몸을 감추고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이 근처에는 몬스터가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형씨! 뒤야! 피해!”
파악!
발렌의 말에 돌아보기도 전에 채하나를 넘어뜨리며 기습을 피했다.
날카롭게 쏘아진 검에 우리가 숨어 있던 갈대가 깔끔하게 잘려 나가는 게 보였다.
“설마하니 순간 이동 능력까지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군요.”
뒤에서 진득한 살기를 흘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카룬이었다.
온몸을 덮고 있는 검은 비늘이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너 스토커야? 여기까지 날 따라온 거냐고!”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는데 도망치시다뇨. 정말 실망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의 화도로 손을 가져갔다.
“하아, 빨리 끝내자. 이번엔 제대로 상대해 줄게.”
이젠 도망칠 이유가 없다.
내 손에 화도가 쥐어져 있고, 내 뒤엔 채하나가 있으니까.
어차피 카룬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계속 번거로워질 게 뻔했고, 자칫하다간 채하나가 위험한 상황도 생길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처리해 두는 게 좋겠지.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쓰고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당신은 아직 제 진짜 실력의 반도…….”
쌔엥-!
화도가 매섭게 허공을 찢어발기며 단숨에 카룬을 훑어 냈다.
화왕은 원래도 굉장히 빠른 검식인데 채하나의 버프를 받은 지금은 나도 그 속도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자 카룬은 놀란 눈으로 물러났다.
“방금 그건…….”
“나머지 반도 얼른 꺼내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상태로 나는 블랙 퀸을 완전히 압도했었다.
안타깝게도 카룬은 블랙 퀸에 비하면 한참 아래다.
이도류를 뽑은 카룬이 먼저 내게 달려들었다.
아까 한 말이 허풍은 아니었는지, 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하지만…….
“부족해!”
카룬의 검을 가볍게 피하고 그의 뒤를 잡았다.
화도가 카룬의 몸을 뚫고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쌔엥-!
당황한 그가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지만, 당연히 내게 닿을 리 만무했다.
“그렇군요. 지금 상태로 더 싸우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겠군요.”
천천히 이도류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그에게서 보이는 살기는 포기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쿠웅!
“……!”
카룬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단숨에 크레이터가 생기며 주변 땅이 일어났다.
내 앞으로 나선 채하나가 베리어를 만들어서 날아오는 돌들을 튕겨 냈다.
“후아아아!”
“저 자식! 설마!”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그의 모습 자체가 기괴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 번쩍거리는 특유의 비늘.
드래곤으로 변한 카룬은 근엄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봤다.
옆에서 흔들리는 눈으로 카룬을 올려다보는 채하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튀어!”
“으앗!”
젠장! 저 자식 정체가 드래곤이었을 줄이야!
아무리 지금 최상의 상태라곤 하나,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심지어 카룬은 변형 능력인 ‘폴리모프’까지 쓸 수 있다.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거겠지.
“최대한 놈에게서 도망쳐야 해요!”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다른 몬스터와 달리 각 개체가 하나의 종족이다.
즉, 종족별로 개체가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다.
직접 싸워 보기 전엔 어떤 성향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전에 싸웠던 좀비 드래곤은 강제로 죽은 드래곤의 시체를 살려낸 것이기에 별개지만.
파앙! 팡!
어느새 우리 바로 위를 날고 있는 카룬은 주변을 그림자로 뒤덮을 정도로 큰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왔다.
아래를 향해 입을 쩍 벌린 카룬은 매서운 불을 토해 냈다.
화르륵!
“……!”
카룬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우리 주변의 갈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불길이 너무 강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계단 앞쪽으로 내려온 카룬은 만족스러운 듯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젠장, 머리를 굴려!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보인 건 커다란 둥지와 알이었다.
“저쪽으로 달려요!”
“네!”
고개를 끄덕인 채하나가 손바닥을 붙이더니 중얼거렸고,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System : 속도 버프가 적용됩니다. 속도가 41% 상승합니다. -7:03-]
폴짝 뛰어서 내 등에 업히는 채하나를 보니 절로 어이없는 표정이 지어졌다.
“자! 얼른!”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군요.”
물론 이렇게 이동하는 게 훨씬 빠르다는 건 인정한다.
애초에 채하나 정도 되는 체격을 하나 업는다고 느려지지 않을뿐더러, 그녀의 버프 덕에 아까보다 움직임이 가벼워졌으니까.
다시 날아오르는 카룬을 보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순순히 우리를 보내 주진 않겠다는 거군.
“자… 잠깐! 왜 윈터 버드의 둥지로 가는 거예요?!”
“불타서 죽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죠. 저렇게 광범위로 불을 뱉어 대는 놈인걸요.”
안타깝게도 채하나가 걱정하는 게 맞았다.
둥지로 접근하자 바로 옆에서 윈터 버드가 날아왔다.
“끼에에엑!”
자신의 알을 건드리면 미친 듯이 공격해 오는 놈이었으니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둥지로 들어온 나는 큼지막한 알을 들어 올렸다.
“자, 밖으로 가자!”
부웅-!
외부로 이어진 창문을 향해 힘껏 알을 던지자 내 쪽으로 날아오던 윈터 버드의 방향이 바뀌었다.
“꽉 잡아요!”
“설마…….”
그 설마다.
버프란 버프는 다 걸려 있는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지!
파앙!
채하나를 업은 채로 단숨에 뛰어올라 윈터 버드 위에 올라탔다.
“꺄아악! 죽어! 진짜로 죽는다고! 으아악!”
“커헉! 숨! 숨을 못 쉬겠어! 그만!”
강렬하게 목을 졸라 대는 채하나의 팔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알을 잃어버린 윈터 버드는 이미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던전 밖으로 떨어지는 알을 따라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미안하다.
마음속 한구석을 찌르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윈터 버드가 아무리 빨리 난다고 해도 떨어지는 알을 잡을 수는 없었다.
파삭!
지상 근처까지 왔을 때 알이 땅에 부딪혀 슬픈 소리와 함께 깨지는 게 보였다.
뭐지, 이 묵직한 죄악감.
언젠가 헌터들의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몬스터였지만,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수직으로 내려오던 윈터 버드는 날개를 펼쳐서 멈췄다.
“지금이다!”
지면 근처까지 내려온 덕분에 뛰어내릴 수 있었다.
놈이 알 근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사이에 빠르게 도망쳤다.
“후, 다행이다. 어때요? 한 번에 1층까지 내려오기 작전.”
“…….”
등에 업혀 있는 채하나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리니, 입을 벌린 채로 기절한 그녀가 보였다.
음… 하긴, 나도 목숨이 하나였다면 기절하고도 남았지.
어쨌든 겨우 밖으로 나오긴 했네.
긴장이 풀리고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근처에도 분명 몬스터가 있겠지만, 지금은 잠시 이 콘크리트 더미 뒤에서 숨을 돌리기로 했다.
“…어서 와.”
멍하니 쉬고 있다가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엔 차윤지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차윤지 씨…? 여긴 던전 바로 옆인데 어떻게…….”
“네가 없는 동안 우리도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