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x9999-93화 (93/176)

93화 : 던전 탈출기 (7)

“허억… 허억…….”

15층에서 내려온 이후로는 속전속결이었다.

계단을 못 찾는 일도 없었고, 14층 아래는 이미 와 본 경험이 있었기에 금방 내려오는 게 가능했다.

물론 내려오면서 30번 정도 죽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10층의 풍경이 이렇게 반가울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아, 너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걱정돼 죽겠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신예… 씨?”

“…! 너! 내 말 들려?!”

화들짝 놀란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엄청나게 혼날 테니까.

“네. 잘 들립니다.”

“너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진짜 죽어 버린 줄 알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다른 사람들도 엄청 걱정하고!”

“말하자면 긴데… 어떻게든 살아는 있습니다. 지금은 10층에 있어요.”

잔뜩 화가 난 듯하면서도 안도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내 긴장감도 조금은 풀어졌다.

류설영이랑 헤어지고 나선 계속 혼자서 외롭게 싸워 왔으니까.

발렌이 옆에서 말 상대가 되어 줬지만,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건 다른 의미였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네!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래! 넌 좀 죄송해야 해! 또 다른 곳으로 세지 말고 바로 아래로 내려와!”

“알겠어요.”

마치 어린아이를 다그치는 듯한 이신예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신예와의 통신이 끝나자마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들리십니까?”

“어? 유미래 씨?”

그녀 특유의 앳된 목소리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어?! 최현 씨?! 정말 최현 씨예요?!”

“네? 저한테 통신 거신 거 아닌가요?”

“최현 씨한테 걸긴 했는데! 지금까지 전혀 받질 않으셨잖아요!”

깜짝 놀란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잠시 유미래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꺅! 그렇게 밀지 마요! 아, 알았다고요! 좀 떨어져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군.

“마스터가 최현 씨 돌아오면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오토바이에 매달아서 끌고 다니시겠다고 하네요. 당분간 던전이 더 안전할 거 같은데요?”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데.”

나는 유미래에게 지금까지 어떤 상황인지 말했고, 그녀는 그대로 옆에 있는 마스터에게 전해 주었다.

이신예도, 유미래도 계속 나와 통신을 연결하고 있었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이렇게 위로가 되는 거였어.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먼저 채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있는 동굴을 찾았다.

10층은 이미 지형을 파악하고 있어서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채하나 씨?! 아직 여기 계시죠?”

들어가면서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무서웠으니까.

혹시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두려웠다.

“최현 씨?”

“아… 하아, 다행이다. 여기 없으면 어쩌나…….”

기어서 안쪽으로 이동한 뒤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채하나가 내게 안겨 왔다.

키가 작은 그녀가 완전히 내 품에 들어와서 남색의 머리카락만 보였다.

“흐윽… 흑! 완전 무서웠다고! 으아앙! 나는 까먹은 줄 알았어!”

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분명 처음 채하나를 만났을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채하나 씨, 냄새나요.”

퍼억

“커헉!”

한참을 우는 그녀를 겨우 달래 주며 아르티아와 싸웠던 일들을 얘기해 줬다.

“저… 정말?! 그 아르티아라는 몬스터를 잡은 거예요?!”

“네. 그러고 17층으로 날아가 버렸지만요.”

그래도 내가 없는 동안 여기서 잘 살아남은 게 대견했다.

하긴, 반년 동안 혼자서 버텨 왔던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선택하셔야 해요.”

“선택? 뭘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채하나를 보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와 함께 아래로 내려갈지, 아니면 제가 구조대를 데리고 올라오는 걸 기다리실지.”

채하나는 내 말을 듣더니 바로 말하려다가 이내 삼켜 냈다.

고민될 만하지.

나와 가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

몬스터가 한 번에 덤비면 내가 그녀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고, 아르티아 같은 놈이라도 만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내가 내려가서 구조대를 데리고 올라오는 게 훨씬 안전하겠지만, 솔직히 그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위험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가겠어요. 여기선 단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채하나 씨 생각이 그렇다면 같이 내려가죠. 일단 조금만 쉬고요.”

정신없이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다.

다시 아래로 또 내려가려면 어느 정도 휴식은 필요했다.

채하나가 피워 둔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10층까진 최대한 빨리 내려오는 것에 초점을 뒀다면, 이젠 죽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중요했다.

“저는 진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모닥불 앞에 앉은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10층까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데, 여길 다시 올 사람은 없잖아요. 아무리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저라면 안 왔을 거예요.”

채하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 울먹거리고 있었다.

“최현 씨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원망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잠깐만요! 알겠으니까 울지 마세요. 동굴이라 울려서 귀 아프단 말이에요.”

당장에라도 눈에서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채하나를 보고 애써 진정시켰다.

“흐윽… 알겠어요. 하지만… 흑… 흐아앙!”

“하아…….”

“앞으로 저는 최현 씨 말만 들을 거예요!”

“네?”

잠시 멍하니 우는 그녀를 보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도 없이 푹 잠을 잔 것 같다.

사실 죽었다가 부활하면 기력이 회복되어서 체력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오래 깨어 있으면 제대로 된 판단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지쳤다.

“흐아암, 다 울었어요?”

눈이 퉁퉁 부은 채하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모르게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줄래요?”

“네?! 또 저를 버리시는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여기서 제 검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가는 거라고요!”

“으어엉! 버리지 마요!”

내 다리에 매달려서 울먹거리는 채하나를 보고 방금 회복한 정신력이 닳아 버린 느낌이다.

“알겠어요! 같이 가면 되잖아!”

“헤헤, 역시 데려가 주실 줄 알았어요.”

빙긋 웃으며 벌떡 일어난 그녀는 횃불을 들더니 나보다 앞장서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연기였냐?!

전에 만났을 땐 아르티아와 전투 중이라 채하나에 대해 신경을 전혀 못 쓰고 있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군.

우린 동굴 밖으로 나와 몬스터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아르티아의 아지트로 이동했다.

아르티아와 블랙 퀸이 아지트로 삼고 활동했던 층이라 그런지 다른 층에 비해서 몬스터의 수가 적었다.

둘에게 고문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스승님의 유품인 화도를 두고 갈 순 없다.

무엇보다 던전에서 나가려면 내구도가 바닥인 에렌 셀만으론 무리겠지.

“여기인가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비해서 작고 기괴하게 생긴 계단을 보고 채하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혼자 다녀오시는 게…….”

“여기까지 오셨으면 이제 위가 더 위험해요.”

아무리 몬스터의 숫자가 적다곤 하지만, 그녀를 혼자 두고 내려가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내 손에 질질 끌려서 채하나도 함께 아래로 향했다.

기억이 맞다면 그때 여기로 납치당했을 때 화도를 한쪽 구석에 치워 뒀었다.

누군가 만지지만 않았다면 아직 여기 있겠지.

또각. 또각.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 둘의 발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어두운 지하는 음침하고 습했으며, 끔찍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내 발로 다시 여기 올 줄이야.”

그런 노골적인 고문은 살면서 처음 당해 봤기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백, 아니 수천 번은 했었던 거 같다.

“히이익- 뭔가 튀어나올 거 같아요.”

“채하나 씨 목소리가 더 귀신 같은데요.”

인위적으로 만든 지하라고 하기엔 너무나 넓은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지하 동굴일 리는 없다.

철컥, 철컥!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와 채하나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나왔다! 으아악!”

“진정해요. 데스나이트예요.”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내게 너무나 낯익은 데스나이트 5마리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처음 블랙 퀸을 만났을 때 데스나이트들이 블랙 퀸을 따르는 모습을 봤다.

그럼 이 녀석들은 블랙 퀸의 추종자 정도 되는 건가.

“최현 씨! 저기!”

횃불을 앞으로 기울이며 가리킨 곳엔 내 화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좋아요. 한참 안 싸웠다고 감이 죽은 건 아니겠죠?”

“이런 꼴이지만, 저도 헌터라고요.”

채하나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혼자서 5마리를 상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채하나가 도와준다면 가능하다.

먼저 라이프 파워만 사용했다.

여기서 굳이 데스나이트와 죽을힘을 다해 싸울 필요는 없었다.

화도만 얻어서 나가면 되니, 괜히 라이프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System : 공격력 버프가 적용됩니다. 공격력이 41% 상승합니다. -5:17-]

다시 봐도 무시무시한 버프네.

채하나는 뒤로 물러나고 내가 앞에서 데스나이트들의 시선을 끌었다.

[System : 속도 버프가 적용됩니다. 속도가 39% 상승합니다. -4:57-]

안타깝게도 데스나이트와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많이 싸웠다.

놈들의 기본 공격 패턴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만약 상황이 불리해지면 화도만 갖고 도망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

“최현 씨… 엄청나네요!”

“후우, 채하나 씨 버프 덕분이에요.”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버프는 말도 안 되는 능력치를 올려줬기에 라이프 파워만 쓰고도 5마리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아직도 자신이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데스나이트들이 쓰러진 곳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정말 혼자서 데스나이트를 다섯이나 쓰러뜨린 거예요?!”

“혼자라기엔, 채하나 씨가 서포트를 너무 잘해 주신 거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이 단순히 버프형 치유계 헌터라고 했지만, 방금 전투에서 보여 준 그녀의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베리어를 만들어서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튕겨 내거나, 내가 공격을 당하면 바로 회복 마법을 써 줬다.

일반적인 치유계 헌터들에 비해선 효과가 뛰어나진 않았지만, 전투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C급 헌터라면서요! 세상에……. 데스나이트를 혼자서 다섯이나 쓰러뜨리는 C급 헌터가 어디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채하나 씨가…….”

“역시 저 최현 씨의 파트너가 되겠어요! 앞으로 최현 씨 전용 버퍼예요!”

전혀 듣지 않고 있잖아!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채하나를 보고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