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던전 탈출기 (6)
쿠구궁!
크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몸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 위에 있던 새들이 깜짝 놀라서 하늘로 날아올랐고,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큰 것도 정도가 있지!”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끝이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골렘.
온몸이 바위로 이루어진 놈은 분명 골렘이었다.
“이렇게 큰 골렘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골렘을 보자마자 반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늘은 종일 도망치다가 끝나겠네!
쿵! 쿵!
놈이 앞으로 발을 디딜 때마다 지진이 일어나서 넘어질 것만 같았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꼼짝없이 깔려 죽게 생겼잖아!”
내가 한참 내달려도 놈이 한 걸음 내딛는 게 더 멀었다.
“형씨! 이름은 자이언트 골렘 어때?!”
“지금이 몬스터 이름 짓고 있을 때냐!? 그보다 자이언트 골렘 괜찮은데?”
묵직한 발로 나를 찍어 누를 것처럼 다가오는 자이언트 골렘을 보며 다리를 더 빨리 움직였다.
젠장, 그렇게 된 거였나!
“15층에 와서 느꼈던 지진은 자이언트 골렘이 움직이는 거였어!”
저런 거대한 몸을 움직이니 층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지진이 일어나지!
잠깐, 그럼 혹시…….
“저놈이 범인이었군.”
“무슨 말이야?”
“자이언트 골렘이 막고 있어서 계단을 찾지 못한 거란 말이야.”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계단을 찾았지만, 던전은 말도 안 되게 넓었고, 계속 몬스터가 방해하는 바람에 2번 정도 돌았다.
그때 자이언트 골렘이 계단 앞을 막고 있었다면 내가 계단을 찾지 못한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그럼 저 골렘만 없애면 계단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거네!”
“오, 그거 정말 간단… 하겠냐!”
쓰러뜨린다기엔 너무 크잖아!
전력으로 팬다고 해도 과연 흠집이나 날지 모르겠다.
열심히 도망치고 있긴 한데, 이렇게 도망친다고 자이언트 골렘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참에 한 번 써 볼까!”
열심히 움직이는 다리를 멈추지 않고 인벤토리창을 열어 칠흑의 묵갑을 착용했다.
새까만 갑옷을 착용하자마자 체력이 깎여나가는 게 보였다.
“블링크!”
거리가 워낙 짧아서 앞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골렘에게 금방 잡힐 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이언트 골렘 뒤쪽으로 순간 이동한 나는, 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침을 꿀꺽 삼켜 냈다.
쿵…….
앞으로 걸어가던 자이언트 골렘이 그대로 멈춰 섰다.
제발… 제발…….
내 기도가 닿은 건지는 몰라도, 자이언트 골렘은 천천히 내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쿵! 쿵!
“허억… 허억…….”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족히 20층 빌딩 만한 골렘이 돌아다닐 줄이야.
어쨌든 지금까지 계단을 찾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기만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골렘이 있던 곳으로 가면 되는 건가?”
“아니, 아마 저긴 아닐 거야. 저긴 이미 가본 적이 있어서 원래 막혀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거든. 내가 간 이후로 놈이 이동한 거겠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탁탁 털어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넓은 던전을 다시 한번 돌아야 한다는 건가.
단순히 돌아다니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너무 강했다.
쓰러뜨려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
“형씨! 갑옷!”
“아!”
멍하니 있던 나는 발렌의 말에 다급히 갑옷을 벗었다.
체력이 많이 깎이진 않았지만, 까먹고 있었으면 계속 먹힐 뻔했다.
무서운 갑옷이군.
“일단 다시 찾아보는 수밖에 없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숨어서 지내는 쪽은 완벽하게 지형을 익혀 뒀다.
적어도 수색할 범위가 좁아지는 건 내게 반가운 일이었다.
***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금방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망할 자이언트 골렘만 아니었으면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갇혀 있지 않아도 됐는데.
그나마 이제 내려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서 레벨업은 충분히 했으니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형씨, 계단 쪽에 몬스터가 있어.”
“마지막까지 그냥 보내 주지는 않는구만.”
에렌 셀을 뽑아 전투 준비를 했다.
내구도가 아쉽긴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
계단에 앉아 있는 몬스터는 보기만 해도 오싹할 정도의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새까만 비늘로 피부가 덮여 있었고, 얼굴은 도마뱀 같은 느낌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꼬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는 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오셨군요.”
“드디어……?”
놈은 붉은 눈으로 날카롭게 나를 쏘아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자여.”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15층에서 지금까지 싸웠던 몬스터와 이 녀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온몸의 피부가 쭈뼛거리며 위험 신호를 보내왔고, 마른침을 삼켜 냈다.
마치 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는 놈을 보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전투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저는 ‘카룬’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인 몬스터는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중저음의 그의 목소리엔 품격까지 느껴졌다.
“넌… 몬스터 아냐? 헌터인 내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왜지?”
파충류인 그의 얼굴을 봐도 표정을 읽기 힘들었지만, 방금은 분명 웃고 있었다.
“첫째, 당신이 강자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예의를 차리는 겁니다.”
붉은 눈을 번쩍인 그는 내게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둘째, 이제 곧 죽을 당신에 대한 마지막 예의입니다.”
파앙!
카룬이 있던 자리에 크레이터가 생기며 단숨에 나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반사적으로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사용하며 에렌 셀을 옆으로 눕혀 방어 자세를 취했다.
쩌엉-
카룬의 발톱이 에렌 셀을 거칠게 후려치는 순간 내 인상이 구겨졌다.
애초에 에렌 셀의 내구도가 낮은 상태에서 이런 공격을 막아 내는 건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대체 뭐야, 너. 나를 왜 강자라고 부르는 거지? 마치 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하며,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죠.”
“……!”
내 능력을 눈치채고 있다는 것에 흠칫 놀랐다.
젠장,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
언제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저는 당신에게 어떤 악의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과 싸워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자신의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길 반복하고 있는 카룬을 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게 인간이든, 몬스터든, 혹은 어느 쪽도 아니든, 제겐 관계없습니다. 저는 강자와 싸워서 이기는 것만을 원하니까요.”
“다른 건 관심 없고, 널 쓰러뜨리지 않으면 아래로 보내 주진 않겠다는 거군.”
“정답입니다.”
방금 공격이 전력은 아니었겠지만, 할 만한 정도였다.
처음 블랙 퀸에게 당했을 땐 이기는 게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었었다.
그에 비하면 카룬은 싸워볼 만했다.
문제는…….
파앗!
다시 카룬이 내게 달려들어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에렌 셀로 막을 수 없는 지금은 카룬의 공격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제가 봤던 움직임과 다르군요.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시네요.”
“……!”
뒤로 움직이던 도중 카룬의 큼지막한 꼬리가 내 몸을 휘감았다.
어느 틈에!
“전력으로 하지 않으시겠다면, 한 번 죽으시는 것도 나쁘지 않죠.”
카룬이 달려드는 틈에 에렌 셀을 놈의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빠르게 반응한 카룬은 꼬리를 풀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단순히 강자랑 싸우고 싶은 거라면 나랑은 이번 한 번의 싸움이면 충분하잖아. 내가 널 이기든, 네가 날 이기든 그 후로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럴 리가요. 당신은 정말 매력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어도 부활하는 능력! 정말이지 탐나는 능력이죠.”
카룬은 허리춤의 검을 두 자루 뽑아 양손에 들었다.
“당신은 저와 싸우고 죽을 때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겁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성장해서 저와 대등하게 싸울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저는 벌써 그때를 기대하고 있다고요.”
미쳤군.
이 자식도 정상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엄청 짜증나.
기본적으로 내가 진다는 걸 전제로 하고 앞으로 성장할 거라는 거잖아?
에렌 셀 내구도만 아니었으면!
쌔엥!
빠르게 접근한 카룬의 검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싸운 것뿐이지만, 대충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움직임이 빠르고 힘이 강하다.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반씩 섞어 놓은 느낌이라고 할까.
파앗! 팟!
놈의 이도류는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어 왔고, ‘송화’를 써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피하기만 하면 반격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딴 건 알고 있다고!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지만, 아까의 공격으로 에렌 셀의 내구도는 9까지 떨어졌다.
내구도가 남아 있으면 어떻게든 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망가진 검을 다시 원상 복귀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에렌 셀이 단순히 무기로 쓰고 있는 거였다면 이렇게 아끼진 않았을 거다.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검이었으니까.
카앙!
이도류가 동시에 나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고, 에렌 셀을 들어 막아 냈다.
“……!”
“아무래도 검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칫, 눈치챈 건가.
검을 맞댄 상태에서 갑자기 카룬이 입을 쩍 벌렸다.
“……?!”
콰하아악!
카룬의 입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왔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정통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카룬의 두 자루의 검이 내 몸에 박혀 있었다.
“다음 기회에…….”
촤악!
양쪽으로 찢어발기듯 검을 휘둘렀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
크으윽.
불에 몸이 타들어 간 감각과 검에 찢긴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정신을 차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젠장, 갑자기 입에서 불을 뿜어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지금 장소가 어디인지 파악했다.
그 변태 같은 자식은 어차피 계단에서 계속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내가 여기서 내려가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싸우는 중에 이미 방법은 생각해 뒀다.
“그냥 가도 되는 거야?!”
“괜찮아. 어차피 놈이 원하는 건 나니까.”
“그게 문제잖아!”
발렌의 말에도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렌 셀의 내구도도 낮은 지금, 굳이 놈과 싸워 줄 필요가 없다는 거다.
내겐 누구보다 확실한 미끼가 있으니까.
라이프 섀도우.
스킬을 쓰자마자 정말 나와 똑같이 생긴 분신이 생겨났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것 같은 멍한 눈만 빼면 완전히 나와 같았다.
“미안. 처음 만든 분신인데 사지로 보내는 내 마음도 이해해 주렴.”
물론 분신이 대답할 일은 없었다.
“그럼 부탁할게!”
타닷!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똑같이 생긴 분신은 카룬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고작 분신이라곤 하지만, 나와 똑같이 생긴 분신을 대신 죽으라고 보내는 건 썩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분신은 조금씩 계단에서 멀어져서 내가 계단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줬다.
“이 스킬 생각보다 쓸모 있는 거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
5레벨을 찍어서 지속 시간은 2시간이나 되지만, 저대로 카룬과 싸운다면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거다.
어쨌든 나는 아래로 내려갈 수만 있으면 장땡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