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던전 탈출기 (4)
[System : 블루 스톤x1, 거친 뿌리x1 질긴 줄기x1을 획득하였습니다!]
짝짝짝!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류설영이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제법인데?”
“왠지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착각이겠죠?”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쓰지 않고 상대하느라 조금 고전하긴 했지만, 블루 라벨의 몬스터도 라이프 파워만으로 이길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물론 같은 라벨에서도 강함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너, 아직 월하백화식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구나?”
“제 검술을 보면 알 수 있나요?!”
“나는 서진욱 선배가 쓰는 것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이 쓸 때는 너처럼 투박한 느낌이 아니었거든.”
류설영의 지적은 정확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스승님의 자세를 연구하고 공부했지만, 직접 사용하는 건 보는 것과 차이가 컸다.
수많은 몬스터와 싸우며 실전에서도 스승님처럼 검술을 다루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끝까지 배우지도 못했는데 그 정도로 다루는 건 대단하네.”
“…병 주고 약 주는 겁니까?”
“하하하! 미안해. 좋은 의미로는 아직 더 성장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거니까. 혹시 이재문이라는 영감은 아직 살아있어?”
류설영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인물에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SS급 헌터 중 한 사람이자, 현재 화이트 소드의 길드 마스터인 남자.
“네, 얼마 전에 만났어요. 엄청 정정해 보였어요.”
“그 영감이라면 역시 살아 있을 거 같았어. 영혼이라도 팔아서 살아남을 인간이니까.”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류설영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솔직히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 월하백화식을 더 갈고 닦고 싶다면 그 영감을 찾아가 봐. 서진욱 선배가 없다면 이제 그 검술에 대해 아는 건 그 영감뿐일 테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째서 이재문이 월하백화식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으려는 순간, 그가 말을 가로챘다.
“그건 괜찮아?”
류설영이 가리킨 건 아까 식귀에게 물린 옆구리 쪽이었다.
이빨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하마터면 살점이 통째로 뜯길 뻔했다.
“아파서 죽을 것 같긴 한데, 괜찮아요.”
애써 대화 화제를 돌리려는 류설영을 보며 굳이 이재문에 관한 걸 묻지 않기로 했다.
“잠깐 기다려 봐.”
류설영은 허리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 옷을 위로 올리고 초록색으로 된 무언가를 상처 부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으윽!”
“이 정도는 참아! 빨리 아물게 해 주고 덧나는 걸 막아 주는 약초니까.”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던전 한복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고.”
그는 붕대로 감는 것까지 마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서두르자. 식귀 놈들 피 냄새가 퍼지기 시작해서 이젠 몬스터들이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할 거거든.”
“별로 기쁘지 않은 소식이네요.”
류설영의 말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모르는 몬스터였지만, 류설영의 도움으로 사냥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16층이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할 만한데요?”
“숫자가 많긴 하지만, 블루 라벨 이상의 몬스터는 잘 없거든.”
“16층이면 네이비 라벨 몬스터가 우글거릴 줄 알았는데…….”
“원래는 그랬어.”
류설영의 말에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성이 있는 상위 몬스터들은 아래로 내려갔거든.”
“……!”
확실히 아르티아 녀석도 원래 16층에 있다가 내려왔다고 했으니까 류설영의 말이 거짓말은 아닐 거다.
“원래는 몬스터가 이렇게 많지도 않았어. 네가 말한 브루탈의 밤에 게이트에 있던 놈들이 뛰쳐나와서 던전을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그럼 오히려 아래층에 상위 몬스터가 있다는 말이네요?”
“아마 그렇겠지. 놈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야. 위로 올라가면 자신들보다 강한 몬스터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금이야 옆에 류설영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혼자 내려가서 그런 것들이랑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깐, 그럼 왜 여긴 위층에 있는 놈들이 내려오지 않은 거죠?”
“응? 17층에서 내가 처리했거든.”
“처리했다고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르티아랑 블랙 퀸은 못 이겨서 도망치셨다면서요!”
“걔들은 가장 빨리 내려와서 날 도와줄 다른 놈들이 없었거든.”
“도와준다고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인 류설영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17층에 처음 왔을 때 자기들끼리 미친 듯이 싸우더라고. 몰래 지켜보다가 지쳐있을 때 기습했지.”
“…이게 SS급 헌터의 지략이라는 건가.”
“너 일부러 놀리는 거지?!”
물론 나도 놀릴 처지는 못 됐다.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쓰러뜨릴 때 다른 헌터들이 체력을 미리 빼놓았으니까.
심지어 마지막엔 리치왕의 도움까지 받았으니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기기 힘들 정도로 강한 놈들이었거든. 그래서 걱정이야.”
류설영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리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해도,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갑자기 왜 그래요?”
“하하하! 나이를 먹으니까 감성적이게 되더라고.”
그의 말에 괜히 나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나와 이별하면 류설영은 다시 혼자서 이곳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낼지 모른다.
계단 앞까지 도착한 류설영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씨익 웃었다.
“조심해서 가. 조심한다고 될진 모르겠지만.”
“안부랑 약 올리는 것 중에서 하나만 해 주실래요?”
“하하하! 언젠가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 넌 안 죽으니까 나만 살아남으면 볼 수 있는 건가.”
“저보단 아저씨가 걱정이죠.”
여기까지 날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그에게 너무 많은 걸 받은 기분이다.
무엇보다 혼자서 돌아가야 하는 류설영의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SS급 헌터인 그의 실력을 직접 봤으면서 이런 걱정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름 여기 10년이나 있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저씨, 혹시 나중에 여기까지 공략해서 올라온다면 다시 돌아가실 건가요?”
류설영은 내 질문에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던전 완전 공략이 목표야?”
“네? 당연하죠. 이 던전 자체가 없어지면 아무도 불안해하지 않고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언젠가 정답이 모두에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날이 올 거야. 그래도 넌 네가 생각한 정답을 잊으면 안 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돌아가더라도 여기서 날 만났다는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
“네?! 하지만…….”
“혹시라도 날 구조하러 오겠다고 구조대를 꾸려서 피해가 생기면 많이 힘들 것 같거든.”
류설영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깊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꼭 다시 여동생이랑 만나길 바랄게.”
류설영은 다른 SS급 헌터를 처음 만났을 때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전혀 녹슬지 않은 실력이 그를 증명했다.
상위층을 공략하기 위해선 여기서 살아남은 류설영의 힘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언젠가 꼭 다시 그를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그와 짧은 포옹을 뒤로하고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걸음을 돌렸다.
“형씨, 10층까지만 내려가면 그래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면 좋겠지만, 10층에서도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
“아! 그 여자?!”
채하나.
아르티아에게 잡혀갔을 때 10층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아르티아를 쓰러뜨리고 바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17층에서 깨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어쨌든 그녀를 두고 혼자서 밖으로 뛰어내리는 짓은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떨어져서 죽는 끔찍한 경험을 또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10층에 가면 내 잃어버린 화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스승님이 내게 물려준 건 검술과 화도뿐이다.
잃어버린 채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던 10층까지 내려가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왕이면 조금 죽었으면 좋겠는데.”
***
유감스럽게도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라이프를 300개나 소모했다.
스킬을 써서 소모한 라이프도 있다고 해도 셀 수 없이 많이 죽은 건 확실했다.
“이렇게 보면 괜찮은 곳인데 말이지.”
“그러게.”
주변 풍경에 대한 내 감상에 발렌이 맞장구쳐 줬다.
15층에 처음 왔을 땐 내가 10층에 왔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15층은 10층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주변엔 꽃내음이 가득하고 넓은 초원과 산, 그리고 깨끗한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본래 15층도 몬스터가 없던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왔을 땐 몬스터가 우글거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라이프를 300개나 날려 먹지 않았을 텐데.
손에 묻은 피를 하천에 씻어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슬슬 이곳에 적응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다.”
“이젠 웬만한 몬스터는 다 파악했으니까 말이지.”
발렌의 말처럼 일주일 동안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고, 그사이 이곳에서 처음 본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몬스터가 무려 20종도 넘었다.
물론 굳이 내가 놈들과 싸울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이 던전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왜 내려가는 계단이 없냐고!”
15층에 와서 일주일 동안 미친 듯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 헤맸다.
죽어도 어떻게든 내려갈 수 있으면 괜찮지만, 문제는 내려갈 수 없다는 거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몬스터들과 싸워야만 했다.
“소리 지르지 마. 다른 몬스터들 온다고.”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내려가는 계단이 없다고!”
처음 게이트에 갇혔을 때 느꼈던 막막함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곤 생각한다.
어쨌든 아르티아는 16층에서 깨어났는데, 내려온 걸 보면 불가능하진 않다는 거니까.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류설영의 방법을 따라 했다.
큰 나무 아래에 굴을 파서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떨면서 자야 하는 거야?”
“잘 수 있는 것에 감사해.”
“…….”
발렌에게 화낼 기운도 없었다.
오늘도 내려가는 길을 찾기 위해 던전을 내내 방황하며 몬스터와 쉴새 없이 싸웠으니까.
그렇다고 여기 있는 게 끔찍한 것만은 아니었다.
15층에 내려오고 일주일.
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무려 5레벨이나 올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