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던전 탈출기 (3)
뿔을 잃은 탓인지 정신없이 여기저기 들이받는 삼뿔이를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의 목에 에렌 셀을 쑤셔 넣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System : 그린 스톤x1, 구울의 뼈x2 독성액x1을 획득하였습니다!]
[Level Up!]
레벨업?!
시야 아래쪽에 있는 경험치바가 삼뿔이를 잡자마자 쭈욱 올라갔다.
아르티아 토벌에 성공했을 때 경험치를 많이 얻어서 다음 레벨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걸 감안하더라도 그린 라벨을 잡아서 레벨업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위 층이라서 경험치를 많이 주는 건가?
어쩌면 이걸 기회 삼아서 레벨을 많이 올려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승님이라는 건, 네가 월하백화식의 계승자라고?”
당황한 얼굴의 류설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월하백화식은 어쩌다가 배울 수 있는 검술이 아니라고!”
류설영은 충격이 컸는지 입만 뻥긋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너 대체 뭐야?! 그 정도 초월 능력에 월하화백식 계승자인데, 겨우 C급 헌터?!”
“하하…….”
멋쩍게 웃음을 짓자 류설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말대로 승급 시험을 꾸준히 봤다면 A급까지도 갔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제대로 승급 시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그런 걸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 검술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그래서? 서진욱 자식은 잘 지내?”
“…그게…….”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거 같은데, 스승 역할 제대로 못하…….”
내 어두운 표정을 보더니 그는 아까보다 더 당황하며 내게 다가왔다.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움켜쥔 그는 침을 꿀꺽 삼켜 내며 물었다.
“설마… 서진욱도 죽은 거야?”
“…….”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류설영이 스승님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지만, 황망한 표정이 그의 감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나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애써 시선을 아래로 흘렸다.
“그 녀석이… 대체 어째서?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놈이라고! 서진욱이란 놈은!”
“불치병이 있었어요.”
내 어깨에서 손을 뗀 그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인생은 모르는 건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미안, 다리가 풀린 것뿐이야. 잠깐만 쉬었다 가자.”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 아래에 잠시 몸을 기댔다.
“멋대로 말하긴 했지만, 그 형은 내게 좋은 선배였지.”
“형? 선배?”
“그나마 친한 몇 안 되는 헌터 중 한 사람이었거든. 애초에 그 형은 너희 어머니랑 같이 다녔으니까 두 사람이랑 친해졌던 것도 당연하지.”
그랬지.
스승님은 원래 우리 부모님과 알던 사이였으니까.
“사실 만나면 매일 티격태격 싸웠던 게 전부야. 워낙 성격이 달랐거든.”
“하하, 그럴 거 같아요.”
꼼꼼하고 까칠했던 스승님과 헤실헤실 웃으며 매사에 대충인 류설영이 친하게 지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류설영은 스승님을 떠올리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람과 나는 정말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 사람을 N극과 S극으로 나누면 우리 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정도였나요?”
“하하하하! 철없을 때 얘기지. 그래도 난 서진욱이라는 사람을 동경했어. 나는 절대 저 사람처럼 강해질 수 없겠구나, 싶었거든.”
류설영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 역시 엄청난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아저씨도 20대에 SS급 헌터가 되셨잖아요. 그것만으로 이미…….”
“그게 전부였어. 초월 능력과 마력계 능력 덕분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한 가지만 날카롭게 연마한 사람은 이길 수 없었어.”
류설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자, 슬슬 다시 움직여 볼까. 이 앞은 ‘하이드노라’ 놈들 영역이니까 지면을 조심해.”
“알겠어요.”
전에 장수주의 능력이 발현되었을 때도 하이드노라와 싸울 때였다.
땅속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먹잇감이 오면 단숨에 덮치는 몬스터다.
식물답게 지능이라는 게 없어서 어떤 몬스터가 오던 공격하는 게 특징이다.
덕분에 주변에 다른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 거겠지.
“꼭 이쪽으로 가야 하나요?”
“나도 내키진 않지만, 가장 빠른 길이야. 그리고 차라리 하이드노라랑 싸우는 게 나아.”
그건 동감이다.
정체도 모르는 몬스터들이 튀어나와서 싸우는 것에 비하면 큰 문제도 아니다.
그나마 이쪽 지형을 잘 알고 있는 류설영이 앞장서서 앞으로 걸었고, 주변을 경계하며 그의 뒤에 딱 달라붙어 이동했다.
언제 바닥에서 하이드노라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주변에 다른 몬스터 냄새가 강하고 숫자도 많아서 모르겠어.”
기가 죽은 듯한 발렌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친 이후로 나를 도울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서 그런지 전보다 열심히 후각을 쓰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네?”
걸음을 멈춘 류설영이 주변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이드노라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어. 어째서지?”
“하이드노라는 땅의 진동으로 먹잇감을 파악하니까 근처에만 있어도 공격해 왔을 텐데…….”
“설마…! 내 무기들 꺼내 줘!”
다급히 내게 손을 내미는 그를 보고,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바닥에 뿌려 놨다.
“뭐… 뭔데요?!”
“아무래도 여기는 저놈들의 영역이 된 거 같아. 16층에 내려온 지 한 달도 넘었거든.”
류설영의 시선이 머무는 건 정면에 있는 식귀였다.
우리를 발견한 듯 놈은 온몸에 있는 수많은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놈‘들’?”
“자기 몸 정도는 자기가 지키라고.”
부웅-!
그는 자기 상체만 한 도끼를 힘껏 던졌고 조금의 빗나감도 없이 식귀를 반 토막 냈다.
제법 먼 거리였는데 여기서 명중시켰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내 옆에서 사라진 그는 이미 한참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끼에 맞은 식귀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식귀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헤엑!”
“카르륵!”
저놈들 영역이 되었다는 건 이런 뜻이었나.
셀 수 없이 많은 식귀들이 이곳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고 원래 주인이었던 하이드노라까지 먹어 치웠다는 얘기다.
이렇게 많은 수라면 주변에 다른 몬스터가 없는 것도 이해가 됐다.
아찔할 정도로 많긴 했지만, 지금 내 눈엔 놈들이 경험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라이프 파워.
익숙한 감각이 몸에 감돌기 시작했고, 가장 먼저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놈의 입에 검을 쑤셔 넣었다.
“컥… 커컥…….”
뭐… 뭐야!
정확히 에렌 셀이 놈의 입부터 머리를 관통했는데, 다리는 여전히 내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조금 참기 힘들 정도로 역겨운걸.
“이놈들은 본능 덩어리야. 식욕 그 자체거든. 제대로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든 널 먹으려고 달려들 거다.”
“다신 제가 16층에 오는 일이 없길 바라야겠군요.”
촤아악!
그대로 에렌 셀을 아래로 찍어 눌러 놈을 두 동강 냈다.
더블 라이프 파워는 쿨타임도 길고, 또 라이프를 소모해야 하니, 일단은 아껴두기로 했다.
[System : 그린 스톤x1, 질긴 가죽x2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녀석을 잡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지금까지 잡았던 몬스터에 비해 많은 경험치를 준다.
그것도 거의 몇 배 수준으로.
“아무리 다시 살아날 수 있다지만, 기왕이면 살아 줬으면 해!”
쌔엥-!
류설영은 앞에 있는 식귀를 열심히 베어 내며 말했다.
“네가 먹히는 걸 보고 싶진 않거든.”
“저도 먹히고 싶진 않거든요!”
식귀들과 싸우면서 조금씩 류설영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System : 그린 스톤x1, 호르메스의 이빨x1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놈들 이름이 ‘호르메스’인가 본데요?”
“별론데. 식귀가 훨씬 잘 어울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쉬지 않고 전투를 이어 가면서 류설영이 싸우는 걸 볼 수 있었다.
애초에 그 목적으로 이쪽에 온 거다.
그는 그걸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내가 오자마자 바닥에 있는 메이스를 들어 식귀의 머리통을 으깨 버렸다.
“내 실력이 궁금하다면 보여 줄게. 나중에 내려가면 내가 얼마나 멋있는지 얘기하고 다니라고!”
류설영의 눈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누가 뭐래도 사냥꾼의 눈이었다.
파지지직!
그의 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났고, 다가오던 식귀가 단숨에 새까맣게 타 버렸다.
저 정도의 화력이 나오는 건가.
식귀의 수는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많았지만, 내게 덤비는 건 한 두 마리가 전부였다.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류설영의 먹잇감이 되었으니까.
“이게… 전쟁광.”
모든 무기를 숙련자만큼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초월 능력.
전쟁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쉬지 않고 식귀를 죽이고 있었다.
싸움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오싹한 느낌이었다.
류설영은 정말 가져온 무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검으로 베어 내고 도끼를 던지고, 활을 쏘거나 메이스로 후려쳤다.
그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게 신기했다.
도끼를 휘두르고 몸을 돌리며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아 다른 놈을 벤다.
자신의 무기가 어디에 있는지, 몬스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거다.
“자, 이제 너도 보여 줄 차례인 거 같은데? 나만 재롱부리는 건 사양이라고.”
류설영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다가와 붙었다.
그 많던 식귀를 거의 다 정리했고, 몇 마리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저씨는 제 얘기하고 다닐 사람도 없잖아요!”
“오늘 일기에 쓸 거야!”
[Level Up!]
벌써?!
계속 식귀와 싸우느라 경험치가 이만큼이나 올랐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게임에서 경험치 2배 이벤트를 해 주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레벨이 오르고 있다.
레벨이 높아지면서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 양이 많아졌고, 레벨업만으로 강해지기 힘든 시기가 됐다.
하지만 여기에서라면…….
“형씨! 주변에 다른 놈이 있어!”
촤아악!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온 줄기가 내 다리를 묶어 잡아당겼고,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넘어졌다.
“크헥!”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있던 식귀가 달려들어 내 옆구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끄아아악! 물렸어!”
식귀의 목과 발을 묶고 있는 줄기를 동시에 잘라 버렸다.
쿵! 쿵!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온몸이 나무로 이루어진 것 같은 몬스터였다.
정확히는 사람의 모습과 똑같은 나무였다.
덩치가 상당히 큰 것만 빼면.
“트리맨이라는 놈이야! 평소엔 완전히 나무랑 똑같이 뿌리를 내리고 가만히 있지. 그래서 식귀 놈들에게 먹히지 않은 건가.”
“강한 놈인가요?!”
“상대하기 까다로워. 나도 도울게!”
검을 들고 다가오려는 류설영에게 손을 펼쳐 보였다.
“제가 보여 줄 차례라고 하셨잖아요. 보여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