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던전 탈출기 (2)
“으아아악! 아이스 골렘이 왜 이렇게 많아! 계단은 멀었어요?!”
“하하하! 겨우 아이스 골렘 정도로 겁먹다니, 아직 풋내기구나?!”
“옆에서 같이 도망치고 계시면서 할 대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저건 많아도 너무 많잖아요!”
쿵쿵! 쿵! 쿵!
뒤에서 우리를 죽자 살자 쫓아오고 있는 아이스 골렘의 수가 족히 100마리는 되어 보였다.
에렌 셀이 박혀 있던 눈사람을 찾아서 되찾은 것까진 좋은데, 갑자기 눈사람 뒤에서 골렘들이 튀어나오더니 지금 상황이 된 것이다.
워낙 많아서 뛸 때마다 눈 폭풍이 일어나 몇 마리인지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걱정하지 마! 다 왔으니까! 저기다!”
류설영이 손으로 가리킨 곳엔 정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였다.
골렘들에게 짓이겨 죽기 전에 몸을 날려 계단에 들어갔고, 뒤따라오던 아이스 골렘들은 서로 들어오려고 하다 문에 몸이 껴버렸다.
“하아… 하아… 죽을 뻔했다.”
“하하하하! 진짜 위험했네!”
“…스릴을 즐기시나 보네요.”
우리는 잠시 계단에 앉아서 숨을 돌렸다.
아무리 17층이라고 하지만, 아이스 골렘이 저렇게 무더기로 돌아다닐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라는 건가.
그래도 아래로 내려가면 좀 덜하겠지.
“16층은 정글 지형이라고 했죠?”
“맞아. 덕분에 식량도 풍부하고, 필요한 걸 얻기도 쉽지. 몬스터도 풍부하지만.”
“왜 마지막 말은 작게 말씀하시는 거죠?!”
16층이라는 압박은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옆에 류설영이 있다는 건 믿음직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믿음.
예전에 스승님이 옆에 계셨을 때처럼.
던전의 층간 계단은 상상 이상으로 길어서 한참을 내려가야만 했다.
올라가는 게 아니라 다행이군.
“아아, 이걸 다시 올라와야 한다니… 끔찍하네.”
“역시 아저씨도 저랑 같이 그냥 내려가는 게 어때요?”
“미안하지만, 난 별로 죽고 싶지 않거든. 어떻게든 살아서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몬스터들이 밖까지 돌아다닌다며. 내가 보기엔 17층이 더 안전할 것 같은데.”
류설영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7층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고, 나는 던전 밖에서 매일 전쟁 같은 싸움을 계속했으니까.
또각. 또각.
제법 넓은 계단은 우리 둘의 발소리만 울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초월 능력자?”
“…?! 어떻게 아셨어요?!”
“음… 그냥 느낌이 그래.”
역시 이상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예전에 차윤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내가 초월 헌터라는 걸 밝히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SS급은 이 정도가 돼야 할 수 있는 건가.
“그래서? 무슨 능력인데?”
“혹시… 게임 좋아하세요?”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내 초월 능력에 대해 아저씨에게 말해 주었고, 아저씨는 내 능력을 들을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아, 그만 웃으시라니까.”
“미안해. 근데 아, 너무 웃겨서. 초월 능력이 게임 캐릭터야?! 하하하!”
너무 즐겁게 웃는 그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건 부럽네. 어쩌면 헌터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능력 아닐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어쨌든 그런 초월 능력이라면 몇 번 죽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밖으로 나갈 수는 있을 거야.”
류설영의 말처럼 잘 풀리면 좋겠지만,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아까 만났던 아이스 골렘이나 펜리르 정도의 몬스터라면 라이프를 소모하면서 내려갈 수 있겠지만, 잘못하다 아르티아 같은 녀석을 만나면 쉽게 끝나진 않을 거다.
“아저씨, 혹시 16층에서 새까만 갑옷을 입고 있는 몬스터를 만난 적 없으세요?”
“흐음… 기억난다. 얼마 전에 만났었지.”
“정말요?!”
깜짝 놀라며 소리치자, 오히려 류설영이 더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귀청 떨어지겠네. 옆에 검은 뼈로 된 몬스터도 같이 있었던 거 같아.”
블랙 퀸?!
정말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만난 건가?!
“강한 녀석이었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거든. 하하하!”
“죽을 뻔했는데 왜 웃는 거예요!”
“안 죽었으면 됐지! 하하! 운 좋게 전격을 정통으로 맞춰서 못 움직이는 동안 도망쳤어. 너무 강하더라고.”
류설영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르티아와 블랙 퀸은 운 좋게 제압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누가 이렇게 마르고 허름한 차림의 사람이 SS급 헌터라고 생각하겠어.
“너 갑자기 시선이 기분 나쁜데?”
“착각이겠죠.”
16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방금까지 우리를 덮쳤던 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끔찍한 더위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바로 갑옷을 벗고 검은 새의 깃털로 갈아입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르티아를 잡고 나왔던 갑옷도 제대로 확인을 못 했네.
“…….”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옆에서 류설영이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갑옷을 입고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벤토리라는 기능이 있었으면 내 무기 좀 넣어 주면 좋잖아!”
“아…….”
“아?! 아로 끝날 문제냐?! 이 무거운 걸 여기까지 메고 왔는데!”
항상 웃기만 하던 류설영이 이렇게까지 짜증을 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무겁긴 한가 보군.
“워낙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시길래 하나도 안 무거운 줄 알았죠.”
“익숙해서 그렇게 힘든 건 아니지만, 굳이 쓸데없이 힘 뺄 필요는 없잖아.”
“하하하하! 미안해요!”
“내가 웃을 때도 그렇게 재수 없니?”
결국, 허리에 차고 있는 검과 어깨에 멘 활을 빼곤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지금부터는 긴장해야 해. 여기선 말도 안 되는 놈들이 튀어나오거든.”
“이동하기 전에 미리 인사드릴게요.”
“인사?”
류설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뭐야, 갑자기. 어차피 1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진 데려다줄 텐데.”
“그것 때문이에요.”
나는 초월 능력이 있어서 이곳에서 어떤 몬스터를 만나더라도 죽는 것으로 끝난다.
아르티아처럼 내 능력을 파악하고 괴롭히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처음 만난 놈들이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도와준 류설영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진 않았다.
괜히 SS급 헌터가 아니겠지만, 던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만약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절 두고 그냥 돌아가 주세요. 저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저 때문에 아저씨까지 위험해지면…….”
“하여간, 남 걱정하는 건 엄마를 쏙 빼닮았네.”
내 머리에 손을 살짝 올린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희 어머니도 항상 그러셨어. 아무도 안 하는 내 걱정을 혼자 다 하면서 조심하라고 호들갑 떠는 건 일등이셨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머리를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물론 나는 너처럼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순 없지만, 무진장 강하거든. 후배 하나 배웅도 못 해 줄 정도면 여기까지 온다고도 안 했어.”
“아저씨…….”
“그렇게 감동하지 말라고.”
“바지 엉덩이에 구멍 났어요.”
“…….”
***
확실히 정글 지형은 설원 지형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몬스터의 수가 많았다.
특히 이런 곳에 사는 몬스터들은 감각이 날카롭게 발달해 있어서 자칫 실수하면 금방 우리 위치를 들키고 만다.
“저건 무슨 몬스터죠?”
“식귀. 어디까지나 내가 멋대로 만든 이름이지만, 난 그렇게 불러.”
얼핏 보면 커다란 들개처럼 생겼는데, 몸에 달린 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눈이 붙어 있어야 할 곳, 귀가 있어야 할 곳, 그리고 온몸의 곳곳에 셀 수 없이 많은 입이 달려 있었다.
“이름 잘 지으셨네요.”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놈이야. 놈한테 잡히면 뼈까지 씹어 먹힐 테니까 조심해.”
“무서운 말 하지 마세요. 저는 살아나면 다 기억에 남아 있다고요.”
류설영은 잠시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더니 이내 상상했는지 몸서리쳤다.
“너도 고생이 많구나. 자, 이제 어떡한다.”
양옆에는 급류가 흐르고 있어서 지나가려면 식귀가 있는 곳을 밖에 길이 없었다.
아예 빙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럼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른 몬스터를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
“역시 처리하고 가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그러면 편하고 좋겠지만, 여긴 몬스터가 어지간히 많거든. 피 냄새를 맡으면 주변에 다른 놈들이 모여서 발 디딜 곳도 없을걸.”
계단이 가까운 곳이라면 서둘러 처리하고 어떻게든 도망쳤을 거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서 여기서 다른 몬스터들에게 쫓기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다.
“그럼 이걸 쓰죠.”
인벤토리에서 블랙 스네이크의 맹독을 꺼냈다.
아르티아와 싸울 때 거의 다 써서 이제 남은 건 작은 병 하나뿐이었다.
“독?”
“화살에 이걸 묻혀서 쏘면 싸우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확실히 독 냄새 때문에 다른 놈들이 오지 않겠군. 제법인데?”
류설영은 화살촉에 독을 묻히면서 식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다가가느냐인데…. 가까이 갔다가 놈이 냄새라도 맡으면 귀찮아지니까요.”
“그럴 필요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류설영은 담담하게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트드듯.
“설마 여기서……?”
우리와 식귀 사이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심지어 식귀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서 맞히기 어려워 보였다.
파앙-!
독은 방금 쓴 게 전부라서 이게 빗나가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끼에에엑!”
그러나 내 걱정은 바로 사라졌다.
정확히 식귀의 머리에 류설영이 쏜 화살이 명중했으니까.
“이것도 초월 능력인가요?”
“뭐, 그렇지. 내 능력은 그래도 남들에 비하면 수수한 편이라고.”
혹시 다른 몬스터가 소리를 듣거나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올 수 있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움직였다.
“저런 몬스터가 한둘이 아니라는 거죠?”
“넘쳐나지. 지금처럼 싸우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야.”
“아저씨 나중에 다시 돌아가실 수 있겠어요?”
내 걱정에 그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은 네 걱정이나 하라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 생각해.”
“…알겠어요.”
“형씨! 오른쪽에서 온다!”
발렌의 목소리에 류설영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 감이 좋은데?”
타다다닥!
풀숲에서 튀어나온 건 붉은색의 가죽을 가진 무지막지하게 큰 소였다.
소라고 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온몸이 근육 덩어리였고, 머리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뿔이 3개나 달려 있었다.
“삼뿔이야!”
“갑자기 시골에 사는 누렁이 같은 이름이 됐는데요?! 귀찮아서 대충 지은 거죠?!”
“정답. 그렇게 강한 놈은 아니야. 그린 라벨 정도.”
잔뜩 화가 난 듯 콧김을 쉴 새 없이 내뿜는 삼뿔이는 단숨에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류설영이 내 앞을 막아서려는 순간, 내가 그를 지나쳐 삼뿔이를 먼저 공격했다.
제5공식, 화왕.
쌔엥-!
단숨에 뿜어진 에렌 셀이 놈의 뿔 세 개를 모조리 잘라 버렸다.
“…너 그거!”
깜짝 놀란 류설영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진욱 씨, 제 스승님의 검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