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던전 탈출기 (1)
“정말 그 류설영이에요?!”
“남의 이름으로 그렇게 놀라면 당황스럽거든.”
타악!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당연하죠! 당신은 4명의 SS급 헌터 중 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행방불명된 채로 지금까지 본 사람이 없으니까 놀랄 수밖에 없죠!”
“하하하! 그런가?”
류설영에 관한 건 그저 뜬구름 같은 소문밖에 들은 게 없었다.
그는 20대 중반에 SS급 헌터가 돼서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고, 그로 인해서 매스컴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나도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다.
사실 얼굴을 봤다고 해도 지금 얼굴과 매치하는 건 쉽지 않았겠지만.
“어쩌다가 여기에 계신 거예요?”
조금 진정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10년 전에 있었던 브루탈의 밤에 갑자기 모습을 감춘 아저씨가, 어째서 17층에 살림을 차리고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대답하기 어려울 것도 없지. 그때 나는 11층 방어전에 참가했었거든.”
아저씨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어. 싸우고, 죽이고, 또 싸우고….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나 혼자만 남았더라고.”
“그건…….”
“단순한 얘기야. 죽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기 시작했어. 그런 상황에선 도저히 살아갈 희망이 없었지. 그래서 난 싸우는 걸 포기했어.”
그의 말에 흠칫 놀란 나는 문득 게이트에 갇혀 있을 때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일이 떠올랐다.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죽어 보니 그 무엇도 죽는 것보다 괴로운 건 없었다.
“마지막에 펜리르에게 물렸던 걸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는데, 눈 떠보니 여기더라고.”
너무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사실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깨어나니까 죽는 게 덜컥 무서워지더라. 그래서 펜리르 새끼를 죽이고 이곳에 집을 만들었지.”
“하지만… 이렇게 눈만 있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으신 거죠?”
이곳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설원 지형보다 심각했다.
정말 눈밖에 없어서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사막 같은 느낌이었다.
“보기에는 살기 힘들 것 같은데, 덕분에 몬스터도 적고, 눈보라도 없거든. 여기서 조금만 가면 16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16층은 정글 지형이라 먹을 거나 필요한 걸 구하러 내려가곤 해.”
“그렇군요.”
아무리 그래도 10년 동안 던전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이곳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에게서 살아남을 정도로 그가 강했다는 거겠지.
SS급 헌터 정도면 누구나 남들보다 압도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만, 류설영은 그들 중에서도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졌다.
“여기서 나갈 생각은 안 하신 거예요? 아저씨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그래,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목숨이 100개쯤 있었다면 말이야.”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 번만 실수하더라도, 운이 조금만 나빠도 죽어 버릴 텐데 내겐 그럴 용기가 없었거든.”
“…죄송해요.”
“아니야! 그럴 수 있지. 하하하!”
류설영은 호탕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너도 나처럼 여기서 얌전히 늙어 가는 삶을 살래?”
“저는 내려가야 해요. 기다리는 가족이 있거든요.”
“흐음… 가족이라…. 그럼 가야겠네.”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갑옷을 천천히 차려입는 그를 보고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1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는 데려다줄게.”
“네?! 하지만…….”
“괜찮아. 16층은 지형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고, 네가 모르는 몬스터들이 나와도 대처할 수 있어. 16층 아래로는 나도 내려가 보질 않아서 못 가 주는 건 미안하다.”
자신이 혼자 나오는 것도 못하던 그가, 오늘 처음 만난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 주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멍하니 류설영을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서윤하 씨 아들이지?”
“네?! 엄마를 아세요?!”
“하하하! 그때 같이 활동했던 헌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그때 하도 아들 자랑을 해대서 네 이름을 듣고 바로 알았거든.”
예상치 못한 엄마의 이름에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그의 손을 잡았다.
“엄마는 헌터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었나요?! 제 얘기를 많이 하셨나요?”
“…혹시, 서윤하 씨 지금 안 계시는 거야?”
내 반응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눈치채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10년 전 그날 전투 중에 돌아가셨어요.”
“후우… 그랬구나. 그럼 가족이라는 건 여동생인가.”
“율이 얘기도 많이 하셨나요?”
엄마에 대해선 항상 궁금했다.
이렇게 힘든 헌터 일을 하면서 어떻게 우리까지 혼자 키우셨는지, 그때의 엄마에 대해 알고 싶었다.
“말했듯이 그때 활동하던 사람이라면 서윤하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그 많은 헌터의 이름을 대부분 외우고 항상 웃으며 인사를 해 주는 사람이었거든.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차서 주변엔 사람이 모여들었지.”
류설영은 레더 아머를 몸에 걸치며 말을 이어갔다.
“어린 나이에 SS급이 된 나를 주변에선 시기하고 질투하고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했지. 하지만 서윤하 씨는 나를 대할 때도 여느 헌터와 똑같이 그냥 평범한 친구처럼 대해 주셨어. 뭐, 너를 도와주는 건 그때의 서윤하 씨에 대한 보답이랄까.”
“…그렇군요.”
“왜? 어머니 덕에 도움을 받는 거라 불편한 거야?”
그의 물음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런 것도 엄마가 제게 남겨 준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마가 대단했던 사람 같아서요.”
“하하하하! 기특한데? 그때 사진으로 봤을 땐 이렇게 듬직하게 자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지.”
류설영은 흐뭇하게 나를 내려다보다가 옆에 있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 이건?!”
“다행히 녹슬진 않았네.”
그곳엔 장검부터 시작해서 활, 도끼, 메이스, 팔치온까지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무기들을 하나씩 몸에 장착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설마 이걸 다 가져가실 생각이세요?!”
“당연하지. 다 쓸 거니까.”
류설영의 이명을 들은 적이 있다.
‘뇌신’ 그리고 ‘전쟁광’.
류설영이 재능이 있다고 했던 건 그가 두 가지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마력계 능력을 얻어서 전격을 다룰 수 있었고, 그 후에 ‘전쟁광’이라는 초월 능력까지 얻었다.
“초월 능력으로 이걸 다 쓸 수 있는 건가요?”
“오, 잘 알고 있네? 그냥 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엄청나게 잘 다루는 거야.”
그는 정말로 그 무거운 무기들을 온몸에 장착했다.
등에는 메이스와 도끼를, 허리엔 검을, 어깨엔 활을 메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전쟁광이라는 초월 능력은 류설영이 말한 것처럼 어떤 무기든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보다 겉으로 보기엔 말랐는데 대체 어디서 저런 근력이 나오는 거야?
“말했듯이 내가 데려다주는 건 16층 계단까지야. 그 아래론 혼자 가야 해. 괜찮겠어?”
“다른 건 몰라도 죽지 않을 자신은 있거든요. 아저씨가 도와주지 않으셔도 저는 갈 거예요.”
“그러고 보니 던전은 몇 층까지 공략돼 있어? 설마 그때 던전을 전부 빼앗긴 건 아니지?!”
빨리도 물어보네.
“그땐 다행히 아저씨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이 싸워 준 덕분에 밀리지 않았어요. 그 후로는 13층까지 공략했는데, 얼마 전에 다시 브루탈의 밤이 터져서…….”
“그래서 그때 몬스터들이 날뛰었던 거군.”
“지금은 던전 밖까지 몬스터가 점령하고 있어요. 아저씨는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퍼플 라벨 몬스터까지 나타났어요.”
놀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이젠 나랑 별로 상관없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뭐랄까, 소설이나 영화 얘기 같다고 해야 하나.”
류설영은 SS급이 되고 나서 이리저리 치이고만 다니고 떠도는 소문에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었다.
회의감이라던가 사람에 대한 혐오가 생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지금부터 완벽하게 에스코트해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 마지막으로 제대로 싸운 게 언제죠?”
그는 내 질문을 듣고 흠칫하더니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했다.
“미안, 잘 기억이 안 나네! 하하하!”
“전혀 믿음이 안 가거든요!”
이상한 사람이었다.
체격도 작고, 행동이나 말투도 허당인데, 어쩐지 듬직하게 느껴졌다.
류설영은 아까 들어온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기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왜요?”
멈춰 버린 류설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다가가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무기가 껴버렸네! 미안한데 뒤에서 좀 밀어 줄래?”
“아 정말!”
***
밖으로 나오자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나는 빙결의 갑옷을 입고 있어서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지만, 류설영은 얼핏 보기에도 두꺼운 옷이 아니었는데 멀쩡해 보였다.
“춥지 않으세요?”
“음, 오래 지내다 보니까 익숙해졌달까.”
범상치 않은 근력에 추위도 잘 느끼지 않는다니… 대체 어떻게 된 몸이야?
이게 SS급 헌터인가.
“형씨! 온다!”
“뭐?!”
고개를 휙 돌리자, 온통 하얀 눈밭에 회색빛 털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펜리르군.”
“무슨 동네 강아지를 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럼 오랜만에 조련 좀 시켜 볼까.”
류설영은 나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펜리르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무기도 꺼내지 않는 건가.
그에 대한 걱정보단 처음으로 류설영이라는 헌터가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파지직! 파직!
류설영을 중심으로 주변에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펜리르가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왔다.
“크에엑!”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류설영을 덮치려는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전격이 단숨에 펜리르를 집어삼켰다.
섬광이 너무 강해서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콰지지직!
“……!”
빛이 사라진 곳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펜리르가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쓰니까 이상한 느낌이네.”
“…이게 뇌신……?”
“미안한데 그 별명은 조금 오글거려서 안 좋아하거든? 자제해 줄래?”
“네, 뇌신님.”
“…….”
펜리르는 분명 큰 대미지를 입은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기절했을 뿐 멀쩡히 살아있었다.
“죽이지 않는 거예요?”
“무기로 숨통을 끊으면 주변에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놈들이 올 가능성이 있거든. 그리고 놈을 죽일 정도의 전격을 쓰기엔 아까워서 말이야. 우린 갈 길이 머니까.”
확실히 마력계 능력은 정신력 소모가 커서 마음껏 쓸 수 없으니까.
그는 손을 탁탁 털곤 다시 휙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펜리르를 이렇게 가볍게 잡을 수 있을 정도라니… 괜히 SS급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여기서 펜리르는 정말 동네 강아지 정도거든. 기대해.”
“…전혀 기대되질 않는데요.”
“일단 스노우맨에게 박혀 있는 네 검부터 찾으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