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아르티아 토벌전 (5)
푸욱!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르티아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블랙 퀸을 처리한 이후로 아르티아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내게 전혀 미치지 못했다.
“커어억!”
에렌 셀이 꽂힌 곳에서도, 놈의 입에서도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신 만나지 말자.”
라이프 파워의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나도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순 없었다.
[System : 퍼플 스톤x1 칠흑의 묵갑x1을 획득하셨습니다!]
[Level Up!]
상태창이 나오자마자 내 주변에서 바람이 일렁거리더니 단숨에 얼음 폭풍이 나를 집어삼켰다.
“아 쫌!”
잠깐이라도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를 안 주는구만!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리치왕의 마법을 직격으로 맞고 체력이 바닥나서 게임 오버됐다.
뭐, 오히려 잘됐다.
기력과 체력도 깎인 상태였고, 리치왕을 상대하는데 한 번도 안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했으니까.
그보다 아까 긴급회피가 터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
전투하면서 아주 드물게 긴급회피가 발동하는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극적인 타이밍에 발동된 건 처음이었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형씨!”
“아슬아슬했어.”
부활해서 깨어나자마자 라이프 파워의 지속시간이 끝났다.
조금만 늦었으면 또 아르티아를 쓰러뜨릴 기회를 놓칠 뻔했다.
[System : 새로운 스킬 ‘지정 부활’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 퀘스트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을 획득하였습니다!]
[System : Hidden Skill ‘즉시 부활’을 획득하셨습니다!]
“오! 맞다! 퀘스트 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직 리치왕을 쓰러뜨리지 못해서 게이트에서 나가지 못하지만, 잠깐은 승리의 기쁨에 젖어 있어도 되겠지.
[Active - 지정 부활 Lv.1
사망 전에 미리 지정 부활 장소를 정해 두면 다음 사망 시 그 지점에서 부활할 수 있다. 라이프 1개를 소모한다. (수평 범위 반경 1km 이내)
쿨타임 - 5시간, 마나 100소모]
[Active - 즉시 부활 Lv.1
10분의 시간 없이 즉시 부활할 수 있다. 부활 시 5초간 무적 상태가 된다. 라이프 1개를 소모한다. 쿨타임 - 5시간, 마나 소모 없음]
오랜만에 새로운 스킬을 얻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스킬의 내용도 마음에 들었다.
내 초월 능력이 갖고 있던 리스크를 상당히 줄여 주는 스킬들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잘만 쓰면 전략을 짜기도 좋아 보인다.
“형씨 광대뼈 너무 올라갔는데?”
“시끄러워. 그 아르티아를 쓰러뜨렸다고.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 수지가 맞지.”
“리치왕은 보이지도 않나 봐?”
“그럴 리가. 얼른 리치왕도 처리하고 밖으로 나가자!”
***
리치왕을 쓰러뜨리는 건 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두 번이나 쓰러뜨린 적이 있는 보스였고, 처음 게이트에서 만났을 땐 패턴까지 완벽하게 분석하며 싸웠기에 놈의 공격을 피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때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성장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죽지 않고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덜 죽었을 뿐.
“네… 네놈은 분명 몇 번이나 죽였을 텐데…….”
먼지가 되어가는 리치왕이 안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음… 미안하게 됐수다.
[System : 네이비 스톤x1, 마력석x4, 만년빙x1을 획득했습니다!]
[System :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곧 게이트 밖으로 이동됩니다!]
만년빙? 그건 뭐야.
[만년빙
강한 냉기를 뿜어내며 녹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뭐, 이것도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인벤토리를 열었다가 문득 과거에 리치왕을 쓰러뜨리고 얻은 지팡이가 보였다.
내가 지팡이를 쓸 일이 없으니 까먹고 있었네.
나가서 팔던가 해야겠다.
[System : 게이트가 사라지며 밖으로 이동됩니다.]
이내 발아래에 푸른색 마법진과 함께 내 몸이 희미하게 변해갔다.
이제 상쾌한 바깥 공기를 쐴 수 있겠군.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이겼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내 공을 인정받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다른 헌터들이 싸워서 체력을 깎아 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게이트 밖으로 이동되었다.
그러고 보니 4층이었나?
다시 1층까지 내려가려면 고생 좀 하겠군.
“…어라?”
게이트에서 나온 곳은 내가 알던 4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자… 잠깐만! 이게 뭐야!”
주변이 새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곳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다른 게이트로 이동된 건가?
던전 내부가 이런 형태인 층은 들어본 적도 없다.
쿵! 쿵!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주변에 이상한 냄새는 안 나는데?!”
그리고 새하얀 눈밭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눈사람?!
“왜 눈사람이 저렇게 움직이는 건데?! 그보다 무슨 눈사람이 저렇게 커!”
내 쪽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다가오는 눈사람은 말 그대로 컸다.
그냥 크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쿵! 쿵!
“혀… 형씨! 일단 도망치는 게 좋겠어! 이러다 깔려 죽을 거라고!”
“제에엔장!”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미친 듯이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갇혔던 게이트에서 나왔을 때도 13층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다른 게이트와 연결되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전에 봤던 게이트는 두 개의 게이트가 연결된 형태였으니까.
“언제까지 도망치고 있을 순 없어!”
인벤토리에서 빙결의 갑옷을 꺼내서 일단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눈사람이잖아.
다가오는 눈사람을 향해 에렌 셀을 겨누고 오히려 내 쪽에서 달려들었다.
제1공식, 목란.
파악!
눈사람답게 검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
“왜 그래! 형씨?!”
“안 빠져.”
“뭐?”
“검이 안 빠져!”
쿵쿵!
공격에 화가 난 것인지 눈사람이 더욱 빠르게 나를 짓이기려고 뛰어오기 시작했다.
살면서 눈사람이 이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라고!
에렌 셀을 놓아 버린 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봐! 이쪽이야!”
“……!”
바닥에 나 있는 구덩이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온통 하얀 눈밖에 없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다급하게 구덩이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하아… 하아.”
구덩이 안쪽으로 들어오자, 아래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여긴…….”
“일단 따라와.”
사람 한 명이 기어서 이동할 만한 좁은 통로여서 앞에 있는 남자의 엉덩이를 따라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자, 볼품없긴 한데, 내 집이야.”
“지… 집이요?!”
이런 지하에 집이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막상 와 보니 진짜 집처럼 생겨서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벽난로에다가 바닥엔 카펫까지 깔려 있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나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때? 괜찮지? 벽난로는 바깥이랑 연결해 놔서 연기 걱정은 안 해도 돼.”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여긴 대체 어디인가요?”
내 물음에 당황한 그는 멍하니 나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거야?”
“그게…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오니까 여기였거든요.”
“하하하하! 그건 믿기 힘든 얘기네.”
남자는 테이블에 있는 컵에 따듯한 우유를 따라서 내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진짜라고요!”
“미안, 믿기 힘든 얘기라고 했지, 믿지 않는다곤 안 했어.”
그의 부스스한 머리는 직접 잘랐는지 엉망이었고, 수염도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는 족히 4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가죽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이곳에서 산 지 제법 오래된 모양이다.
“뭐, 이곳이 어디냐면…….”
따듯한 우유는 부드럽게 목을 넘어 몸을 데워 주었다.
“던전 17층.”
“푸흐으읍!”
“윽… 남의 집에 우유 뿜지 말아 줄래?”
“죄… 죄송… 그게 아니라! 정말 여기가 17층이에요?!”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한 얼굴로 수건을 가져와 우유를 닦아 냈다.
“유감이지만, 사실이야. 여긴 던전 17층. 온통 눈으로 뒤덮인 곳이지.”
“자… 잠깐!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서 살고 계시는 건데요?!”
아저씨라는 말에 남자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저씨라니… 아직 30대거든?!”
당연히 40대라고 생각했던 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하자면 길지만, 어쩌다 보니 여기서 살고 있네.”
“그렇게 대충 말해도 되는 거예요? 그보다 17층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이런 지형이 있는 걸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아직 17층에 대한 정보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아니, 13층 위로 누가 올라갔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
공략되지 않은 층은 몬스터가 바글거리니까 그걸 무시하고 올라가는 건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도 게이트를 공략하고 여기로 날아온 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이해가 된다.
어쨌든 17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려면 그 많은 몬스터를 뚫고 가야 하니까.
“어떻게 할 거야? 형씨. 10층까지 가지 않으면 뛰어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발렌 말대로다.
어쨌든 던전에서 나가려면 최소 10층까진 내려가야만 한다.
잠깐, 17층?
아르티아가 처음에 16층 게이트에 있었다고 했으니 아래로 내려가면 그런 괴물들이 잔뜩 있는 거 아니야?!
겨우 아르티아를 처리하고 쉬려고 했더니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것을 본 남자는 어쩐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세요?”
“아, 미안 미안. 엄청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는 거라 나도 모르게 들뜨네.”
확실히 그의 차림새는 던전 원주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부터 이해할 수 없다.
“아저씨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세요? 이런 곳에서 혼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죠? 헌터… 신가요?”
헌터가 아니라면 애초에 던전에 들어오지도 못했겠지.
“아저씨 아니라니까! 뭐, 일단은 헌터이긴 한데. 하하…….”
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에 오고 나서 헌터 일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긴 했거든.”
“저는 최현이라고 해요. 아직 C급 헌터지만요.”
“C급 헌터가 혼자서 게이트를 공략하고 다닌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는걸?”
남자는 안경 너머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 나는 ‘류설영’이라고 한다.”
“……!”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형씨? 무슨 일이야? 아는 사람이야?”
알다마다.
“류… 류설영이라고요?”
“오, 내 이름을 알아?”
“모를 수가 없잖아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여전히 믿기 힘든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류설영.
그는 10년 전에 행방불명된 SS급 헌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