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아르티아 토벌전 (4)
“……!”
정신이 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꿀꺽.
다행히 이번엔 아르티아에게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마지막에 봤던 그 자식의 눈은 진심이었다.
일단 여기서 잠깐 숨어 있는 게 좋겠어.
“왜 이렇게 연결이 안 돼?! 여보세요!”
“아, 이신예 씨?”
머릿속에 들린 이신예의 목소리에 급히 대답했다.
“방금까지 죽어 있어서 못 받았어요.”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팔다리 멀쩡한 거지?!”
“음… 네.”
“방금 잠깐 고민한 거 같은데? 그보다 윤지는 다행히 무사해. 아까 잠깐 깨어났다가 지금은 다시 자고 있지만.”
“아! 다행이네요! 읍……!”
이신예의 말에 반색하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다.
깜짝 놀라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주변을 살폈다.
“일단 우린 뒤로 물러났어. 한 번 더 그런 전투가 벌어지면 정말 전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후에도 다른 몬스터가 계속 공격해 와서 연락할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
이신예의 목소리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괜찮아요. 저는 무사하고, 차윤지 씨도 무사하다니까 다행이죠.”
“아까 정신이 들었을 때 윤지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 아무래도 아르티아라는 녀석은 너와 같은 버프형 능력을 쓰는 거 같대.”
“버프형 능력이요?”
“그래. 너랑 싸울 때도 그렇고, 자신이랑 막 싸우기 시작했을 땐 블랙 퀸보다 약하다고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강해졌다고 해.”
버프형 능력.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아니! 그게 아니야.
드디어 아르티아의 비밀이 뭔지 알았어.
“고마워요! 이신예 씨! 일단 저는 무사하니까 금방 돌아갈게요.”
“뭐? 갑자기 왜 고마워?!”
“아무튼, 돌아가면 얘기해 드릴게요.”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꼬여 있던 수수께끼들이 한 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능력을 간파당해서 곤란하던 차에 다행이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
일단 놈들이 미끼를 물 수 있도록 만들어 두면 된다.
처음에 묶어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놨던 오크를 찾아갔다.
그렇게 높은 절벽이 아니었기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로 했다.
“…너한테는 미안하다.”
내내 이용만 하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System : 오렌지 스톤x1, 오크 가죽x1을 획득하셨습니다!]
잠시 자리에 서서 오크의 명복을 빌어 주고, 꾸역꾸역 절벽을 올라왔다.
이렇게 일부러 보스 몬스터에게 가는 길을 만들어 주면 블랙 퀸과 아르티아가 한 곳에 들어가게 만들 수 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당해 버리면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내 능력을 파악한 이상, 지금까지처럼 라이프 룰렛으로 체력을 깎는 건 힘들어졌다.
오히려 내가 당할 가능성이 커졌다.
한 번이라도 깨어나자마자 놈들 손에 붙잡히면 모든 게 다 허사로 돌아간다.
“놈들 냄새가 가까워지고 있어.”
지상에 있던 마지막 몬스터인 오크가 죽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생겼다.
체력이 거의 바닥난 아르티아와 블랙 퀸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든 여기서 나가면 숨어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계단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놈들이 내려가길 기다렸다.
“왔다.”
블랙 퀸의 체력은 여전히 간당간당했기에, 지상에 혼자 남겨 두지 못하겠지.
두 마리가 내려가는 걸 보고 기다렸다가 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씨, 그런데 혼자서 저 두 마리를 상대할 수 있겠어? 아르티아에게도 상대가 안 됐잖아.”
“저 두 녀석은 같이 있으면 오히려 상대할 만하다고 해야 하나.”
“그게 뭔 소리야?”
“가만히 지켜보라고.”
쿠웅!
지하로 내려간 놈들은 바로 보스룸에 들어가 전투를 시작했는지 시끄러운 굉음이 들려왔다.
자, 그럼 나도 파티에 껴 보실까.
“이야, 드디어 이 지겨운 싸움도 끝낼 수 있겠네.”
“…끝까지 방해하는군.”
보스인 리치왕과 전투 중이던 아르티아는 나를 보자마자 살기를 사방에 쏘아댔다.
아직 아까 쓴 버프가 남아 있었고, 이모탈은 쓰지 않았기에 이번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다.
“드디어 널 죽일 수 있는 조건이 완성되었네.”
리치왕에게서 물러난 아르티아가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아까도 그렇게 당해 놓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냐?”
“정답을 알아 버렸거든.”
“시끄럽다! 남김없이 죽여주마!”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리치왕은 관심을 받지 못한 탓인지 잔뜩 화가 나서 마법을 사용했다.
안타깝지만, 나는 이미 리치왕의 패턴을 익힌 상태다.
나와 아르티아, 블랙 퀸의 발아래에서 커다란 얼음송곳이 솟아올랐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고.
파앗!
“……!”
얼음송곳을 옆으로 피하던 블랙 퀸을 향해 힘껏 달려들었다.
당황한 블랙 퀸이 내 검을 막기 위해 날카로운 자신의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카앙-!
공격이 막혀서 큰 대미지는 없었지만, 무너진 자세 탓에 한참을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너희들 ‘능력치를 공유’하고 있지?”
“…….”
“애초에 너희는 다른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개체인 거야. 블랙 퀸과 아르티아. 마치 아르티아가 블랙 퀸을 다루는 척하고 있지만, 그건 들키지 않기 위한 연기였겠지.”
아르티아는 그레이트 소드를 어깨에 걸치고 다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근거도 없는 헛소리였군.”
확실히 이 말에 근거는 없다.
지금까지 정황을 따져 봤을 때 이런 결론을 도출한 것일 뿐, 어떤 확신도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서 싸워 보면 알 수 있겠지.
“내 말이 틀렸다면 둘 다 전력으로 덤벼 봐. 날 죽이고 리치왕을 쓰러뜨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
“…좋다.”
터엉!
바닥을 박차고 달려든 아르티아의 그레이트 소드가 묵직하게 내리꽂혔다.
확실히 여전히 상당한 파괴력이었지만, 아까와 비교하면 한참 약했다.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찍어 누르던 아르티아가 지금은 나와 비등하게 검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이 구도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블랙 퀸은 체력이 낮으니 실수로 리치왕의 마법이라도 맞으면 그대로 죽을 가능성이 크다.
즉, 어쩔 수 없이 블랙 퀸에게 능력치를 남겨 둬야 한다는 것이다.
1 대 2 대 1 구도.
혼자서 싸우면 놈들이 능력치를 한쪽에 몰아줘서 날 압도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다른 헌터들과 싸울 때 블랙 퀸은 갑자기 전투력이 떨어져서 도망치고, 넌 전투력이 올라서 차윤지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어.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둘이서 한 번에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더라고.”
“…….”
“그렇게 많은 수의 헌터가 덤벼 오면 능력을 들킬까 봐 먼저 선수 쳐서 공격해 온 거겠지.”
결과적으로 아르티아의 판단은 옳았다.
나와 차윤지가 다른 헌터들 일행에서 떨어져 있는 사이에 양쪽을 동시에 공략해 왔고, 블랙 퀸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전력의 핵심인 차윤지를 쓰러뜨렸으니까.
“아마도 너희는 기본적으로 가진 능력치와 공유할 수 있는 능력치가 나뉘어 있을 거다. 블랙 퀸에게 능력치를 몰아준 상태에서도 차윤지는 이기지 못했지만, 네가 차윤지를 이긴 걸 보면 개인의 능력치는 네가 블랙 퀸보다 높다는 의미겠지.”
아르티아는 내 검을 밀쳐 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블랙 퀸이 당하면 원래 블랙 퀸이 가진 공유 능력치가 사라지니까 어쩔 수 없이 블랙 퀸을 지켰던 거고. 내 말이 틀렸나?”
“크하하하! 아니, 정답이다. 지금까지 전투로 이만큼이나 알아내다니. 내가 네놈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군.”
“확실히 나는 블랙 퀸에게 능력치만 몰아줘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약하지만, 너희들이 능력치를 지금처럼 나눈 상태라면 충분히 할 만하거든.”
에렌 셀을 아르티아에게 겨누며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종족을 떠나 네놈은 이 아르티아가 인정해 주지. 그 집착, 근성은 내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다. 어차피 여기서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이다. 와라!”
제5공식, 화왕.
파앙!
화왕은 순식간에 검을 상대에게 뿜어내는 발도기였지만, 화도가 아닌 에렌 셀은 너무 커서 원하는 만큼의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아르티아는 화왕을 막아 내고 바로 다시 날 공격해 왔다.
뒤에서 리치왕의 시선을 끌고 있는 블랙 퀸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격만 피하고 있었다.
쩌엉!
아르티아의 검을 받아 내는 순간,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나 보군.”
“네놈을 죽이고 여기서 나갈지, 아니면 이곳이 내 무덤이 될지는 지켜봐야겠지.”
그 말대로다.
뒤에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블랙 퀸에게 속도 능력치를 몰아주고, 아르티아는 힘을 몰아준 거다.
블랙 퀸이 리치왕의 스킬을 피하는 동안 나를 처리할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
저번엔 비참하게 졌지만, 더블 라이프 파워까지 쓰면 나도 능력치가 상당히 높거든.
부웅- 붕!
단순히 힘만 놓고 보면 아르티아가 나보다 월등히 높지만, 저렇게 느린 검은 맞고 싶어도 맞을 수 없거든.
이리저리 아르티아의 검을 피해 다니다가 주변 공기가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
“아 진짜!”
짜증스러운 말을 내뱉고 바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까먹고 있었네.
리치왕은 내 편이 아니라, 결국 이건 삼파전이라는 것을.
아르티아도 이 정도 마법엔 당하지 않는다는 듯이 가볍게 피해냈다.
에렌 셀의 파괴력은 분명 화도보다 강하지만, 꾸준히 화도로 월하화백식을 써왔기에 묘한 이질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정말 즐겁군.”
“…너 지금 죽기 직전이거든?”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아르티아가 내게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위에서 얼음 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카캉! 캉!
얼음 창의 빗속에서 우리는 연신 검을 주고받았다.
전투 사이사이에 얼음 창을 튕겨 내거나 막아 내며 서로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이 자식, 블랙 퀸에게 여유가 생기면 잠깐씩 능력치를 가져와서 단숨에 속도를 올리는 건가.
엄청 까다롭네.
나 역시 아르티아에게 공격당하면 치명상이었기에 움직임이 급격히 변하는 건 상당히 거슬렸다.
파앙!
그때 블랙 퀸 아래에서 얼음송곳이 솟아올랐고, 블랙 퀸이 그걸 피하고자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이건 절호의 기회잖아!
트드듯!
블랙 퀸을 향해 라이프 룰렛을 발동 시켜 활시위를 당기는 걸 보고 아르티아가 다급히 내게 검을 휘둘렀다.
파앙-!
시위를 놓는 것과 동시에 아르티아의 검이 내게 꽂혔다.
[System : Passive – 긴급회피 Lv.1이 발동했습니다!]
마치 내 몸이 기괴하게 꺾이는 것처럼 아르티아의 검을 피해 옆으로 움직였다.
“……!”
“뭐?!”
공중에선 내 스킬을 피할 수 없었고, 정확히 라이프 룰렛이 명중한 블랙 퀸이 바닥에 떨어졌다.
[System : 퍼플 스톤x1 검은 심장x1을 획득하셨습니다!]
“아… 안 돼! 안 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