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아르티아 토벌전 (2)
던전 주변은 항상 몬스터로 우글거려야 하는데, 지금은 주변이 조용했다.
아마도 아까 전투의 여파겠지.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를 사냥했고, 블랙 퀸과의 전투 때도 쉬지 않고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했다고 했다.
몬스터의 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거겠지.
“어때? 찾을 수 있겠어?”
“다른 몬스터들 냄새가 너무 강해서 찾긴 힘들겠는데.”
역시 이렇게 찾는 건 무리겠지.
무작정 던전 쪽으로 왔지만, 놈들이 던전 안에 있다는 보장도 없다.
대미지를 입은 상태라면 굳이 지금 나를 찾아오진 않을 거다.
“호오, 나를 따라온 건가? 용기가 가상하군.”
순간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뒤로 물러났다.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팔짱을 끼고 조금 떨어진 건물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아르티아의 체력바는 반이나 깎인 상태였다.
차윤지는 혼자서 이만큼이나 싸운 건가.
“…불사의 비밀을 알려 주지.”
“재밌군. 갑자기 무슨 바람이라도 분 거지?”
“따라와.”
아르티아는 나와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왔다.
“그렇게 다친 상태로 숨지 않고 나오다니, 너야말로 용기가 가상한 거 아니야?”
“하하하하!”
아르티아가 너무나 시원하게 웃어서 내가 머쓱할 정도였다.
“네놈 같은 약자에게 겁내서 도망쳤어야 했다는 것이냐? 하하하! 재밌는 농담이군.”
“…….”
노골적으로 나를 비웃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체력이 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도 내가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마 근처에서 블랙 퀸도 따라오고 있겠지.
“뭐, 좋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만약 날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이번엔 직접 고문을 해 주지. 마지막 기회다. 영원한 고문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헛된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그런 거 아니야. 차윤지가 쓰러진 걸 보고 마음이 변했을 뿐이다.”
아르티아는 좀 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그 인간 말인가? 확실히 인간치곤 강하더군. 처음 네놈과의 전투를 관찰한 것뿐인데 나를 상대로 그만큼이나 할 줄 몰랐거든.”
“…어째서 죽이지 않은 거지?”
내 질문이 의외였다는 듯 아르티아는 따라오던 걸음을 멈췄다.
“마치 내가 죽였어야 하는 게 맞는다는 듯이 말하는군. 내 입장에서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니지.”
그는 망가진 어깨 쪽 갑옷에 손을 가져가며 말을 이어갔다.
“절망을 보여 주고 싶어서다.”
절망… 아르티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런지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처음 내가 블랙 퀸을 만났을 때 느꼈던 건 절망 그 자체였으니까.
“마지막에 내게 쓰러질 때까지도 그 인간의 눈은 살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나를 죽일 방법을 찾고 있는 것처럼. 다 죽어 가는 인간의 눈이 아니었지. 그래서 죽이지 않았다. 언젠가 절망에 물든 눈을 할 때까지 살려 둘 생각이다.”
차윤지를 상대로 이렇게 거만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만큼 아르티아가 강자이기에 가능한 말이겠지.
“네가 불사의 능력을 준다면 그 절망을 빨리 볼 수도 있겠군.”
물론 내가 초월 능력을 얻는 법을 알고 있을 리 없다.
아르티아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공간의 제약이 필요하다.
어떻게든 아르티아를 몰아붙인다고 해도 놈이 순간 이동으로 도망치면 내겐 쫓을 수단이 없으니까.
“내가 능력을 얻은 건 게이트 안이야.”
“게이트?”
아르티아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노골적으로 나를 의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긴 나라도 방금까지 싸우던 놈이 그런 말을 하면 믿지 않았겠지.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난 게이트에 갇힌 적이 있거든. 그곳에서 죽지 않는 능력을 얻을 수 있었지.”
“…흥미롭군.”
“솔직히 그 게이트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법 외엔 몰라.”
아르티아는 잠시 자신의 턱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군. 좋아, 믿어 보지.”
지금까지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아르티아는 앞장서서 던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원래 헌터 협회에서 쓰고 있던 1층은 내 기억에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고, 사방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겨 왔다.
주변에 몬스터가 많다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어떤 몬스터도 우리에게 덤벼오지 않았다.
“재밌지 않나? 지성이 없는 몬스터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다. 내게 덤비면 죽는다는 것을. 이런 힘을 네게도 줄 수 있다.”
“…….”
“아무래도 아까 그 인간을 상당히 믿고 있었던 모양이군.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무너지면 믿고 있던 사람도 무너지기 마련이지.”
아르티아는 가까운 게이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갇혀 있던 게이트에서 나왔을 때 이미 그 게이트는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내가 들어간 게이트는 공략해서 없어졌지만, 똑같이 생긴 게이트를 다시 들어간 적이 있거든.”
이 역시 사실이다.
2층 게이트에 갇혀 있다가 13층에서 나와 차윤지 일행을 만났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갇힌 게이트와 똑같은 게이트에 다시 들어갔었다.
가만히 내 눈을 노려보던 아르티아가 천천히 게이트로 시선을 옮겼다.
“거짓말이 아니군. 그럼 지금부터 게이트를 하나씩 찾아보도록 하지.”
아르티아와 싸우기 위해선 출구가 없는 게이트가 필요하다.
그때 들어갔던 게이트와 똑같은 게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아르티아를 이기기 위해선 여기에 거는 수밖에 없다.
***
아르티아는 나를 게이트 안에 먼저 집어넣고, 따라 들어왔다.
나올 수 없는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내가 혼자 밖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수를 쓰는 거겠지.
4층까지 우린 수도 없이 많은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했고, 그동안 어떤 몬스터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들어가라.”
“…….”
아르티아의 말에 다음 게이트로 발을 옮겼다.
“형씨!”
“드디어… 찾았어!”
이내 뒤에서 아르티아가 들어왔고, 들어온 입구가 없는 걸 보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드디어 찾은 건가! 이곳이 날 불사로 만들어 줄 성역이로군!”
게이트에서 나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내게 이곳은 너무나 친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익숙하고 그리웠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지만.
“자, 그럼 링 위에 올라왔으니 이제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것만 남았네.”
“…나를 속인 건가?”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은 안 했거든.”
아르티아의 주변에 살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차윤지가 쓰러져서 죽어가고 있는 걸 보며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과거에 그토록 무력하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나 아르티아는 반드시 약속은 지킨다. 지금부터 네놈에게 지옥을 보여 주지.”
“아, 하나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나는 불사의 능력이 아니거든. 단지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에렌 셀로 내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다.
끔찍한 고통이 이렇게 반가운 건 내가 점점 미쳐 간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아르티아를 죽이기 위해선 내가 미치지 않고선 불가능하거든.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10분이 지나고 정신이 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르티아를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곳에서 아르티아가 나가지 못하게 만들려면 이 게이트를 공략할 수 없도록 손을 써야 한다.
“발렌, 주변에 오크가 있는 곳을 찾아 줘.”
아르티아가 들어오고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으니 블랙 퀸도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둘이 날 찾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야.
“형씨 기준으로 정면에 오크 냄새가 나. 가까워.”
“오케이!”
발렌의 말대로 앞으로 달려가자 오크 한 마리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줘야겠다.”
“크에에엑!”
나를 발견하자마자 걸쭉한 침을 뚝뚝 떨어뜨린 오크는 미친 듯이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크는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지만, 지금은 내게 필요한 존재였다.
따라오는 오크를 뒤로하고 다른 쪽으로 달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르티아와 싸우기 위해선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출구가 없는 이 게이트로 놈을 데리고 들어올 것.
둘째, 놈이 게이트를 공략할 수 없게 할 것.
셋째, 혹시라도 붙잡힐 수 있으니 혼자 죽는 방법을 만들어 둘 것.
처음 조건은 성공했고, 이제 곧 두 번째 조건도 완성할 수 있다.
“크에에엑!”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쫓아오는 오크를 보고 발렌이 말했다.
“동족이지만, 참 정이 안 간단 말이지.”
“푸흡!”
아마 이번에도 길고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할 수 있어.
2년 가까이 이 게이트에 갇혀 있었던 덕분에 게이트의 지형은 완벽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게이트의 끝쪽에 있는 절벽 아래는 깊은 구덩이처럼 생겼다.
원래는 평범한 절벽이지만, 뒤쪽이 게이트의 끝이라 절벽을 올라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쿠웩!”
달려드는 오크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고, 놈의 목덜미를 손날로 쳐서 기절시켰다.
인벤토리에 있는 레이스의 천 가죽을 꺼내 정성스럽게 오크의 양손을 묶어 놨다.
“아무리 오크라고 해도 레이스 천 가죽은 못 찢겠지.”
레이스는 오크보다 훨씬 상위 몬스터였다.
그렇게 오크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은 뒤 입에 재갈까지 물려 절벽 아래로 굴려 떨어뜨렸다.
“가끔 보면 형씨는 정말 인정머리 없다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크니까 이 정도 굴러떨어진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겠지.
이제 아르티아는 이 오크를 찾을 때까진 게이트에서 나갈 수 없다.
두 번째 조건까지 완성된 것이다.
“자, 이제 아르티아를 괴롭히러 가 볼까.”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아르티아의 체력을 주시했다.
아르티아는 스스로 자신에게 회복 능력을 쓸 수 있는 듯했다.
잠깐씩 쉴 때마다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체력 수치가 높은 건지, 회복 능력이 약한 건지 속도는 아주 느렸다.
어쨌든 그건 내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형씨 그건 설마?!”
인벤토리에서 꺼낸 액체를 에렌 셀에 발랐다.
발렌은 이게 뭔지 알고 있는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말 그걸 쓸 생각이야? 형씨가 생각한 것보다 괴로울 거라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나는 지금 버프 스킬도 쿨타임이고, 심지어 아르티아와 블랙 퀸, 둘을 상대해야 해.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이길 수 없다고.”
누구보다 잘 죽을 자신은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