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아르티아 토벌전 (1)
발렌이 아르티아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공중에서 버둥거리는 걸 보고 내심 안도했다.
10층에 계속 갇혀 있는 형태였다면 발렌을 구하러 가는 건 쉽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직접 데리고 나와 준다면 오히려 고맙지.
“오크가… 말을?”
옆에 있던 차윤지가 발렌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말하는 오크는 처음 봤을 테니까.
외부 게이트 때 발렌을 본 건 이신예와 이민하뿐이었다.
“간혹 있지, 이런 돌연변이 몬스터들이. 그런데 나는 오크가 말을 한다는 것보다 네놈의 부하라는 점이 더 흥미롭군.”
“……?!”
흠칫 놀란 차윤지가 고개를 내 쪽으로 휙 돌렸다.
“설마하니 그곳에서 몬스터에게 도움을 받아서 나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내 호기심을 이 정도로 자극할 줄이야. 크크크큭.”
손으로 투구 입 쪽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더니, 한순간 뚝 멈췄다.
“넌 대체 뭐지?”
철컥, 철컥.
아르티아가 움직일 때마다 온몸을 덮고 있는 갑옷이 묵직한 소리를 내뱉었다.
한 걸음씩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그가 물었다.
“죽지 않는 불사의 능력,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능력, 그리고 몬스터를 조종하는 능력까지…. 감히 인간 따위가 그런 힘을 어떻게 얻은 거냐.”
철컥, 철컥.
내게로 다가오는 그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보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은 거냐!”
파앙!
바닥을 박차고 튕겨 나오듯 아르티아가 내게 달려들었다.
예상 밖의 움직임이었지만, 이건 기회다.
나 역시 에렌 셀을 들고 아르티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현!”
당황한 차윤지의 목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지금은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아르티아는 한 손엔 여전히 발렌의 목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나보다 커다란 대검을 꺼내 들었다.
부웅-!
확실히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
에렌 셀로 놈의 검을 막는 척하며 ‘제6수식, 송화’로 단숨에 몸의 궤도를 바꿨다.
아르티아의 검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고, 나는 펫 스테이터스창을 열어 소환 해제를 눌렀다.
파앗!
아르티아에게 목덜미가 잡혀 있던 발렌은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고, 아르티아는 번쩍이는 빛에 나와 거리를 벌렸다.
“이 자식… 무슨 짓을 한 거냐.”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지금까지 아르티아가 기습을 했을 땐 다가왔다는 걸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였다.
아마 이동 마법을 쓰는 거던가, 나보다 아득히 빠른 거겠지.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내게 보여 주듯 천천히 다가왔다.
발렌을 한 손에 쥐고 내 움직임을 관찰할 속셈이었다.
“형씨, 생각보다 머리도 쓰는구나.”
“생각보다라는 말은 빼 주지?”
간만에 머릿속에 들려오는 발렌의 목소리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아마 아르티아는 계속 내 움직임이 바뀌는 걸 이상하게 느꼈을 것이다.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 그리고 채하나의 버프까지.
지금 내 능력치와 그때의 능력치는 가히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니 의심스러웠던 거겠지.
“흥미롭군. 이동 능력인가.”
물론 내게 그런 신기한 능력이 있을 리 없다.
만약 있었다면 10층에서 그런 식으로 끔찍한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아르티아가 이렇게 믿도록 만들어 두면 나쁠 건 없다.
최대한 아르티아가 경계할 만한 것들을 보여 주는 거다.
아르티아는 이제 내 이동 능력에 무언가 제약이 있고, 10층에 갇혔을 땐 그 제약 때문에 도망치지 못했다고 생각하겠지.
자, 없는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라고.
“재밌군, 정말 재밌어. 그만한 고문을 당했는데도 정신이 멀쩡한 것도 신기하군.”
아르티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 눈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그런 고문을 해 놓고 멀쩡하다고 말하는 건 너무한데.”
“흥, 네놈의 눈은 오히려 그때보다 생기가 도는군.”
그런 고통을 처음 겪었다면 아마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몇천 번을 죽었던 사람이다.
살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경험해야만 했다.
여전히 죽음에 가까운 고통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지만, 굳이 따지자면 난 경력자니까.
“정말이지 아쉽군. 네놈과 내가 손을 잡는다면 이 세계는 더욱 즐거워질 텐데 말이야.”
“손잡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다한증이 있어서 말이야.”
카앙-!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아르티아가 내 앞에서 튀어나와 검을 휘둘렀다.
젠장, 여전히 모르겠어.
순간 이동 같은 건지, 아니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건가.
“당당한 태도는 저 인간에 대한 믿음인가.”
“…….”
아르티아의 눈이 차윤지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우리 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라곤 못 하겠다.
솔직히 지금 그녀가 옆에 있어서 누구보다 든든하거든.
“내 말 들려?!”
“이신예 씨?!”
발렌이 말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직접 이신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통신 능력이다.
“윤지에게 상황 전달받았어. 아쉽지만, 우리 쪽은 블랙 퀸과 몬스터들의 기습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어.”
아르티아 자식, 지원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둔 건가.
“알겠습니다. 최대한 버텨 볼게요.”
“부탁할게! 그리고 윤지로부터 전언이야.”
“네?”
“전력으로 죽어 달래.”
하…….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아르티아와 검을 맞댄 채로 웃음을 짓자, 그의 살기가 더욱 강해졌다.
“즐거운가 보군. 더 즐겁게 만들어 주마!”
아르티아가 다시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모든 버프를 사용했다.
“잔뜩 기대하고 있다고!”
***
“커헉!”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숨을 토해 내며 정신을 차렸다.
하아… 이 정도면 나로선 최선을 다한 거라고.
아르티아의 검에 몸이 반으로 잘린 기억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전력으로 죽어 달라.’
그 말을 들은 순간, 차윤지가 뭘 원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린 아르티아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고, 그 상태로 전투를 벌이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채하나의 버프가 없을 땐 블랙 퀸조차 상대할 수 없는 나였기에, 차윤지는 나를 희생말로 쓴 것이다.
“이럴 땐 정말 가차 없다니까.”
즉, 나는 아르티아와 싸울 수 있게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당연하게도 블랙 퀸에게도 털리던 내가 아르티아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차윤지를 의식해서 전력으로 덤비지 않은 건진 모르겠지만, 아르티아의 전투 능력은 블랙 퀸 아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투 능력’만 놓고 봤을 때 얘기다.
아르티아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이동 능력을 쓸 수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거리와 쿨타임의 제약이 있는 것 같다.
바닥에 누워 있던 나는 몸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합류하러 가 볼까.”
던전 내부에선 확실한 부활 거리가 정해져 있지만, 던전 밖에선 아직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사망 지점부터 대략 1km 정도.
전보다 민첩 능력치가 높아서 금방 합류할 수 있다.
“너 지금 어디야?!”
“아, 방금 막 부활해서 돌아가려고…….”
이신예의 말에 대답하던 중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덮쳐오듯 엄습하는 불안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쪽 상황은 어떤가요?”
“윤지가… 윤지가!”
울먹거리는 이신예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시 전장까지 왔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안 돼’라는 말만 끝없이 되뇌며 미친 듯이 뛰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아까 아르티아와 싸웠던 곳에 와있었다.
“허억… 헉…….”
“…….”
다른 사람들도 상처를 입었지만, 바닥에 누워 있는 차윤지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그녀 주변에 붉은 피가 잔뜩 흘러 있었다.
아르티아와 블랙 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신예는 차윤지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치료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블랙 퀸에게 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윤지가…….”
유지한 아저씨의 말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차윤지가 혼자서 아르티아와 싸우고 있는 동안 겨우 블랙 퀸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 했냐고 따지고 싶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무거운 말들을 애써 삼켜 내며 그 대신 한숨을 토해 냈다.
“상태는 어떤가요?”
“모르겠어. 부상이 너무 심해. 다친 상태로 계속 싸우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져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아직은 괜찮다고 말하기 힘들어.”
차윤지를 치료하는 이신예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나마 부상이 덜한 신아람의 옷깃을 잡고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군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블랙 퀸과의 전황은 어땠나요?”
“다수로 덤빈 것치곤 부끄럽지만, 비등했던 정도야. 조금 변명을 해 보자면 주변에 다른 몬스터가 너무 많았거든.”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오히려 S급 헌터들이 이만큼이나 모였었기에 블랙 퀸을 붙잡아 둘 수 있었던 거였겠지.
“블랙 퀸을 몰아붙이는 것까지 성공했던 건가요?”
신아람은 아까의 전투를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잘 모르겠어. 우리가 블랙 퀸을 이겼다기보단, 블랙 퀸이 갑자기 약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말이죠?”
“처음엔 블랙 퀸의 공격을 막아 내기 급급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블랙 퀸의 움직임이 둔해졌어. 파괴력도 약해지고.”
직접 보지 않아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내가 겪었던 블랙 퀸은 아찔할 정도로 강했으니까.
“그 후로 우리가 블랙 퀸을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블랙 퀸은 아르티아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어. 우리가 왔을 때 차윤지는 이미…….”
신아람은 분하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예전이었다면 차윤지가 위험한 이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마음의 동요도 없었다.
이미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까.
“저는 놈들을 쫓아갈게요.”
“뭐?!”
신아람은 내 말에 깜짝 놀라서 잠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미친 거 아니야?! 차윤지도 혼자서 이기지 못한 상대야! 네가 혼자 가서 뭘 어쩌려고!”
“블랙 퀸은 다른 분들이랑 싸워서 대미지가 쌓인 상태죠? 아르티아도 차윤지와 싸웠으니 무사하진 않을 거예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이런 고집불통이 들어온 건지.”
“그래도 저는 레이브 길드 소속이니까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그것참 대견하네. 어차피 말리더라도 안 들을 거였잖아.”
신아람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아까와는 다른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길드 마스터로서 명령이야. 먼저 가서 아르티아와 블랙 퀸의 위치를 파악해.”
“…알겠습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우리가 갈 때까지 무사히 있어야 해.”
이런 와중에도 나를 신경 써 주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휙 돌아섰다.
어쩌면 이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