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납치당한 헌터 (2)
“발렌!”
정신을 차리자마자 발렌의 이름을 외치며 일어났고, 죽기 직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를 반겼다.
꽃내음이 가득하고 주변에 상쾌한 바람이 나를 감쌌다.
황급히 펫 스테이터스창을 열었다.
[발렌 Lv.42
체력 6000/6000 마나 50/50 기력 25/30
힘-60 민첩-38 지능-28]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발렌의 체력은 그대로다.
일단 발렌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어째서인지 발렌의 소환 해제가 되지 않았다.
거리가 먼 탓인가.
부활하는 데 10분이 걸리니까 지금은 소환 해제가 가능해야 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 나는, 바로 옆에 바깥과 연결된 창문이 보였다.
지금 이대로 여기서 떨어지면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럼 발렌을 버려두고 가야 한다.
창문 바로 옆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건물들이 까마득히 작아 보였다.
발렌은 목숨을 걸고 나를 밖으로 보내 줬는데, 그냥 두고 가는 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가서 무사히 발렌을 회수하고 도망칠 수 있다면 최선이다.
하지만 만약 다시 잡힌다면?
이번엔 도망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좋아!”
발렌도 스스로 각오를 다지고 한 일이야.
여기서 내가 돌아가면 발렌은 분명 실망할 거다.
지금은 그를 믿는 수밖에.
후우웅!
창문에 서자 거센 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꿀꺽.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죽은 적은 없었기에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후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최대한 빨리 발렌이랑 채하나를 구하러 돌아와야 해.
나는 그렇게 던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쿠웅!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
“으아악!”
떨어지던 감각이 남아 있어서 눈을 뜨자마자 괴성과 함께 일어났다.
옆에 있던 신아람이 깜짝 놀라 나와 동시에 일어났다.
“저… 정신이 들었어?! 너 괜찮은 거야?!”
“아 신아람 씨?!”
“내가 누군지 기억하는구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 어깨를 잡고 미친 듯이 흔드는 신아람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기는……?”
“특수 임무팀 임시 기지라고 해야 하나.”
신아람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자, 커다란 텐트 같은 느낌이었다.
“특수 임무팀이요?”
“그래, 널 데려갔던 블랙 퀸을 토벌하기 위한 팀.”
펄럭.
그때 텐트의 입구를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차윤지 씨?!”
“일어났구나.”
나를 보고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내 간이침대 쪽으로 다가온 차윤지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네?!”
“그때 널 데려가는 블랙 퀸을 막지 못했어. 미안.”
그녀의 붉은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말은 차윤지에게 듣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비참해? 어째서?”
“지금 차윤지 씨가 당연히 저를 지켜야 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그건 차윤지 씨 잘못이 아니었어요. 바보같이 몬스터에게 납치나 당했던 나약한 제 문제죠.”
차윤지는 내 말을 듣고도 여전히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구나. 비참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가 널 지켜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던 건 아니야.”
“그럼 어째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때 블랙 퀸을 상대하는 게 내 일이었어. 내가 블랙 퀸을 놓쳐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그녀는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 넌 나약하지 않아. 널 한 사람의 동료로 인정하고 있어.”
차윤지는 미련 없이 돌아서 텐트 밖으로 나갔고, 신아람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내 앞에서 사랑싸움은 참아 주라.”
“무… 무슨 사랑싸움이에요?! 그보다 차윤지 씨도 블랙 퀸 토벌 작전에 참여하신 거예요?”
신아람은 그녀가 나간 문 쪽을 보며 끄덕였다.
“S급 이상 헌터 중에서 손이 남는 사람은 모두 선발됐거든. 그런 괴물이 돌아다니고 있으면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제한되니까.”
확실히 블랙 퀸은 최소 SS급 헌터가 아니라면 혼자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녀석이다.
나도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쓰고, 채하나의 버프까지 받아야만 겨우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놈들에게 끌려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나는 침착하게 그때 블랙 퀸에게 납치된 후에 있었던 일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아에 관한 것, 10층에서 채하나를 만난 것, 그리고 발렌 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것까지 모두 얘기했다.
“뭐?! 오크가 펫이라고?!”
“놀라실 만도 하죠. 이해해요.”
“보통 귀엽고 깜찍한 애들을 펫으로 데리고 다니잖아! 왜 하필 오크야!”
“거기서 놀라는 거였어요?!”
멋쩍게 웃은 신아람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인제 와서 그런 거에 놀라기엔 네 능력이 너무 특이해서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된 거구나.”
“그런데 블랙 퀸이 나타나지 않으면 계속 여기서 기다릴 생각인가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네 말을 듣고 나니 시간이 없는 것 같네. 발렌이라는 네 친구를 구하자고 말은 못 하겠지만, 그곳에 다른 헌터가 남아 있다면 충분히 위쪽에 전달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에 반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도 내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일단 쉬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신아람은 텐트 밖으로 나갔고, 나는 다시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펫 스테이터스창을 보면 여전히 발렌의 체력은 그대로다.
발렌만 무사하면 돼.
다른 헌터들이 도와준다면 정말 블랙 퀸을 토벌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문제는 아르티아.
아직 어느 정도로 강한 몬스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전력으로 놈과 붙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쉬시는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하… 하루 씨?”
“오랜만이네요.”
빙긋 미소를 지은 그녀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간이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서 자리를 내주었다.
“하루 씨가 왜 여기에……?!”
“어쩌다 보니 특수 임무팀의 팀장을 맡게 되었거든요.”
헌터는 기본적으로 성인만 가능하다.
이제 19살이 된 하루가 팀장이라니…….
심지어 그녀는 과거에 미성년자인데도 헌터 활동을 해서 그 벌로 21살부터 헌터 활동이 가능해진다고 들었다.
“뭐, 그렇게 됐어. 그만큼 전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지. 하루 녀석이 이번 일에 적격자기도 하고.”
뒤에서 따라 들어온 건 유지한 아저씨였다.
노골적으로 하루가 여기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계셨다.
하루를 딸처럼 아끼는 사람이니까 당연한 건가.
“아르티아라는 몬스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전부 말해 주세요.”
“벌써 신아람 씨에게 듣고 오신 건가요?”
“아르티아에 관한 것만 듣고 바로 들어왔어요. 다른 건 다른 사람들이 들어 주겠죠.”
정말 이 사람을 팀장으로 맡겨도 되는 거냐?
“새까만 갑옷을 두르고 있어요. 데스나이트가 입고 있는 갑옷보다 중갑에 가까워요. 머리엔 블랙 퀸처럼 왕관을 쓰고 있고요.”
“블랙 퀸이 모신다는 건 블랙 퀸보다 강한 몬스터라는 걸까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직접 싸우는 걸 본 적은 없거든요.”
대부분 전투를 할 땐 블랙 퀸이 하고, 아르티아는 전투 중간에 끼어든 게 전부였다.
“그럼 블랙 퀸이 아르티아라는 몬스터보다 오히려 강할 가능성도 있다는 거군요.”
“가능성만 놓고 본다면 없진 않지만, 제가 느꼈던 건 보통이 아니었어요. 아마, 블랙 퀸보다 상위 몬스터일 가능성이 커요.”
하루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무언가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내게 물어왔다.
“아르티아의 전투 스타일이라던가,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다면 전부 말해 주세요.”
“사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아르티아는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왔는데 그게 마법으로 순간이동을 한 건지, 제가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접근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실제로 본 건 마법으로 쇠사슬을 만들어서 저를 속박한 것 정도네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모두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텐트에서 나가려는 하루를 보고 황급히 붙잡았다.
“잠시만요! 저는 그럼 이제 무엇을 하면 되나요?”
“우리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해요. 놈들이 노리고 있는 건 최현 씨. 최현 씨를 미끼로 아르티아와 블랙 퀸을 끌어들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전투에서 실패하면 최현 씨는 단순히 죽는 거로 끝나지 않아요.”
하루 말대로다.
다른 S급 헌터들과 차윤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르티아의 전력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저번처럼 놈들이 나만 노리고 기습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때 겪었던 끔찍한 고문을 다시…….
“우우욱!”
“최현 씨!”
헛구역질하며 입을 손으로 막자, 하루가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게 보였다.
황급히 다른 손으로 그녀를 멈춰 세웠다.
“괜찮아요. 잠시 쉬면 돼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하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텐트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최현 씨가 특수 임무팀에 합류해 주시길 바라고 있어요.”
“하루 너!?”
옆에 있던 유지한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하루를 바라봤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최현 씨가 전력으로 합류해 준다면 그만큼 든든할 수 없겠죠.”
하루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텐트 밖으로 나갔다.
우리 사이에 서 있던 유지한 아저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다. 원래 저런 녀석이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너에겐 잔인한 말이었을 테니까.”
확실히 그때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릴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나 역시 특수 임무팀에 합류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자기 욕심을 숨기지 않는 하루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저씨 혹시 저도 팀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해 주시면 안 될까요?”
“뭐?! 너 진심이야?! 정말 이번엔 위험하다고. 놈들이 대놓고 널 노리고 있고, 우리가 널 지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야.”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저씨는 깊은 곳에서 올라온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고집만 세서 피곤해 죽겠다.”
“감사해요.”
못 당하겠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은 아저씨는 하루를 따라 텐트 밖으로 나갔다.
적어도 발렌은 내가 직접 구하러 가야 한다.
발렌이 자신을 내던져서 날 구하려고 했으니까, 나 역시 내 친구를 두고 숨어있을 순 없다.
침대에서 일어나 갑옷을 입으려는 순간,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System - 퀘스트 - 아르티아를 토벌하십시오. 보상 - Hidden Sk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