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납치당한 헌터 (1)
여전히 내 목덜미를 놈의 손에 붙잡힌 채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라.
머리를 굴려.
“나는 ‘아르티아’. 원래 16층 게이트에 갇혀 있었지만, 그날 내가 살고 있던 세계가 터무니없이 작다는 걸 깨달았다.”
무거운 그의 목소리는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에 꽂혔다.
“그리고 나약한 인간 따위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계를 빼앗을 것이다.”
“…그거참 대단한 포부네.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지?!”
파악!
아르티아는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네놈은 인간치곤 약하지 않지. 방금은 블랙 퀸을 압도할 정도로 싸우는 걸 봤다. 어떤가, 내 밑에서 새로운 세계의 밑거름이 되어 보지 않겠나.”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지금 나보고 몬스터 부하나 하면서 시중을 들으라는 건가?
아니, 오히려 좋은 기회다.
일단 대화를 하며 시간을 번다면 어떻게든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도.
“인간이 몬스터와 함께 싸운다고? 어이가 없군.”
“고정 관념은 항상 변화의 세계에서 뒤처지기 마련이지. 세상은 이곳, 던전을 중심으로 몬스터로 물들어 간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런 것치곤 아직 이 근처에 있는 헌터들조차 처리하지 못하고 있잖아.”
자신을 아르티아라고 소개한 이 자식, 아까 갑자기 내 앞에서 나타났어.
분명 무언가 마법 비슷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인간은 가지고 있는 무기도, 그리고 싸울 수 있는 인원도 한정적이다. 그에 비해 몬스터는 끊임없이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지. 시간이 갈수록 인간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헌터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새롭게 능력을 얻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지만, 숙련된 헌터가 줄어드는 건 치명적이었다.
변화 없이 지금과 같은 시간이 지속된다면 아르티아의 말처럼 한계가 오겠지.
“그 안에서 너는 수많은 몬스터를 지배하고, 최상위에 군림할 수 있다. 내게 불사의 비법만 알려 준다면 모든 것을 주지.”
아직 채하나가 있는 동굴에 대해선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죽어도 채하나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 거다.
문제는 아직 ‘이모탈’의 스킬 효과가 남아 있어서 죽지 않는다는 것.
조금 더 시간을 벌어 볼까.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거절한다면 끝나지 않는 고통만 남을 뿐이다.”
“제안이라기보단 협박이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
“뭐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말을 이어갔다.
“인간을 그렇게 우습게 보고,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면서 굳이 불사의 능력이 필요한 건가? 사실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을 그렇게 얕보고 있지 않은 거지?”
아르티아는 새까만 갑옷을 두르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재미있군. 하지만 틀렸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안쓰러울 정도로 연약한 존재들이다. 보통 인간은 내가 목을 살짝 비틀기만 해도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말지. 그런 인간에게 나, 아르티아가 두려움을 느낀다고?”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와 같은 몬스터다.”
“……!”
“분명 이 던전엔 나보다 강한 존재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선 좀 더 많은 몬스터를 수하로 만들 필요가 있지.”
몬스터는 대부분 서로의 존재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다.
옆에 다른 몬스터가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성이 있는 몬스터는 이유 없이 다른 몬스터와 싸우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
물론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에 있는 몬스터들도 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먹고 먹히며 싸우지만, 일반적으로 몬스터는 다른 개체를 아예 무시한다.
하지만 아르티아처럼 큰 야망을 품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성이 있고, 아르티아보다 강한 몬스터가 있다면 분명 싸울 수밖에 없겠지.
“너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있다고?”
“확답은 못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
사실 아직 내 앞에 있는 아르티아라는 놈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옆에서 아르티아를 지키고 있는 블랙 퀸이 얼마나 강한지는 직접 느껴 봤다.
그런 블랙 퀸이 아르티아의 부하로 있다는 것으로 더 강하다고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힐끔 시선을 아래로 내려 이모탈의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2분도 채 남지 않았다.
뻐억!
“……!”
복부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단숨에 체력이 300밖에 남지 않았다.
아르티아의 무릎이 내 복부에 꽂혀 있었고, 의문 가득한 눈으로 놈을 올려다봤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배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티 나게 시간을 버는 거 아닌가.”
젠장, 언제부터 눈치챘던 거지?
여전히 통증 때문에 입을 벌리고 있어도 호흡이 되질 않았다.
그런 내 머리채를 잡은 아르티아가 천천히 끌어올렸다.
“만족스러운 통증인가? 네놈은 볼수록 흥미로운 놈이군. 저번에 만났을 땐 무슨 수로 도망친 거지?”
“쿨럭… 궁금한 게 많네. 꼭 답을 찾았으면 좋겠네.”
파앗!
아르티아를 발로 차서 밀쳐 내고 바로 에렌 셀을 꺼내 들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중요하다.
슈우웁. 슈우웁.
에렌 셀로 내 목을 찌르려는 순간, 뒤에서 튀어나온 블랙 퀸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무슨 힘이……!
탕그랑.
그대로 에렌 셀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아르티아가 다시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죽지 않는데, 스스로 죽는 것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건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군.”
따악!
아르티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새까만 쇠사슬이 내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 자식! 무슨……!”
입까지 덮은 쇠사슬 때문에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젠장, 점점 내 초월 능력이 노출되고 있다.
이러다가 내 능력이 불사가 아니라는 걸 들킨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심각해진다.
블랙 퀸에게 질질 끌려가는 중에 고개를 돌려 채하나가 있는 쪽을 봤다.
몰래 숨어서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는 걸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내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로 바닥을 쓸며 어디론가 끌려갔다.
***
10분 정도 끌려서 이동한 곳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원래 10층에 이런 곳이 있었나.
블랙 퀸은 쇠사슬을 위로 당겨 나를 강제로 일어나게 했고, 계단 아래로 이동했다.
“기대해도 좋다. 차라리 죽고 싶게 해 줄 테니까.”
이놈들은 진심이야.
분명 어떻게든 날 고문해서 불사의 비밀을 캐내려는 것이다.
지하 아래로 내려가자 어디선가 본 듯한 곳이 나를 반겼다.
“……!”
“내가 직접 만든 공간이다. 다른 곳은 몬스터가 우글거려서 시끄럽거든.”
처음 내가 던전 안에서 정신을 차렸던 곳이다.
그래서 죽었는데도 10층에서 부활했던 것인가.
다른 층의 벽과 같은 느낌이라 헷갈릴 수밖에 없잖아.
10층과 9층 사이에 만든 공간인가.
“자, 마지막 기회다. 이제 말해 줄 생각이 드나?”
아르티아는 그렇게 물으며 내 입을 감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알고 있다고 해도 말하지 않겠지만, 당연히 내가 초월 능력을 얻는 법을 알고 있을 리 없다.
“혹시 엿이라는 말 아냐? 엿이나 까 잡숴.”
“…블랙 퀸.”
슈우웁.
달그락.
옆에서 랜턴을 들고 있던 블랙 퀸은, 랜턴을 벽에 걸더니 내게 다가왔다.
꿀꺽.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고문을 당하면 결국 체력이 깎이고 죽게 된다.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죽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혹시 모르니 쓸 만한 놈을 준비해 놨지.”
이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고블린 사제였다.
속으로 수많은 욕이 튀어나왔지만,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푸욱!
“끄아아아악! 으악! 우우욱…….”
블랙 퀸의 뾰족한 손톱이 그대로 내 손톱 아래로 파고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옆에 붙은 고블린 사제는 아르티아의 눈치를 살피며 내게 회복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후욱… 후욱…….”
“말하고 싶어졌다면 언제든 말하도록.”
휙 돌아서 가는 아르티아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엿… 이나… 까 잡숴. 크아악!”
말하는 것과 동시에 블랙 퀸의 칼이 내 다리의 살가죽을 벗겨 냈다.
다리가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아득해지는 정신이 이대로 끊어지길 기도했다.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려 놔라. 말할 생각이 들면 검지를 들도록.”
“으으읍! 흐으윽!”
마치 내게 고문을 시험해 보듯 블랙 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고문했다.
정신을 잃으면 깨어날 때까진 뒀다가 다시 시작하길 반복했다.
기계처럼, 정해진 일을 하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고문이 반복되었다.
“끄으으!”
죽고 싶다.
수도 없이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고통을 느껴야 하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깨어나고 고문당하길 반복할 뿐.
“형씨.”
“읍?!”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찰그락.
벽에 쇠사슬이 걸린 채로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주변을 둘러보자, 지금은 오크 주술사도, 블랙 퀸도 보이지 않았다.
“놈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것 같아.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발렌…! 발렌이 있었어!
하지만 어떻게…….
“잘 들어. 형씨. 일단 나를 소환해 줘. 그다음 형씨가 직접 죽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난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
손을 쓸 수 없는 지금, 소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수단은 발밖에 없었으니까.
몇 번이나 허우적대다가 겨우 펫 스테이터스창을 열었다.
어쨌든 죽으면 같은 층이라도 다른 곳에서 부활한다.
“됐어!”
소환 버튼을 누르자 옆에서 발렌이 소환되었다.
아르티아 자식, 이런 건 절대 모르겠지.
발렌이 서둘러 내 쇠사슬을 풀어 주었고, 오랜만에 내 팔은 자유를 되찾았다.
“으윽…. 우욱!”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오는 고문의 기억들에 구역질이 나왔다.
한참이나 속을 게워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5분이면 돼. 내 소환을 해제하고 형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여기서 도망칠 수 있어.”
“하아… 고마워, 발렌. 네가 아니었다면…….”
말을 하던 도중, 발렌이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 블랙 퀸이라는 놈의 냄새야.”
“뭐?! 벌써?!”
아르티아가 없는 건 좋은 기회지만, 지금 상태로는 블랙 퀸을 이길 수 없다.
채하나의 버프도 없고, 내 스킬도 아직 쿨타임이다.
하지만 발렌의 소환을 해제하려면…….
잠깐이라면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인벤토리에서 에렌 셀을 꺼내 블랙 퀸을 기습할 자세를 취했다.
“형씨… 미안해.”
“뭐?!”
“지금 또 잡히면 그땐 끝장이야.”
타악!
내게서 검을 빼앗은 발렌은 그대로 에렌 셀을 내 심장에 쑤셔 넣었다.
“커헉! 자… 잠깐…….”
몸이 바닥으로 무너지며 발렌의 몸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대로 내가 죽으면… 발렌은……!
“어떻게든 도망쳐!”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