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블랙 퀸 (2)
“형씨! 형씨, 정신 차려 봐!”
발렌의 목소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드리듯 울려 댔다.
욱신거리는 몸을 꾸역꾸역 일으키자, 주변이 온통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수도 없이 죽은 탓인지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여긴 어디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형씨 지금 납치된 거 같아.”
“나… 납치?!”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분명 블랙 퀸과의 전투 도중 놈의 손아귀가 내 얼굴을 덮치는 걸 본 이후로…….
“일단 숨는 게 좋겠어.”
너무 어두워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발렌의 말대로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최대한 구석으로 이동했다.
살다 살다 몬스터한테 납치를 당하는 일이 오다니.
스킬창을 열어 스킬 쿨타임을 확인하자, ‘더블 라이프 파워’의 쿨타임이 38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원래 쿨타임은 48시간이니, 전투 시간을 고려해 보면 8시간 정도 정신을 잃었던 건가.
“……!”
이동하던 중에 푸른 빛이 보여서 이끌리듯 그쪽으로 향했고, 그곳엔 내게 익숙한 게이트가 보였다.
설마 여긴 던전?!
최악의 상황이다.
던전에서 죽으면 던전 어딘가에서 부활하게 될 테니 이젠 죽는다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깨어났나 보군.”
갑옷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숨어도 소용없다. 어차피 여기서 나갈 수 없으니까.”
철컥. 철컥.
갑옷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걸어온 그는 앞에 있는 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들고 있는 랜턴 덕분에 주변이 밝아졌고, 잿빛의 기괴한 문양의 벽이 보였다.
정확히 몇 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이 던전 안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자, 그럼 이제 대화를 해 볼까.”
“…몬스터가 인간을 납치한다는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었는데 말이지.”
“그야 인간 따위는 납치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묵직하게 낮은 그의 목소리는 내 몸 안에서 한 번 더 울렸다.
“하지만, 네놈은 다르지. 죽지 않는 몸을 가진 인간은 충분히 흥미로우니까 말이야.”
그런가.
그땐 이모탈 때문에 죽어도 라이프가 소모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블랙 퀸이 보기엔 내가 죽지 않는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날 여기로 데려왔다는 건가?”
벽 뒤에 숨어서 아직 놈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수다나 떨려고 데려온 건 아니니 얼른 불사의 비밀이 뭔지 이야기해라.”
“내가 왜 너에게 그걸 알려 줘야 하지?”
찰그락.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원래 허리에 차고 있던 화도를 빼앗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벤토리에 에렌 셀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기습을 한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없다.
블랙 퀸이 나를 납치해서 이 몬스터에게 데려왔다는 것은, 블랙 퀸보다 위에 있는 놈이라는 뜻이니까.
더블 라이프 파워까지 썼는데도 블랙 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인간들은 이 아이를 ‘블랙 퀸’이라고 부르던 모양이더군. 그래, 블랙 퀸의 얘기를 들어 보니 고통은 느낀다지?”
“……!”
바로 옆까지 다가온 놈이 랜턴으로 나를 비추었다.
블랙 퀸과 같은 새까만 색이었지만, 놈은 무광의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키는 최소 3m는 되어 보였고, 등에 거대한 검을 메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인간은 통증에 민감하니까.”
이 자식, 처음부터 나를 고문해서 알아낼 셈이었나.
슈우웁.
놈의 옆으로 블랙 퀸이 다가와 검을 꺼내 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살가죽을 하나씩 벗겨 내며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게이트에 갇혔을 때 이후로 직접 내 목숨을 끊을 날이 올 줄 몰랐는데.”
파앗!
인벤토리에서 에렌 셀을 꺼낸 나는 망설임 없이 에렌 셀을 내 목에 쑤셔 넣었다.
머리가 핑 도는 듯한 감각과 함께 잠깐 눈에 보이는 건 목이 없는 내 몸통이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
“형씨, 괜찮아?”
젠장, 젠장.
내 목에 스스로 칼을 쑤셔 넣는 짓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해서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앞으로 절대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길 기도할 뿐이다.
“여기서 도망쳐야 해.”
아직 놈들은 내 초월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라이프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그만큼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알면 날 고문하는 방법은 더욱 다양해지겠지.
만약 한 번 더 놈들에게 발각되면 끝이다.
죽고 나면 내 시체도 없어지니 놈들이 나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긴 게이트 안인가?”
“아니. 여기도 던전이야.”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넓은 초원과 울창한 나무들.
던전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던전 10층.
얼마 전까지 헌터들의 공략 전진 기지로 쓰이던 층이다.
다른 층과 달리 게이트가 발생하지 않고 자원이 풍부해서 전진 기지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0층은 바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어서 그곳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여기서 도망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까진 던전 내부에서 죽으면 같은 층에서 부활했다.
아까 내가 죽었던 곳은 적어도 10층으로 보이진 않았다.
부활하는 범위가 바뀐 건가?
“형씨, 몬스터 냄새가 나는데?”
“역시 그런가.”
본래 10층에선 몬스터가 나오지 않았다.
9층과 11층 공략에 성공해서 그곳에 있는 게이트까지 꾸준히 공략하고 있었으니 10층으로 몬스터가 유입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던전 전체를 몬스터에게 뺏겨버린 상황이니 10층에서도 몬스터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
“일단은 피하는 게 좋겠어.”
“위치는 내가 알려 줄게.”
지금은 발렌이 옆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형씨, 잠깐만 소환해 줘.”
“어?”
발렌의 말에 커다란 나무 아래로 이동해서 그를 소환했다.
“이거 입어.”
“이걸?! 갑자기 왜?!”
발렌이 평소에 입고 다니던 가죽조끼를 벗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내 냄새가 배어 있어서 다른 몬스터들이 형씨의 냄새를 맡지 못할 거야.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렇구나, 알겠어! 고마워.”
후각을 이용해서 다른 몬스터의 위치를 찾아주는 것도 그렇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챙겨 주는 발렌에겐 항상 고마울 뿐이다.
발렌의 조끼를 걸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우측에 몬스터 냄새가 나긴 하는데, 거리가 제법 멀어. 신경 안 써도 될 거 같아. 그리고 정면 공중에서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어. 웬만하면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자.”
“알겠어.”
발렌의 정보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일반적으로 오크의 후각이 예민한 건 사실이지만, 발렌은 아무래도 다른 오크보다 후각이 발달한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으면 어떻게 할 셈이야?”
“…그러게. 일단 찾아보고, 그다음에 생각해야지.”
던전은 높은 원탑의 형태인데, 10층은 유일하게 밖으로 창이 뚫려 있다.
원탑을 빙 둘러싸듯 나가는 길도 많아서 던전의 끝만 찾는다면 어디로든 나가는 게 가능했다.
원래는 지상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놓여 있었지만, 이번 아포칼립스로 인해 그곳이 파괴되어 내려가는 건 불가능하다.
즉, 내게 이곳에서 나가려면 떨어져서 죽는 것밖엔 선택지가 없다.
그렇게라도 하면 초월 능력으로 다른 곳에서 부활할 수 있을 테니까.
“한쪽으로만 쭉 이동하면 던전 끝에 다다를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주변에 몬스터가 많으니 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
발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살폈다.
몬스터와 마주치게 돼서 전투를 벌이면 다른 몬스터의 이목이 끌릴 위험이 있다.
어떻게든 다른 몬스터를 피해서 나가는 게 최선이다.
“일단 저쪽에 숨자.”
“안에 몬스터가 없길 바라는 수밖에.”
근처에 있는 작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워낙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서 덩치가 큰 몬스터들은 절대 들어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기어서 천천히 안으로 이동하자, 내부에서 타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불? 동굴 안에서?”
천천히 기어서 안쪽으로 갈수록 타는 냄새가 더 강해졌다.
매캐한 연기까지 보여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안에도 몬스터가 있는 거 아니야?”
“타는 냄새 때문에 몬스터가 있는지 모르겠어.”
발렌의 후각으로도 알 수 없었기에 들어가는 게 더욱 불안해졌다.
제법 기어서 이동하자 공간이 넓어졌고, 환한 불빛이 보였다.
“사… 사람?!”
“으아악!”
불빛 앞에 있던 그녀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나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이는 그녀는 남색 빛이 감도는 단발을 하고 있었다.
“왜… 여기에 사람이……?”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혹시 저를 구조하러 온 건가요?!”
벌떡 일어난 그녀는 그대로 내게 달려와 품에 안겼고,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흐윽… 흑…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죄송하지만, 구하러 온 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도 여기 갇혔다고 할까.”
내 말에 방금까지 울먹거리던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갇혔다고요?! 뭐야, 난 또, 다시 던전이 전처럼 공략된 줄 알았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너무나도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모닥불로 향했다.
“대체 어쩌다가 여기 숨어 계신 거예요? 혹시 그쪽도 몬스터에게 납치를 당했다거나…….”
“몬스터한테 납치요?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그날 이후로 저는 쭉 여기 갇혀 있었거든요. 대체 어떻게 해야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던전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 상대는 생겼으니 다행이네요.”
“그날이라면, 혹시 아포칼립스 이후로 여기에 쭉 갇혀 계셨다는 건가요?!”
이거야말로 진짜 농담처럼 들렸다.
아포칼립스가 발생하고 대략 7개월이나 지났는데 그 이후로 여기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고?!
원래 그런 체격인지, 이곳에 갇혀 지내는 동안 이렇게 된 건진 몰라도 키도, 체격도 작은 그녀가 이곳에서 7개월이나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는 채하나예요. 그쪽은?”
“아, 저는 최현입니다. 현재 C급 헌터고요.”
“그래도 혼자보단 둘이 낫겠죠.”
“그런 것치곤 너무 실망하는 표정인데요.”
노골적으로 표정을 찌푸리고 있던 채하나는 물통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어떻게 이곳에서 7개월이나 살아남으신 건가요?”
“동굴 안쪽에 마실 수 있는 물이 흐르고 있어요. 식용 버섯도 자라고, 박쥐도 많거든요.”
“설마 박쥐를 잡아먹은 건가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제 입장에선 오히려 그 ‘설마’라는 말이 웃기네요. 살기 위해서 발악하고 있는데 박쥐 좀 잡아먹는 게 대수인가요?”
당돌한 말에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 계속 이 동굴 안에서만 지내신 건가요?”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가끔 밖에 나가긴 하지만, 어떤 몬스터가 이 근처에서 계속 돌아다니는 걸 본 이후로는 나가지 않고 있어요.”
“어떤 몬스터요?”
“마치 새까만 뼈만 있는 것처럼 생겨서 입에서 계속 연기를 토해 내는… 그런 놈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