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블랙 퀸 (1)
“괜찮으세요?!”
“너희야말로 괜찮은 거 맞아?!”
등에 장수주를 업고 있는 모습에 이민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래요. 잠든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력계 헌터의 능력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사용자의 정신력을 빠르게 갉아먹는다.
아직 능력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장수주에게 힘 조절은 쉽지 않은 거겠지.
“밖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화이트 소드가 왜 여기까지 온 건데?”
“자세한 얘기는 돌아가서 해요.”
화이트 소드.
이름만 들어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재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길드원들 목숨을 내던지면서 내 실력을 테스트해 보겠는가.
“밖에는 안전한 거 맞아?”
“아마 아직 데스나이트가 남아 있을 거예요. 제가 엄호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도록 하죠.”
공명준이 내 등에 있던 장수주를 대신 업기로 했다.
아직 아까 사용한 스킬의 버프가 남아 있다.
지금이라면 데스나이트를 상대로도 충분히 할 만해.
“형씨. 이상한 냄새가 나.”
“어제 씻었는데?!”
“형씨한테서 말고! 근처에서 뭔가… 알 수 없는 기묘한 냄새야.”
발렌의 말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은 주변에 워낙 몬스터가 많아서 이대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건 너무나 위험하다.
“앞에 데스나이트 두 마리!”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스르릉.
화도를 뽑아 데스나이트에게 달려가던 차에, 놈들의 뒤쪽에서 세 마리의 데스나이트가 늘어나는 게 보였다.
젠장, 너무 수가 많아.
이건 위험한데.
‘이모탈’을 쓰고 앞에서 라이프를 소모하면서 데스나이트들과 싸울 수 있지만, 놈들이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노린다면 손을 쓸 수 없다.
장수주라도 정신을 잃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해 볼 텐데.
아무리 이민하와 공명준이 있다고 해도 5마리를 상대하는 건 역부족이다.
어떻게든 내가 시선을 끌면서 도망치는 수밖에.
“저 녀석들 뭔가 좀 이상한데?”
5마리나 되는 데스나이트들은 여느 때처럼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검을 들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언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몰랐기에 우리는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형씨! 아까 그 기묘한 냄새를 풍기는 놈이 다가오고 있어.”
“뭐?!”
철컥. 철컥.
앞을 막고 있던 데스나이트들은 양옆으로 이동해서 마치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놈들이 길을 열어 준 건 우리가 아니라 뒤에 있는 다른 몬스터였다.
“……!”
“저게… 뭐야?!”
살기 때문에 온몸의 피부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하아. 하아.
의식해서 쉬지 않으면 숨을 쉬는 것도 까먹을 것만 같은 극한의 공포.
다른 사람들은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서 공포에 젖은 눈으로 몬스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슈우웁. 슈욱.
놈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까만 해골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뼈와는 달리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 색과 같은 기다란 검을 들고 있었으며, 놈의 머리 위엔 검은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골격이나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여자인 듯 보였다.
달빛이 아니었다면 어둠 속에서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새까맸다.
“…저런 몬스터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유미래는 울먹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감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 괴물이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다.
입에서 꾸준히 새하얀 연기를 내뱉고 있는 놈은,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전멸이에요. 셋을 세면 바로 반대쪽으로 도망치세요. 그쪽으로 쭉 가면 A-4 구역이 나오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이미 패닉 상태에 빠진 다른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꿀꺽.
“셋!”
파앙!
다른 일행이 반대로 튀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정면에 있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쐐액!
이모탈!
“……!”
[System : ‘이모탈’의 효과로 부활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라이프 1개를 소모합니다.]
반응하기도 전에 해골 자식의 검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이모탈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게임 오버다.
보통 이모탈을 써도 라이프가 깎이기 전까진 입은 대미지가 그대로 고통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방금은 체력이 단숨에 0이 되어 버려서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슈우웁. 쓔웁.
분명 검으로 나를 반 토막 냈는데, 그대로 살아 있는 게 당혹스러운 듯 보였다.
입에서 새하얀 연기를 끊임없이 토해 내는 놈은, 다시 검을 내게 겨누었다.
먼저 움직이면 놈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저 자식이 먼저 나를 공격해 오길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촤악!
“커헉!”
방금 무슨 일이…….
눈으로 따라가기도 전에 이미 검이 내 몸에 박혀 있었다.
쌩-! 쎄앵! 쐐액!
마치 작은 동물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놈은 쉴 새 없이 내 몸을 검으로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그 파괴력은 한 번 공격할 때마다 내 라이프 하나를 앗아갈 정도로 강력했다.
주변에 놈이 내뿜어 내는 연기만 보일 정도로 빨라서 도저히 반응할 수 없었다.
[System : ‘이모탈’의 효과로 부활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라이프 1개를 소모합니다.]
[System : ‘이모탈’의 효과로 부활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라이프 1개를 소모합니다.]
창이 너무 많이 겹쳐서 얼마나 라이프를 소모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최소 50개, 아니, 100개인가.
라이프가 깎이고 한 번 숨을 쉬기도 전에 다시 죽는다.
이곳으로 왔을 때 내 라이프는 2400개 정도였다.
젠장, 이러다간 이모탈 지속 시간인 10분이 지나기 전에 내 라이프가 먼저 바닥나겠어.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할 틈이 없다.
온몸이 찢겨 나가는 격통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오직 떠오르는 단어는 ‘절망’뿐.
카앙!
“……!”
그런 머릿속에 강렬하게 울려 퍼지는 금속음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
평소처럼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내겐 그 어떤 목소리보다 반가웠다.
“차… 차윤지 씨?!”
몬스터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은 그 누구보다 든든했다.
목을 옭아매는 공포에서 벗어난 나는 떨리는 다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해졌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약하네.”
“저 자식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고요! 네이비 라벨… 어쩌면 퍼플 라벨일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퍼플 라벨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었다.
네이비 라벨도 아직 알려진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너 괜찮아?!”
차윤지를 뒤따라온 민혁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마냥 반가워하고 있을 순 없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우린 원래 저놈을 쫓고 있었거든.”
민혁의 시선이 검은 몬스터에게 향했다.
그리고 뒤따라온 유지한 아저씨와 이신예도 보였다.
“여전히 넌 사건의 중심에 있구나.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유지한 아저씨랑은 정말 오랜만이라 항상 입에 물고 다니시는 담배 냄새가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걸 쫓고 있었다고?”
“그래. 어제 처음으로 발견되어서 벌써 몇 팀이 당했어. 일단은 유일하게 놈이랑 대적할 수 있는 윤지가 시간을 벌기로 했고, 우리는 윤지 서포트를 하는 중이지. 정해진 건 아니지만, 우리는 ‘블랙 퀸’이라고 불러.”
아저씨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저런 괴물이랑 혼자서 싸우는 게 가능하다고?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러고 보니 너는 윤지가 전력으로 싸우는 걸 본 적 없지?”
“네?! 하지만 최상층에서…….”
“윤지의 초월 능력과 검술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보다 일 대 일로 싸울 때 빛을 발하거든.”
슈우웁. 슈웁.
여전히 입에서 연기가 흘러나오는 블랙 퀸은 가만히 서서 차윤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앙!
먼저 달려든 건 차윤지 쪽이었다.
카가가각!
찰나의 순간 동안 몇 번의 검이 오갔고, 다시 거리가 벌어졌다.
과거에 나와 대련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였다.
“윤지는 시동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시동만 제대로 걸리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쩌엉-!
다시 둘의 검이 맞부딪혔고, 검에서 나는 소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분명 차윤지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던가.
“SS급 헌터라는 건 정말 아득히 먼 존재들이야. 그렇기에 그들이 칭송받는 거지.”
내 스승이었던 서진욱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내가 봤던 건 병으로 인해 이미 몸이 망가졌던 상태였는데도 그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차윤지는 그런 서진욱이 인정한 천재이자, 라이벌이었다.
카카칵!
“도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허억… 허억… 놔둬. 우리가 끼어 봐야 방해밖에 안 돼.”
이제야 도착한 심윤성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술에 담배까지 하면서 살까지 찌셨으니 조금만 뛰어다녀도 힘드시지.
하지만 아저씨 말대로 우리가 낄 틈은 없어 보였다.
라이프 파워에 더블 라이프 파워까지 쓴 상태였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월하백화식을 익히고, 몬스터와 실전 경험을 쌓아왔는데도 잠깐 사이에 수십 번 죽을 정도로 무력했다.
저런 괴물과 혼자 맞서는 차윤지를 보면 과연 내가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지 그려지지 않았다.
“블랙 퀸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한데요.”
압도적으로 나를 죽일 때와 다르게, 차윤지와 싸울 땐 블랙 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단순히 공격에만 치중된 게 아니라, 차윤지의 공격을 경계하고, 방어하느라 속도가 느려졌다.
“윤지의 초월 능력인 ‘간파’는 단순히 상대의 약점을 볼 수 있는 게 전부가 아니야.”
“네? 그럼 다른 게 있나요?”
내 물음에 씨익 미소를 지은 유지한 아저씨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우, 전투 중에 자세는 계속 변하기 마련이지. 공격을 한 직후나, 방어 자세에서 공격 자세로 바꿀 때, 그리고 공격을 준비할 때. 그럴 때마다 상대에게 치명적인 곳은 바뀌거든.”
“그 말은 움직일 때마다 약점 위치가 변한다는 건가요?”
“그래. 그렇기에 저런 상황이 되는 거야.”
즉, 차윤지는 움직일 때마다 바뀌는 블랙 퀸의 약점을 공격하고, 블랙 퀸은 자신에게 위협적인 곳을 방어하느라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
아주 잠깐의 순간을 노리고 공격하는 차윤지도, 그때마다 자신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아채고 방어하는 블랙 퀸도 정상이 아니었다.
콰앙!
그때 블랙 퀸의 검이 바닥을 긁어 올리자 돌조각과 흙이 차윤지를 덮쳤다.
당황한 차윤지는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 틈에 블랙 퀸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피하세요!”
반사적으로 양옆에 있는 사람들을 밀쳐 내고 블랙 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땐 이미 놈의 손아귀가 내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