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화이트 소드 (1)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네.”
건물 전체가 하얀색인 걸 본 발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감이야.”
화이트 소드의 길드 아지트는 아지트라고 하기엔 너무나 컸다.
20층 정도 되어 보이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고, 하얀 제복을 입은 헌터 둘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안에 용무가 있는데, 들어가도 되나요?”
“어떻게 오셨죠?”
중년의 남자는 나를 노골적으로 이리저리 훑어봤다.
인상을 찌푸린 채 손바닥을 내밀었다.
“헌터 등록증 보여 주시죠.”
“제 헌터 등록증을 왜 보여 드려야 하는 거죠?”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평범한 상가 건물에 들어가는데 관리인이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보통 헌터 길드 아지트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용무가 있다면 길드원 중 한 사람이 안내하며 따라가는 게 기본이었다.
이런 식으로 입구에서 헌터 등록증을 검사하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보여 주시지 않는다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안에 있는 저희 길드원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왜 헌터 등록증이 필요한 거죠?”
“저희 원칙입니다. 애초에 헌터는 맞습니까?”
두 사람은 이내 큭큭대며 웃는 걸 숨기지 않았다.
짜증이 치밀지만, 유미래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주머니에서 헌터 등록증을 찾아 꺼내려고 하는데, 건물에서 누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
흰색 정장을 입은 백발의 남자는 나를 보고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매스컴에서 워낙 많이 본 얼굴이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화이트 소드의 길드 마스터 이재문.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정장을 입고 있어도 감춰지지 않는 듬직한 근육은 60살을 넘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귀한 손님이 여기까지 오셨군요. 너희들 설마 귀빈께 실례를 한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나를 상대할 때와 달리 굳은 자세의 두 사람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실례는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헌터 취급도 못 받긴 했지만요.”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교육해 놓도록 하죠.”
그는 날카롭게 입구를 지키는 두 사람을 쏘아본 뒤 내 앞에 서서 길드 아지트 안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경비병 두 사람이 울상을 짓는 걸 보니 속이 편해졌다.
그가 나를 극진히 모시는 건 뻔한 이유다.
자신의 길드로 나를 데려가고 싶은 거겠지.
이재문은 화이트 소드를 헌터 협회만큼 거대한 조직으로 키우려고 하고 있다.
그걸 대외적으로도 끊임없이 드러냈고, 어쩌면 헌터 협회의 힘이 약해진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화이트 소드를 중심으로 아포칼립스를 정리하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화이트 소드가 헌터 협회의 입지를 빼앗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레이브 길드에 가입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정보 한번 더럽게 빠르네.
“여기 파견 나와 있는 저희 길드원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길드끼리 파견은 자주 있는 일이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로 팀을 꾸리기 힘들다 보니, 길드 내부에서만 활동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치유계와 통신계 헌터의 수요가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레이브 길드라면 유미래 씨군요.”
“아… 맞아요.”
길드와 이름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 소드는 가장 많은 길드원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파견 인원도 적지 않다.
그런데 길드 마스터가 일일이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심지어 유미래는 여기 파견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김 비서.”
그의 걸걸한 목소리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이재문의 옆으로 달려왔다.
이재문과 반대되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실내인데도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유미래 씨를 모셔 와.”
“알겠습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재문은 나를 보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님실로 모시겠습니다. 거기서 기다리도록 하죠.”
***
“차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정말 맛있어요.”
이게 손님실이냐.
손님실이라고 하기엔 라운지 같은 느낌이었다.
칵테일을 파는 바와 커피를 파는 카페, 그리고 뒤쪽엔 개인 수면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손님실과는 거리가 먼데.
“그런데, 최현 씨께선 어째서 레이브 길드를 선택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직 경험이 미숙하고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좋은 길드와 함께 성장하고 싶었거든요.”
뻔한 모범 답안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상황에선 굳이 튀고 싶지 않았다.
SS급 헌터이자, 1위 길드의 마스터인 그와 적이 되는 건 사양이다.
평소 내 가치관과 내가 아는 그의 가치관이 전혀 다르니 동료가 될 순 없겠지만, 적으로 두고 싶진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군요. 나이도 어리신데 뜻이 깊으시군요. 아쉽네요. 저희 길드로 모셔 와서 극진히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많은 곳에서 제 실력에 비해 과대평가 받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역시 이런 자리는 불편하다니까.
허례허식을 차리는 건 내겐 익숙하지 않았다.
“최현 씨가 지금 얼마나 주목받고 계신진 알고 계시죠? 굳이 저도 탐욕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최현 씨가 저희 길드에 와 주신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최현 씨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드릴 걸 약속하죠.”
“보상이요?”
“여동생이 하나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율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셔도 평생 두 분이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보상이죠. 어떻습니까.”
“제 스승은 그 정도의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
서진욱 얘기가 나오자 이재문은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몬스터와 싸우다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걸 옆에서 지켜봤고요. 더 할 이야기는 없겠네요.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자, 아까 봤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와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유미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가서 얘기하시죠.”
아직 화가 진정되지 않아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른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 잠깐만요!”
복도가 워낙 길어서 한참이나 걸어간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거칠게 대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동그란 눈에 호리호리한 체격, 작은 키는 22살보다 더 어리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잡았던 손목을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만난 거치곤 예의가 없으시네요. 따라오라고 하셨어도 됐을 텐데.”
유미래는 자신의 손목에 내 손자국이 난 걸 보여 주며 노려봤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얘기까지 나오니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그녀에겐 진심으로 미안함 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여 보이자, 한숨을 내쉰 유미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여기까지 제 안부를 확인하러 오신 건가요?”
그녀는 통신계 헌터였고 신아람은 그녀와 매일 통신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파견 헌터였기에 다른 헌터들과 같이 있어서 힘들다고 말도 못 하고 있을까 봐 걱정했다.
“마스터께서 직접 보고 와 달라고 부탁해서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가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것만 아니라며 잘 지내고 있어요.”
확실히 그녀는 안색이 좋아 보였다.
“지금도 식사를 마치고 쉬러 가는 길이었고요. 개인 시간도 확실하게 보장해 줘서 잘 지내고 있어요. 마스터에겐 잘 전해 주세요.”
“아뇨. 같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어느새 뒤에 따라온 이재문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파견은 제가 알아서 잘 정리할 테니 이만 길드로 복귀하시지요.”
이재문의 말에 유미래는 반색했다.
파견 수당이 나오긴 하지만, 타지에서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어린 나이로 S급 헌터가 되었으니 주변 시선도 곱지 않았을 거다.
초월 헌터나 특수 능력계 헌터는 남들이 보기엔 운이 좋은 인간들일 뿐이니까.
“들어가서 짐 싸시죠.”
“네! 금방 가져올게요!”
신나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자기 방으로 향하는 유미래를 보고 이재문의 비서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스터, 아직 저흰 인력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특히 유미래 씨는 치유계와 통신계 두 곳을 맡고 계셔서 빈자리가 큽니다.”
“시끄러워. 다른 길드에 지원 요청 넣어 놔.”
이재문의 눈은 오직 내게 꽂혀 있었다.
“아깐 제가 물의를 범했군요. 부디 용서하시길.”
말하는 것과 달리 눈으로는 당장 나를 죽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레이브 길드는 분명 인원이 5명밖에 되지 않는 길드죠?”
씨익 웃은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돈이 있으면 길드 하나를 통째로 사 버리는 것도 가능하답니다. 당신은 돈을 좇지 않는 헌터일지 몰라도, 당신의 마스터인 신아람 씨는 어떤지 모르겠군요.”
“뭐라고요?!”
욱해서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나를 지나쳐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노골적으로 우리 길드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이재문에게 적으로 인식되는 건 위험했다.
“기다리셨죠?! 얼른 가요.”
길드로 돌아갈 생각에 신이 났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유미래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돌아왔다.
“네. 돌아가죠.”
이곳에 더 있다간 정말 누군가와 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화이트 소드의 길드 아지트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깔끔하고 세련된 곳이었지만, 내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다신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어요.”
“저도요.”
역시 유미래도 이곳이 썩 편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
우리 길드 아지트까지 돌아가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돌아오자마자 나와 유미래는 길드 마스터인 신아람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다.
“다녀왔습니다.”
“마스터! 저 왔어요!”
우리가 기대했던 반응과 달리 신아람과 장수주는 심각한 분위기였다.
길드 마스터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아람은 유미래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래야, 오자마자 미안한데 민하에게 연락해 줘.”
“네?!”
“근처에 몬스터를 토벌하러 갔던 명준이와 민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이렇게 늦을 리가 없는데.”
“알겠어요!”
유미래는 깜짝 놀라서 급히 통신 능력으로 이민하와 대화를 시작했다.
“괜찮으시군요. 다행이에요!”
“후우.”
일단 두 사람이 무사하다는 것에서 우린 무거운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통신을 마친 유미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몬스터들에게 포위돼서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밤이 되면 골치 아파. 갑작스럽지만, 최현. 첫 임무야. 두 사람을 데리고 와.”
유미래 대신 메고 있던 그녀의 짐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