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x9999-73화 (73/176)

73화 : REVE (3)

내게 진 이민하가 자존심이 상할까 걱정했지만, 그건 내 노파심일 뿐이었다.

“…죄송한데, 조금 부담스러워요.”

“푸흡.”

옆에 있던 공명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길드 건물 1층에 있는 큰 테이블에 네 사람이 모였다.

이민하는 눈을 반짝이며 아까부터 한참이나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그 월하백화식이야?! 나 처음 봐! 최강의 검술이구나! 오오!”

“이제 그만하지. 내가 더 부끄러울 지경이거든.”

신아람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잔을 건네주었다.

커피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워서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우리 길드원은 여기 있는 네 명이랑 잠시 파견 나가 있는 ‘유미래’까지 총 다섯이야. 22살인데 벌써 S급 헌터인 녀석이지.”

“통신계나 치유계 헌터인가요?”

내 물음에 신아람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치 빠르네. 반은 맞아.”

어린 나이로 S급 헌터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보통 특수 능력계 헌터일 가능성이 컸다.

“미래는 두 가지 능력 모두 갖고 있거든. 원래는 평범한 통신계 헌터였는데, 이번 아포칼립스 때 치유계 능력까지 발현했어.”

“두 가지 모두?! 이신예 씨처럼요?!”

“…그 재수 없는 인간 얘기는 왜 하는 거야.”

갑자기 신아람이 묘한 살기를 흘렸다.

옆에 있던 공명준이 내게 다급히 귀띔을 해 줬다.

“두 사람 원수처럼 사이가 안 좋아요. 상극이라고 할까, 아무튼 이름도 꺼내지 마세요.”

그의 조언에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묘하게 닮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족 혐오 같은 건가.

“너까지 이제 6명이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네?! 저는 그럼 아까 그 테스트를 통과한 건가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지. 넌 경험을 더 쌓고, 혼자서 행동하고 싶다며. 혼자 활동하는 건 최대한 도와주겠지만, 그 전제는 길드 활동이 끝난 뒤에 해야 한다는 것.”

“좋아요. 그럼 따로 길드 활동이 없으면 혼자 움직여도 된다는 거죠?”

“당연하지. 내 목적은 네가 우리 길드원들을 지켜 주길 바라는 거야.”

예상치 못한 신아람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요?!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지킨다기엔 다들 실력이 뛰어나세요.”

“넌 우리들보다 강해. 초월 능력을 쓰지 않고도 그 정도였다면, 초월 능력을 썼을 땐 나보다 웃도는 실력일 거야.”

나는 급히 손사래 치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아직 한참 멀었어요. S급 헌터는 아무나 되나요?”

“뭐, 게이트 공략 경험은 내가 더 많아서 그쪽만 놓고 본다면 위겠지만, 전투 능력은 아마 네가 위일 거야.”

생각보다 높게 평가해 주는 신아람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 역시 세간에서 인정받는 헌터였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위험한 상황이 되면 네가 다른 길드원들을 지켜 주라는 거야. 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나도 네가 무얼 하든 도와줄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오직 서로의 목적을 위한 협상.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어서 와요!”

“그래도 내가 선배야. 깍듯이 모셔.”

레이브 길드는 A-1 구역 안쪽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을 아지트로 두고 있었다.

1층은 로비, 2층은 헌터 일에 필요한 여러 가지 방들이 있었고, 3층엔 각자의 생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인원이 워낙 적으니 큰 방을 혼자서 쓰는 게 가능했다.

“굉장하네요. 작은 길드인데 이 정도 아지트라니.”

“사실 국가에서 지원받은 곳이에요. 어차피 이쪽은 이제 일반인은 살 수 없으니 대부분 이런 식으로 헌터들에게 지원해 주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확실히 이런 위험한 곳에서 누가 살고 싶겠어.

그렇다고 멀쩡한 건물들을 버려두는 건 아까우니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모양이다.

“이쪽 상황에 대해선 알고 있어?”

“아뇨. 대충 듣긴 했는데, 말 그대로 대충이라.”

A-1 구역은 최전선.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들이 가장 먼저 공격해 오는 구역이었다.

던전과 가까운 만큼 주변에 몬스터가 잔뜩 우글거리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곳이라 불린다.

“간단하게 브리핑해 줄게. 준비 좀 해 줘, 수주야.”

“네!”

1층에 있는 회의실에 모여 커다란 모니터를 켜서 이 주변 지도를 띄웠다.

“여기가 던전, 그리고 여기가 A-1 구역. 양측에 A-3 구역이랑 A-4 구역이 있어.”

그녀의 손가락이 바삐 움직이며 모니터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요즘도 몬스터의 수가 많나요?”

“원래 A-1 구역의 위치는 여기였어.”

다음으로 신아람이 가리킨 곳은 지금보다 훨씬 던전에 가까운 위치였다.

몬스터의 기세를 막아 내지 못하고 방어 구역을 점점 뒤로 물러서 지금 위치까지 다다르게 된 거겠지.

“전선을 무른 덕분에 몬스터의 밀도는 낮아졌어. 상위 몬스터도 각개격파가 가능해진 수준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마 더 뒤로 밀릴 거야.”

“지금도 버티기 힘든 수준인가요?”

“헌터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거든.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

던전 최상층에서 공략팀에 들어갔을 때 느낀 것과 비슷했다.

쉬지 않고 몬스터가 몰려오고 헌터들은 몬스터를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을 몇 시간이나 지속하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헌터는 기계가 아니다.

결국, 다른 헌터들과 교대해야 하지만, 그때 비해 지금은 헌터의 수가 턱없이 줄어들었다.

아래층에서 활동하던 하위 헌터들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우리 길드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난 너에게 기대를 품었을 거야.”

“네? 저한테요?”

“그래. 너라면 이 상황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부담감에 한숨이 먼저 튀어나왔다.

지금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의 수는 헌터 한 사람이 추가된다고 어떻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전력이 는다면 전보다는 좋은 상황이 되겠지만, 겨우 나 하나로 상황이 바뀌진 않겠지.

“네가 혼자서 몬스터들을 모조리 베고 다니라는 뜻이 아니야.”

타악.

그녀는 손바닥으로 모니터를 치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 말했지? 헌터는 기계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네가 바꿀 수 있는 거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최악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상징이 필요한 거라고. 그게 실제로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희망을 품은 사람은 강해지는 법이거든.”

“…저에게 그 상징이 되라는 건가요?”

“뭐, 사실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지. 이미 사람들은 그 서진욱의 제자인 네게 기대가 커.”

부담스러워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인데.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스승님이 살아 계실 때는 내가 그의 제자라는 것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그 후엔 굳이 내가 숨기지 않았다.

F-5 구역에 있는 동안 남의 눈을 피해서 검술을 연마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그땐 하루라도 빨리 월하백화식을 내가 자유롭게 다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수련하는 게 목적이었다.

서진욱이라는 최강의 헌터가 사라지고, 서진욱의 제자이며 심지어 초월 헌터이기까지 한 내가 주목받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겠지.

“걱정하지 마. 네가 해야 할 일은 거창한 게 아니야. 그저 죽지 않고 살아서 헌터로 활동하면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죽지 않는 건 자신 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외부 게이트에 대해 들으신 게 있나요?”

“……!”

내 물음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두덩이를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던 그녀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다른 세 사람은 잠시 나가 있어 줄래?”

“아, 네.”

이민하, 공명진, 장수주는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심각해진 신아람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디서 들었어?”

“외부 게이트요?”

“그래. 현재 협회 내부에서도 쉬쉬하며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는 건데, 어떻게 안 거야? 역시 진천우 그 자식이 말한 거구나!”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신아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말렸다.

“아뇨! 아니에요. 사실 외부 게이트를 처음 발견했던 게 저였거든요. 그때 서진욱 스승님께 보고를 드리긴 했는데, 그 이후로는 들은 게 없어서…….”

“뭐? 외부 게이트를 처음 발견한 게 너였어? 너도 참… 사건의 중심이구나.”

“별로 기쁘진 않은 일이네요.”

그녀는 답답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혹시 듣는 사람이 있을까 회의실 밖을 살폈다.

“외부 게이트는 아포칼립스 이후로 꾸준히 발생하고 있어. 최대한 외부 게이트에 관한 얘기가 퍼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고 있지만, 시간문제겠지.”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들을 처리하면서 외부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 가능한가요?”

“당연히 전력이 부족하지. 그래서 ‘화이트 소드’가 일단 그쪽은 전담해서 맡고 있어.”

화이트 소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길드였다.

3위 길드인 신월과 다르게 화이트 소드는 상당히 엘리트 느낌의 길드다.

하얀색 제복을 갖춰 입고, 엄격한 규칙 아래에서 헌터들이 군인처럼 움직인다.

덕분에 게이트 공략과 던전 공략에서 무시무시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아포칼립스가 터진 이후에도 그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여전히 1위를 과시하고 있다.

“무서운 녀석들이지. 다른 길드와 협회에서 하는 만큼 활동을 하면서 추가로 외부 게이트까지 공략하고 있는 거야. 겉으로는 굉장해 보이지만, 그만큼 헌터들을 혹사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긴 해.”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죠.”

화이트 소드의 길드 마스터인 ‘이재문’.

4명의 SS급 헌터중 한 사람이다.

지금은 무려 60살을 넘겨서 실제로 헌터 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화이트 소드를 운영하며 헌터 업계에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화이트 소드는 덕분에 대기업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

SS급 헌터 중에서 매스컴에 가장 많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는 남자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솔직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처음 내가 들어갔던 외부 게이트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웬만한 전력으론 공략할 수 없다.

그런 위험한 게이트에 큰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길드는 애초에 화이트 소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그걸 알기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거겠지.

“지금 우리 길드원 중 한 사람인 미래가 파견 나가 있는 곳도 화이트 소드야. 그래서 걱정되긴 하는데, 나도 길드 마스터라는 위치가 있으니 쉽게 움직일 수 없더라고.”

신아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워낙 헌터들을 막 굴리는 곳이니까 걱정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럼 제가 갔다 와 볼까요? 화이트 소드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