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REVE (2)
“자… 잠깐! 굳이?”
당황한 이신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너는 헌터 협회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원하면 상위 길드에 가입할 수 있는 상황인데 왜 그런 작은 길드에 들어가려는 거야?!”
옆에 있던 장수주 역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최강의 헌터라 불리던 서진욱의 제자였던 날 탐내는 곳이 많다.
F-5 구역에서 있을 때도 진천우가 이곳에 오는 걸 몹시 아쉬워했었다.
내 실력을 떠나, 나란 헌터가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홍보 효과가 되니까.
특히 요즘엔 헌터의 수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고, 길드원을 늘리는 게 힘들어졌다.
“길드에서 절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원하는 길드로 가고 싶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신예는 입술을 빼죽 내밀며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신월에는 확실히 신세를 많이 졌지만,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고 느꼈다.
“갑작스럽지만, 장수주 씨를 따라가서 길드장님을 만나 뵈어도 될까요?”
“아, 네. 그럼 금방 서류만 제출하고 올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고 보니 길드장이 누군지도 모르네.
“너, 괜한 반발심이나 객기로 그러는 거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이신예는 이번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우리 신월이 아니더라도, 네가 좋은 길드로 가길 바라고 있는걸. 상위 길드에 가면 헌터 등급을 올리는 것도 수월하고 정보 수집이나, 여러 가지 지원을 받기도 편해. 무엇보다 율이를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하는 게 가능할 거야.”
나를 신월로 데려가려고 하는 말이 아닌, 순수한 걱정이었다.
이신예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날 스카우트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렇게 돌려 말하지 않았겠지.
“감사해요. 그래도 아직 저는 좀 더 경험을 쌓고 싶어요. 좋은 길드에 들어가면 그만한 혜택은 받을 수 있겠지만, 제가 실제로 경험을 쌓을 기회는 적겠죠. 언젠가 다시 같이 싸울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여간 그렇게 안 보이는데 융통성 없다니까.”
이신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에서 서류를 제출한 장수주가 달려와서 숨을 가다듬었다.
“아, 천천히 오셔도 됐는데.”
“아니에요. 그럼 같이 가실까요?”
“나중에 보자 수주야.”
이신예는 빙긋 웃으며 장수주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녀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헌터 협회 임시 건물에서 나오며 장수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레이브 길드장은 누구시죠?”
“…! 그것도 모르시면서 저희 길드에 들어온다고 하신 거예요?!”
장수주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보통 길드의 성향이나 분위기는 길드장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진천우가 이끄는 ‘레드 썬’은 상당히 터프하고 과격한 느낌이다.
하루가 길드 마스터인 신월이 가족 같고 체계적인 것도 그런 탓이다.
“신아람이라는 분이에요. 혹시 아시나요?”
신아람.
알다마다.
S급 헌터로 민혁이처럼 활을 주로 다루는 헌터였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까칠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다.
하필 그 사람이 길드 마스터였을 줄이야.
“주변에서는 영 불편해하는 분인데 같이 지내보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몰라요. 정이 많고 동료에 대해선 확실한 믿음을 갖고 계시거든요.”
“그렇군요. 얼른 만나보고 싶네요.”
***
“싫어. 안 돼.”
“…네?”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그녀는 나를 무뚝뚝한 얼굴로 쏘아봤다.
“자, 잠깐만요. 최현 씨는 그…….”
당황한 장수주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신아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당연히 자신이 우리 길드에 들어올 수 있다는 재수 없는 얼굴을 하는 게 짜증 날 뿐이야.”
“제가 언제……!”
신아람은 30대 중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헌터 활동을 하면 대부분 피부가 타기 마련인데, 그녀는 신기하게도 하얀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금발이 더욱 잘 어울리는 듯했다.
상의를 허리에 질끈 묶고 있는 그녀는,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자신의 오토바이를 정비하고 있었다.
“우리 길드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가 뭐야?”
시선은 오토바이에 고정한 채로 입만 움직였다.
“경험을 더 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혼자서 활동하는 것에도 제약이 없을 것 같고요.”
“그럼 다른 데 알아봐. 경험은 많이 쌓을 수 있겠지만, 우린 개별 행동을 너그럽게 봐줄 생각이 없거든.”
옆에 끼어 있는 장수주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길드를 찾는 거라면 여기가 아니라도 더 좋은 곳이 많을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처음으로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가식적인 웃음이라는 걸 알 수 있겠군.
“…그 검은…….”
그녀는 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에렌 셀은 보통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지만, 스승님이 남긴 이 화도는 반드시 몸에서 떼지 않고 있다.
부적 같은 느낌이랄까.
“5년 만이네.”
신아람은 당당하게 내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고, 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검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아직은 멀쩡하네. 그 녀석 재수 없긴 하지만 실력은 좋단 말이지.”
“서진욱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스르릉.
그녀는 검을 뽑아서 붉은색 검날을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내가 만들어 준 검이거든.”
“네?!”
“마스터는 헌터 활동을 하시면서 대장장이로도 일하시거든요.”
옆에 있던 장수주가 말을 보태 주었다.
그럼 설마 스승님이 말씀하셨던 대장장이가 신아람?!
그렇다면 내겐 반드시 이 길드에 들어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발렌의 의족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이라면 꼭 이 길드에 들어와야 한다.
“부탁드립니다. 길드에 넣어 주세요.”
“…뭐야? 방금까진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더니, 갑자기 자세가 바뀌네?”
“스승님께서 나중에 자신이 잘 아는 대장장이를 소개해 준다고 하셨는데, 그게 신아람 씨인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내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결국,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서 우리 길드에 들어오고 싶다는 거잖아?”
“아니라곤 못 하겠군요.”
그녀의 기세에 눌려서 묘하게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다신 신아람과 대화조차 하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왔다.
“하지만 길드라는 건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각자의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거니까요.”
“흐음. 수주 넌 우리 길드에 왜 들어왔어?”
갑자기 나와 신아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 아…! 저는, 그냥 친한 분들이 있고, 헌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도와주셔서…….”
“그렇구나.”
신아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 그럼 나도 널 우리 길드로 데려오려면 그에 맞는 목적이 있어야겠지? 적어도 난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길드에 데려오고 싶어.”
“제 실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으신 건가요?”
“뭐, 쉽게 말하면 그런 거지.”
빙긋 웃은 그녀는 내 뒤쪽을 향해 오라고 손짓했다.
고개를 휙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뭐,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이민하 씨! 엄청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전에 봤을 때와 같이 금발을 하나로 묶고 있는 이민하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를 보고 당황한 그녀와 달리, 나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조금 감정적이긴 하지만,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잠깐 지내는 동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마침 잘 왔어. 이 녀석이 우리 길드에 들어오고 싶대서.”
“네?! 네가 왜?!”
처음엔 나를 D급 헌터라고 깔보기만 했던 그녀지만, 지금은 내 얘기를 여기저기서 들었겠지.
“다른 좋은 길드도 많잖아!”
따악!
바로 그녀의 머리에 신아람의 손에 들려 있던 스패너가 날아왔다.
“우리 길드는 좋은 길드가 아니라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좀 더 큰 길드 있잖아요.”
“됐고, 네가 이 녀석 상대해 봐.”
신아람은 흥미로운 듯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봤다.
영문도 모른 채 나와 싸우게 생긴 이민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갑자기요?”
“일종의 입단 테스트라는 거지.”
“마스터가 하라고 하면 하겠지만.”
신아람은 우리 둘을 데리고 가까운 도로로 향했다.
차가 다니지 않는 휑한 도로는 싸우기에 안성맞춤인 공터였다.
“이쪽 횡단보도부터 저기 신호등까지가 경기장이야. 넘어가면 안 돼.”
“하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이민하가 플레이트 아머를 몸에 걸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거고, 내가 보기에 전투 불능이면 시합 끝. 그리고 넌 초월 능력 쓰지 마.”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네 초월 능력은 분명 사기적이긴 하지만, 확실한 제약이 붙어 있어. 실전에서도 쓸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도 투정 부릴 거야?”
신아람의 말에 반박할 순 없었다.
스킬들은 쿨타임이 존재했고, 죽어서 부활하는 시간이 있기에 동료들이 위험할 땐 함부로 죽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땐 오직 내 전투력밖에 쓸 수 없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바로 시작!”
이민하는 시작하자마자 나와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그녀도 붙어야만 내게 타격할 수 있다.
일단은 내 움직임을 살필 생각인가.
“6개월 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볼까?”
“적어도 스승 이름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죠.”
빙긋 웃은 나는 허리춤의 화도를 뽑아 들었다.
월하백화식은 이어지는 검술.
송화는 단순히 적의 공격을 피할 때만 쓰는 기술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거리를 좁힐 때도!
“……!”
카앙-!
순식간에 떨어져 있는 이민하에게 붙어서 기습했지만, 그녀는 방패를 들어 내 공격을 막아냈다.
역시 무시무시한 반응 속도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싸움을 길게 끌어서 내 움직임에 익숙해지기 전에 끝낼 생각이다.
“앵화.”
파앙!
방패를 들고 있는 상대에게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보여 주는 게 앵화다.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올려 그녀의 가드를 없앴고, 바로 목란을 사용했다.
“그만!”
내 검 끝이 무방비 상태인 이민하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장수주와 신아람은 동그래진 눈으로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멍한 표정의 이민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뭐야?”
스승님이 죽기 전에 보여 줬던 6개의 식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운이 좋게도 내겐 ‘복습’이라는 스킬이 있었다.
스승님과 함께 싸울 때 마지막으로 죽었기에 그 이후로 몇 번이나 그 상황을 3자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월하백화식을 쓰는 스승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월하백화식… 오랜만에 보는 검술이네. 따라와.”
그렇게 말한 신아람은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