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REVE (1)
“또 멍하니 있네?”
“아, 다녀오셨어요?”
헌터 협회에 갔다 온 진천우에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브루탈의 밤이 지나고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날 이후 F-5 구역의 지휘관인 진천우의 제안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협회는 왜 다녀오신 거예요?”
“하아.”
내 물음에 그는 먼저 한숨이 튀어나왔다.
“뻔하지 뭐, 이틀 뒤에 베이스캠프 뒤로 옮기라는 얘기였어. 이러다가 다른 나라까지 옮기겠네.”
아포칼립스로부터 6개월.
던전에선 그 이후로도 꾸준히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브루탈의 밤에 수많은 헌터가 몬스터와 싸우며 목숨을 잃었다.
안 그래도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더 이상 몬스터와 맞서 싸울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일반적인 무기는 몬스터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기에 군대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몬스터를 사냥해서 나오는 스톤으로 만든 무기만이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했다.
스톤으로 만든 무기는 한정적이었기에 몬스터와 주로 싸워 온 헌터들에게 보급되었다.
평생 몬스터와 만나 보지도 못한 군인들은 대부분 전투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까.
협회는 급하게 방어선을 뒤로 이동시키며 던전 주변 영역은 모두 포기하기로 했다.
덕분에 몬스터 밀도가 낮아지며 헌터들이 수를 줄이는 건 수월해졌다.
물론 그만큼 막아야 하는 범위도 넓어졌지만.
“너는 준비 다 했냐?”
진천우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아주 좋아 죽네. 그렇게 좋아?”
“아니, 팀장님! 저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건데 좋겠어요?!”
그러면서도 히죽거리고 있는 걸 보고 어이가 없는지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지옥 간다고 죽을 놈이냐? 내가 늙어서 죽는 게 빠르겠다.”
진천우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30대 후반인 그는 S급 헌터에서도 이름이 있는 실력자였다.
창을 다루며 항상 최전선에서 싸우는 터프한 남자였다.
성격은 조금 까칠하고 직설적이지만, 자신의 사람은 애지중지 아끼고 힘든 일엔 먼저 나서는 멋진 사람이다.
“…고생했어. 제일 고생한 게 너라서 간다고 해도 말리질 못하겠다.”
“갑자기 또 왜 눈물은 글썽거리고 그러세요?”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글썽거렸다고 그래?!”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야, 팀장님 또 울어?”
“또 울다니?! 운 적이 없는데!”
멀리서 다가온 김정태가 내 앞에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았다.
“자, 네 짐에다가 내가 필요할 것 같은 것 좀 더 넣었어. 반년이나 여기서 지냈는데 짐은 왜 이렇게 적냐?”
“…이 자식이 무시하네?”
“하하, 대부분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어서 그렇죠. 감사해요. 정말로.”
통신계 헌터인 김정태는 이 베이스캠프의 사무적인 부분을 모두 맡고 있다.
식량의 분배부터 바리케이드의 관리, 그리고 순찰이나 사냥 시간도 그가 관리했다.
겁이 많긴 하지만 따듯하고 좋은 사람이다.
“가서 너무 힘들면 돌아와.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
“진짜 왜 그래요. 저도 팀장님처럼 눈물 날 거 같잖아요.”
“아니! 나 안 울었다니까?!”
이 팀에 속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좋은 사람이었고,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스승님이 남긴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라이프는 2천 개를 넘겼고, 레벨도 46레벨까지 올랐다.
얼마 전엔 꾸준하게 토벌 활동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서 C급 헌터로 승급할 수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
진천우가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6개월이나 같이 지내면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스승님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야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사해요.”
허리를 반 접어 인사를 하자, 그가 내 등 위에 손을 올렸다.
“다시 볼 건데 뭘 그렇게 격식을 차려.”
“그렇네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브루탈의 밤에 스승님은 모든 걸 불태우셨다.
알고 싶지 않아도 라이프 개수가 늘어나는 탓에 스승님이 그날 죽인 몬스터의 숫자를 알 수 있었다.
317마리.
밤부터 아침까지 스승님은 혼자서 나를 지키며 그 많은 몬스터를 베어 넘겼다.
정상이 아닌 몸으로, 평소보다 흉포해지고 강해진 몬스터를 상대했는데도 그 정도였다.
여전히 내가 그를 넘어서는 건 그려지지 않는다.
“너 뭔가, 예전이랑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네?”
멍하니 그날을 떠올리던 중에 이신예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뭐랄까… 좀 더 차분해지고 제법 그럴듯해 졌다고 해야 하나.”
“하하, 그게 뭐예요?”
“아무튼, 그래. 풋내기 티는 벗어난 것 같네.”
내가 지금 온 곳은 A-1 구역.
최전선이자 헌터 협회가 있는 현재 본거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스승님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공개되고 나자 예상했던 대로 헌터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최강이라고 불리며 수많은 게이트를 혼자 공략하고 다니던 그는 많은 헌터의 우상이자 상징이었다.
그를 잃은 건 단순히 SS급 헌터 한 사람을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기다리셨군요.”
“오랜만이네요.”
헌터 협회장인 윤서훈이 방으로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네요. 전에 만났을 땐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으니까요.”
그와 처음 만났던 건 아포칼립스가 발동하는 날이었다.
스승님을 따라 긴급 소집에 끌려가서 그를 처음 봤다.
어색하게 악수를 한 뒤, 윤서훈이 안경 너머로 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여기에서 활동하겠다고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큰 힘이 됐어요.”
“그럴 리가요. 저는 겨우 C급 헌터인데요. 있으나 없으나 차이 없을 겁니다.”
“겸손한 건 서진욱 씨를 닮지 않으셨네요. 지금 그의 빈 자리는 저희에게 너무나 큽니다. 아무래도 실질적인 전력이 부족해졌다기보단 다른 헌터들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니까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11층과 12층을 공략할 때 혼자서 게이트들을 모조리 공략하고 다녔다고 들었다.
다른 헌터들은 던전에 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스승님이 게이트를 하나씩 파괴한 것이다.
그가 있기에 던전을 다시 수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희망조차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이쪽은 왜…….”
그의 시선이 내게서 옆에 있는 이신예에게 돌아갔다.
사실 나도 아까부터 궁금하긴 했다.
“저희 마스터가 보냈거든요. 늙은 너구리가 꼬시지 않는지 잘 감시하라고요.”
이신예의 직설적인 말에 흠칫 놀라 윤서훈의 눈치를 살폈다.
“하하하! 여전히 하루 씨는 당돌하시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최현 씨의 의사를 가장 존중하니까요.”
“자, 잠깐만요. 꼬시다뇨?”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신예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쏘아봤다.
“넌 정말 여기 아무것도 모르고 왔구나.”
뭐야, 그냥 인사하려고 부른 거 아니었나?
“지금 널 노리는 곳이 많거든. 어디든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는 법이야.”
“이신예 씨 말이 맞습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최현 씨를 이용하려는 곳이 많죠.”
타악!
윤서훈의 말에 이신예가 테이블을 내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용하려고 하다니! 우린 전부터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당연히 우리 신월 소속으로 데려가는 게 맞지.”
“이제 누구도 안전하게 헌터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죠. 저희 헌터 협회는 최현 씨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요.”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진천우 씨는 이런 것과 친하지 않아서 대부분 김정태 씨가 처리하고 있었는데,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헌터 협회는 과거보다 힘을 크게 잃은 상태다.
초기 대응에 대한 수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많은 헌터가 사설 길드로 거처를 옮겼다.
헌터 협회로선 눈에 띄는 성과를 내야만 전의 입지를 되찾을 수 있고, 사설 길드들은 훗날 던전이 원래 상태로 돌아갔을 때 그만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일단은 아직 협회 소속이시지만, 저희에게 소속을 강제할 힘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저희는 최현 씨가 여기까지 와 주신 것부터 큰 힘이 되고 있으니까요.”
“너 우리 길드 올 거지?! 빨리 우리 길드로 온다고 말해.”
옆에서 떠드는 이신예를 보고 윤서훈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잔뜩 화나 있네.
“그, 일단은 며칠 지내면서 고민해 봐도 될까요?”
“뭐?! 난 당연히 우리 길드로 온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전이었다면 나도 고민하지 않고 신월 길드를 골랐을 거다.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뿐이고 그래도 같이 싸운 경험이 있으니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하지만 전에 하루가 날 이용했던 것도 그렇고, 너무 뛰어난 헌터들이 많아서 실력을 키울 기회가 많지 않을 거다.
지금은 적당히 나와 비슷한 수준의 팀원들과 함께 싸우며 경험과 실력을 늘리고 싶다.
“좋습니다. 거처는 미리 마련해 뒀으니, 거기서 편히 쉬시다가 고르시면 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서훈과 인사를 나눈 뒤 방에서 나왔다.
어쩐지 오자마자 싸운 듯한 기분인걸…….
“그러고 보니, 율이는 잘 지내?”
“아, 네.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연락하고 있으니 율이도 괜찮을 거예요.”
F-5 구역의 통신계 헌터인 김정태 씨가 매일 중간에서 연락망이 되어 주었다.
우리 남매의 애틋한 대화를 항상 들어야만 했던 그는 상당히 괴로워 보였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니 김정태 씨에게도 여러모로 신세를 졌구나.
“어?”
복도에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한 누군가가 흠칫 놀라서 눈이 커졌다.
길게 늘어뜨렸던 흑발을 어깨 위까지 자른 그녀는 아포칼립스 때 만났던 ‘장수주’였다.
나중에 마력계로 각성했던 것도 기억난다.
“최현 씨?!”
“진짜 오랜만이네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신예가 날 날카롭게 쏘아봤다.
“나보다 훨씬 반가워 보이네.”
“…크흠. 장수주 씨는 그 이후로 어떻게 지내셨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빙긋 웃으며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보여 줬다.
“저는 그 후로 ‘레이브’ 길드에 가입했어요. 아직 싸우는 건 무서워서 능력을 다루는 연습만 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사무 일도 돕고요.”
“그렇군요. 잘 지내셔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레이브는 어떤 길드인가요?”
“이민하 씨랑 공명준 씨가 있는 길드예요. 두 분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기억났다.
그때 당시 이민하는 자신의 길드가 겨우 4명 밖에 없는 소수 길드라고 했다.
두 사람도 실력이 좋았지.
어쩌면 내게 딱 맞는 길드일지도.
“저 정했어요. 저도 레이브 길드에 들어갈래요!”
“…뭐?!”
옆에 있던 이신예가 깜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