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프x9999-69화 (69/176)

69화 : 스승과 제자 (4)

“손의 방향은 조금 더 아래로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요?”

“맞아요. 이 각도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도록 수도 없이 연습하세요.”

적어도 살면서 지금처럼 1분 1초를 아쉬워하며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느꼈다.

몬스터와 싸울 땐 서진욱이 정해 준 대로 최대한 라이프를 늘리는 데 집중했다.

죽지 않기 위해 공격을 피하고 라이프 소모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몬스터가 없을 땐 지금처럼 서진욱에게 월하백화식의 세세한 부분을 배우고 있다.

[최현 Lv.32

체력: 3250/3250 마나: 320/320 기력: 30/30

힘: 82 민첩: 41 지능: 41

(사용 가능 포인트: 18)

라이프 : 933개]

“라이프는 이제 제법 확보되었네요.”

“레벨도 2나 더 올랐어요.”

게임 캐릭터의 능력을 갖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싸우지도 않고 레벨업을 하니, 마치 서진욱에게 쩔을 받는 느낌이었다.

게임에서도 나보다 훨씬 강한 유저에게 쩔을 받으면 간혹 무력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쩔을 받는다고 해도 내가 저 사람보다 강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멋쩍게 웃은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서진욱은 지금도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격해 오는 몬스터를 혼자서 모조리 처리하고 있다.

직접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아,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말할 수 없는 거면 말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뭔데 미리 그렇게 밑밥을 까세요?”

피식 웃은 서진욱이 궁금하다는 듯 내 질문을 기다렸다.

“스승님의 초월 능력은 뭔가요?”

“……!”

당황한 서진욱이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서진욱이 초월 헌터라는 건 공식적으로 공개된 내용이었지만, 그가 가진 능력에 대해선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헌터 협회도 서진욱의 초월 능력에 대해선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괜찮아요. 단순한 호기심이니까.”

“아뇨. 보여 드리죠.”

스릉.

검을 뽑아 든 서진욱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혹시 지금까지 초월 능력을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요?”

“대단한 이유는 아니에요. 단지, 제가 해 왔던 수많은 노력이 초월 능력에 가려지는 게 싫었을 뿐이었거든요. 어차피 혼자 게이트를 공략하러 다녔으니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요.”

사람들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S급 이상의 네임드 헌터들에 대한 수많은 루머와 이유 없는 욕이 자주 보인다.

특히 SS급 헌터들은 그런 시기의 대상이 되기 좋았다.

차윤지만 해도 직접 그녀의 실력을 본 일반인은 없으니 그녀가 얼굴로 SS급이 되었다거나, 운이 좋아 사기적인 초월 능력을 얻었을 뿐이라고 떠들어 댄다.

서진욱 역시 그런 것들에 신물이 난 거겠지.

“초월 능력을 써 본 지 오래돼서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두근두근.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가 직접 말하지 않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보지 못했다.

“스으읍.”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그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앗!

“……!”

너무 빨라서 눈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단순히 빠르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귀검 할아버지도 움직임이 빠르긴 했으나, 이건 그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서진욱은 정면에 있는 굵직한 나무를 깔끔하게 두 동강 내고 옆에 서 있었다.

“제 초월 능력은 ‘가속’. 신체 속도를 일시적으로 가속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엄청나요. 어떻게 움직였는지 전혀 못 봤어요.”

“좋은 능력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째선지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능력을 왜 쓰지 않고 계신 건가요?”

“…병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알게 됐죠. 초월 능력을 쓰면 제 몸 안에 있는 병도 더 빨리 퍼진다는 것을.”

“……!”

나는 당황해서 입만 뻥긋거렸다.

그건 정말로 자신의 생명을 소모하는 것과 같았다.

살아갈 날이 그만큼 줄어드는 거니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초월 능력을 써 본 적이 없어요.”

서진욱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느껴졌다.

차윤지와 서진욱을 옆에서 보며 언젠가 나 역시 SS급 헌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해 깊이 알아갈수록 스스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병이 퍼진 상태에서 초월 능력도 쓰지 않았는데도 서진욱은 말도 안 되게 강했다.

그렇다면 그가 몸 상태도 좋고, 초월 능력도 쓸 수 있었을 땐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조급해하실 거 없어요.”

“네?”

검을 집어넣은 서진욱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최현 씨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제가 장담하죠.”

“잘 모르겠어요. 게이트에서도, 그리고 여기서도 다른 분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못 했을 거예요.”

만약 게이트에서 이민하와 이신예가 도와주러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모스 퀸을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켜야 할 발렌도 지키지 못했을 거다.

지금도 서진욱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라이프를 이만큼이나 늘릴 수 없었을 거다.

“남에게 도움받으면 약한 건가요?”

“…네?”

“그렇다면 저는 누구보다 약한 사람 일 겁니다. 최현 씨의 아버지인 최준 씨가 살려 준 목숨이니까.”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서진욱 입에서 예상도 못한 이름이 나왔으니까.

“아버지요? 저희 아버지를 알고 계셨어요?”

“말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최준 씨는 저를 구하다가 몬스터에게 당해서 목숨을 잃으셨어요.”

“……!”

누군가 묵직한 것으로 내 머리를 후려친 듯한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몬스터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으니 그 상황을 아이들에게 말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걸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캐묻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데 다른 사람을 구하다 죽었다니…….

“그럼 지금까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죄송해요. 하지만 최현 씨가 알면 검술을 배우지 않으실 것 같아서…….”

“하, 검술을 전수하는 게 중요했군요.”

“그게 아니라.”

서진욱의 말을 듣기도 전에 몸을 휙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지금까진 그저 몬스터와 싸우다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을 구하다, 그것도 서진욱을 지키다 돌아가셨을 줄이야.

만약 서진욱만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사셨고, 그럼 어머니도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까지 닿자,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나와 율이가 고생한 것들, 외로움에 매일 울던 율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배신감이 몰려왔다.

내가 잘해서가 아닌, 아버지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날 선택했던 건가.

“최현 씨!”

타앗!

서진욱이 내 손목을 잡았고, 그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우뚝 멈췄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서진욱의 손은 너무나 앙상해서 부러질 것만 같았다.

“잠깐이라도 좋아요. 기회를 주세요.”

“하아.”

난 도저히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약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

우린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모닥불을 피웠다.

서진욱은 그때 있었던 일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서진욱이 아버지와 얼마나 친한 사이였는지.

“정말로 강한 분이었어요. 남에게 다가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셨고, 항상 유쾌해서 주변을 밝게 만드는 분이었죠. 저에겐 너무나 눈부신 분이었어요.”

“그때 그런 일이 있어서 저를 계승자로 고르신 건가요? 그때 받은 걸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내 물음에 서진욱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맹세하건대 그렇지 않아요. 처음에 최현 씨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계승자로 이미 정한 뒤였어요. 그 후에 최현 씨를 조사하다 보니 알게 됐죠. 만약 그 전에 알고 있었다면 이미 최현 씨에게 여러 가지로 지원해 드렸겠죠.”

그의 말을 무조건 믿을 순 없었지만,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월하백화식을 전수해 줄 정도라면 그 말대로 내가 헌터로 활동할 때부터 이미 손을 썼겠지.

“간혹 서윤하 씨에게 최현 씨와 최율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름도 까먹었었네요. 말하지 않은 건 정말 죄송해요.”

“제가 검술을 배우지 않겠다고 할까 봐 그런 건가요?”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만약 최현 씨가 그대로 떠나면 월하백화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만한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서진욱은 여전히 손을 떨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떠날까 봐 두려운 거겠지.

“괜찮아요. 저도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던 것뿐이에요.”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이제 최현 씨에게 숨기는 건 없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헌터들 사이에서 어떤 분들이었나요.”

부모님에 대해선 항상 궁금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두 사람.

특히, 헌터 일에 관한 건 절대 집에서 말하지 않으셨기에 내가 모르는 모습들을 알고 싶었다.

“아버지인 최준 씨는 실력도, 인성도 좋은 분이셨죠. 주변에 항상 다른 사람들이 많았고, 이성에게 인기도 많았어요.”

“…그건 제가 물려받지 못한 것 같네요.”

“하하, 그런데도 팔불출 소리를 들을 정도로 최현 씨와 아내 분인 서윤하 씨를 아끼고 사랑하셨어요. 항상 주변에 자랑하고 다니셨거든요.”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가는 서진욱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런 눈.

“어머니인 서윤하 씨는 정말 강한 분이셨어요. 2명의 자녀를 키우면서도 S급 헌터셨고, 활발하게 활동하셨죠.”

그건 나도 어느 정도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정성을 아끼지 않으시면서도 매일 헌터 일을 하러 나가셨다.

혼자서 둘을 키우시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셨겠지.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어요. 10년 전 그날에도 누구보다 앞에서 흉포해진 몬스터들을 상대하셨죠.”

10년 전이라는 말에 무언가 이미지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검은 양복을 입은 비에 홀딱 젖은 남자가 흐느끼며 나를 껴안았던 그 날의 기억이.

“저기, 혹시 그날 서진욱 씨는…….”

콰앙!

“……!”

말을 하던 중 옆에서 튀어나온 묵직한 주먹이 앉아있던 서진욱을 후려쳤고, 건물이 그대로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쌔엥-!

위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돌에 반응하려던 차에, 피를 뚝뚝 흘리는 서진욱이 떨어지는 돌을 베어냈다.

“괜찮아요?”

10년 전 그날, 나를 안고 울었던 그 사람이 누군지, 이제야 기억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