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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67화 (67/176)

67화 : 스승과 제자 (2)

“최현은 내가 데려갈 거야.”

“…네?”

정적.

멍하니 내 팔을 잡고 있던 자기 손을 보더니 황급히 내게서 멀어졌다.

“호오, 차윤지 씨가 그렇게 최현 씨를 아끼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평소보다 더욱 히죽거리는 서진욱이 차윤지 옆으로 다가왔다.

승기를 잡은 포식자처럼 눈을 번쩍거리며 차윤지를 몰아세웠다.

“호오. 최현 씨를. 정말. 아끼고. 계셨군요.”

“…….”

젠장, 차윤지는 어째서 얼굴을 붉히는 거야.

옆에 있는 나까지 대미지를 함께 받는 기분인걸.

“차윤지 씨에겐 죄송하지만, 이번엔 양보해 주시죠. 제자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기엔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표정이 굳어 있는 차윤지를 보고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현재 최강의 헌터로 칭송받고 있는 서진욱의 은퇴는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나에게만 살짝 귀띔했던 것이었기에 이 상황에서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저는 이번 일이 끝나면 헌터를 그만두려고 하거든요.”

“……!”

“으… 은퇴한다고요?!”

차윤지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이신예까지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덮었다.

서진욱이라는 헌터의 은퇴는 그만큼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로 헌터들에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는지 누구나 알고 있을 터였다.

“두 분이라면 이해가 빠르시겠지만, 혹시나 다른 곳에 말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은퇴한다는 말이 퍼지면 더욱 혼란이 가중될 테니까요.”

확실히 서진욱의 은퇴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헌터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일이니까.

“어째서죠?! 갑자기 왜?!”

다소 흥분한 목소리의 차윤지가 서진욱에게 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는 서진욱은 어느 때보다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나에게 처음 말했을 땐 저런 표정이 아니었기에 지금 서진욱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

“계속 헌터로 살아간다고 해도 지금까지처럼 제대로 싸우는 건 힘들 겁니다. 오히려 주변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르고요.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는 건 참 어려운 법이네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 갑자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도망친다니!”

타악!

갑자기 서진욱의 멱살을 잡는 차윤지를 보고 나와 이신예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그래, 윤지야! 진정해.”

오히려 멱살을 잡힌 서진욱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차윤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차윤지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대로 도망가는 건 너무 치사하잖아.”

중얼거리는 차윤지는 그대로 몸을 휙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다.

이신예는 날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차윤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말해도 괜찮은 거예요?”

“차윤지 씨에겐 솔직하게 말해야만 합니다. 그게 예의니까요. 일단 얘기는 이동하면서 하도록 하죠.”

서진욱은 차윤지가 사라진 곳과 반대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차윤지 쪽을 힐끗 보고 서둘러 서진욱을 따라나섰다.

“차윤지 씨는 저에게 라이벌 같은 존재입니다.”

“네?! 하지만…. 전혀 몰랐어요.”

두 사람의 성격이나 스타일이 다르다는 건 알겠지만, 라이벌 같은 관계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애초에 차윤지는 매스컴에 자주 나오지 않았으니까 감춰진 부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진욱이라는 남자는 헌터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최강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그에게 라이벌이라는 존재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공식적으로 저희 사이에 관해서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몰라요.”

어쩐지 즐거운 듯 빙긋 웃은 서진욱은 단숨에 건물 위로 뛰어오르더니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차윤지 씨도 아마 저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제가 그래도 눈치는 빠른 편이잖아요.”

“어련하시겠어요.”

주변에 몬스터가 없는 걸 확인한 그는 다시 내 옆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처음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차윤지 씨는 천재라고 불렸고,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어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SS급 헌터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서진욱 씨는 경험도 많고, 아무리 차윤지 씨가 실력이 좋다곤 하지만, 서진욱 씨와 비교하기엔…….”

“그럼요. 제가 더 강하죠. 아니, 강했죠.”

과거형으로 말하는 서진욱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했다는 건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건가요?”

“글쎄요. 처음 차윤지 씨를 봤을 땐 마치 도끼 같은 느낌이었어요. 강한 임팩트가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죠. 하지만 그녀는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어요.”

내가 봤던 차윤지는 정말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어떻게 해야 상대를 더 쉽게 이길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둘이 싸운다면 제가 이긴다고 확신할 수 없죠. 아무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차윤지 씨는 저를 뛰어넘겠다고 말했어요.”

“초면에… 역시 굉장한 사람이네요.”

“하하하, 그렇죠? 처음엔 그냥 당돌한 친구라고 생각했죠. 저 역시 어렸을 땐 그런 포부가 있었고 그런 패기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으니까요.”

의외였다.

서진욱이라면 뭔가 한창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처럼 자라서 지금 같은 건방진 얼굴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다녔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만날 때마다 저에게 대련을 신청하거나, 최근 공략한 게이트가 어땠는지 물어보거나 하면서 경쟁심을 불태우더군요. 그런 그녀의 도발을 하나씩 받아 주다 보니 어느새 저도 그녀에게 경쟁의식이 생겼죠.”

“‘그래 봐야 어차피 내 아래다’라고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대체 최현 씨에게 제 이미지는 어떻게 된 거죠?”

기운 빠지는 한숨을 뱉어 낸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진심으로 그녀에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매일 같이 그저 살아가기만 하던 제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줬거든요. 그때까진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생각도, 누구와 경쟁한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거든요.”

“그래서 차윤지 씨가 아까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군요.”

서진욱은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마, 반대로 차윤지 씨가 저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저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아직 제대로 이기지도 못했는데, 상대가 혼자서 고꾸라지는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두 사람이 라이벌 관계라는 건 여전히 낯설게 다가왔다.

둘 다 워낙 독불장군에 마이웨이 스타일이니까 남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뭐, 차윤지 씨 얘기는 이쯤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본론?”

“최현 씨를 따로 데려온 이유는 알고 계시겠죠?”

월하백화식의 완전한 계승.

아직 나는 서진욱이 월하백화식을 쓰는 걸 한 번 본 게 전부였다.

배웠다고 말하기도 멋쩍을 수준이지.

“제가 최현 씨에게 차근차근 검술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이번 사태가 끝나고 제 몸이 움직이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거든요.”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하하, 그런가요?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어서인지 크게 감흥이 없네요.”

한참 걷다가 서진욱의 걸음이 멈췄다.

주변을 살펴봐도 안전 구역처럼 보이는 곳은 없었다.

“왜 멈추신 거죠?”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기에 빨리 이동하지 않으면 밤이 되어서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서진욱이 옆에 있어서 크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도착했습니다.”

“……? 여긴 아무것도 없는대요?”

이미 몬스터가 훑고 지나간 곳이라 건물은 엉망이었고, 망가진 자동차만 도로에 널려 있었다.

“저희가 맡은 구역이 바로 여기예요. G-1 구역.”

“아까 지도에서 봤을 땐 G 구역은 없었는데요?!”

“당연하죠. 방금 막 만들었으니까요.”

너무나 당당하고 뻔뻔한 서진욱의 태도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왜죠? 왜 저희는 다른 구역이 아니라 직접 구역을 만드는 거냐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월하백화식을 제대로 가르쳐 드리기 위해서죠.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검술을 마음껏 가르쳐 드릴 수 없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계승되는 검술이었고, 많은 사람 앞에서 검술을 하나씩 가르쳐 주면 모두가 월하백화식을 익히려고 하겠지.

“그럼 저희는 둘이서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건가요?”

“충분하죠. 일부러 몬스터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골목으로 골랐습니다. 경험보다 좋은 배움은 없으니까요.”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몇 번 죽는 건 각오해 두세요. 아니, 몇십 번일 수도 있겠네요.”

“… 그러니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니까요.”

“일단 헌터 스마트폰으로 지금 장소를 지도에 기록해 두세요.”

그의 말대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지도 어플을 실행했다.

헌터 스마트폰은 통신 기능 없이 GPS와 기록 용도로 많이 쓰인다.

배터리가 나간 탓에 이번 안전 구역에서 충전해서 이제야 쓸 수 있게 됐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서진욱이 씨익 웃으며 나를 겨누었다.

“설마…….”

“그 설마죠. 직접 몸으로 부딪쳐 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몬스터가 오지 않을 땐 저와 대련을, 그리고 몬스터가 올 때는 몬스터와 직접 싸워서 경험을 쌓는 겁니다.”

“아무래도 몇십 번 죽는 것도 모자랄 것 같은데요.”

울며 겨자 먹기로 검은 새의 깃털을 장비했고, 에렌 셀을 꺼내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검은 다른 거로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에렌 셀은 대검이라 월하백화식 같은 섬세한 검술을 다루기엔 어려운 감이 있었다.

초월 능력 덕분에 근력이 강해진 내겐 다른 검과 크게 차이가 없었지만, 월하백화식을 쓰면 오히려 넓은 면적 때문에 힘이 분산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버지의 유품이라 들고 있으면 안심이 되거든요.”

“흐음… 그럼 제가 다음에 좋은 대장장이를 소개해 드리죠. 그분께 검 형태를 바꿔 달라고 부탁드려 보죠.”

“네! 알겠습니다.”

차갑게 다른 검으로 바꾸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지만, 서진욱은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꺼내 주었다.

에렌 셀의 형태가 바뀐다고 해도 에렌 셀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가 사용했던 무기를 이제야 내게 맞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설레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상대해 드리죠. 물론 봐주거나 하는 건 없으니까 죽고 싶지 않으시다면 정신 바짝 차리세요. 아참, 그리고 검술을 배우는 동안은 스승님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스승님, 죄송하지만 대련은 못 할 것 같습니다.”

내 손가락이 서진욱 뒤쪽을 가리켰고, 서진욱은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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