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스승과 제자 (1)
“일어났어요?”
눈을 떴을 땐 침대 옆 의자에 서진욱이 앉아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서진욱을 보니까 기분이 묘한걸.
문득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머릿속에 언젠가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혹시 저희 예전에 본 적 있나요?”
너무 어렴풋한 기억이라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날 보고 서진욱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글쎄요. 부모님이 헌터셨다고 하셨으니까,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아닐 거예요.”
내 말에 서진욱은 흥미롭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어째서죠?”
“저희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도 절 일하는 곳에 데려가거나, 다른 헌터를 만나게 한 적이 없으셨거든요. 집에서도 일에 대한 건 절대 말하지 않으셨어요.”
“…….”
어쩐지 서진욱이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사람 오늘따라 왜 이래?
“제법 늦잠을 자셨으니까 이제 일어나시죠.”
“네?”
방을 나가는 서진욱을 보고 바로 시야 아래쪽에 있는 시계로 눈을 돌렸다.
오후 5시?!
젠장, 이렇게 오래 자려고 했던 건 아닌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문득 서진욱이 내가 자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분명 오늘 뭔가 잘못 먹은 게 틀림없어.
대충 세수를 하고 아래로 내려오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일어났네.”
이민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쏘아봤고, 최대한 그녀의 눈을 피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일단 간단하게 상황 설명만 하려고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은 아포칼립스가 발동한 이후로 쉬지 않고 계속 싸운 분들이니까요.”
이성연은 예전에 봤을 때 그대로였다.
묘하게 처져 있는 어깨와 힘없는 눈, 그리고 언제나 침착한 말투까지.
“내일은 본격적으로 브루탈의 밤에 대비해야 하니까 오늘은 마음껏 편하게 휴식을 취해 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내일 밤부터 한동안 지금처럼 편하게 쉬지 못할지도 모르니까요.”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이신예가 몸서리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죠?”
가장 먼저 걱정이 되는 건 율이였다.
잘 때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일어나니까 율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여기보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로 했습니다. 헌터들이랑 지내는 것보다 다른 일반인이 있는 곳이 마음도 더 놓일 테고요.”
확실히 여기 같이 있는 것보단 그쪽이 안전하겠지.
이런 상황이라 율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일 뿐이다.
내가 최전선에서 싸우는 게 결국, 율이를 지키는 일이다.
“지도를 봐 주시죠.”
이성연 뒤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에 지도가 나타났다.
중앙에는 던전이 있고, 그 주변에 붉은색으로 영역이 그려져 있었다.
“이 붉은색 영역은 현재 우리 헌터들이 만든 안전 구역입니다. 베이스캠프로도 불리고 있죠. 각 구역은 던전 공략층처럼 알파벳에 숫자를 붙였습니다. 저희가 있는 곳은 ‘C-3’ 구역입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구역마다 명칭이 적혔다.
지도와 함께 보니까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던전과 가까운 곳에 있는 안전 구역들은 크기가 작고 숫자가 많았다.
아무래도 아직 근처에 남아 있는 사람을 보호하며 기동성 있게 움직이기 위한 거겠지.
반대로 던전과 떨어진 구역들은 크기가 컸다.
이쪽은 일반인이 많이 사는 곳이니 그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한 거다.
“헌터 협회는 현재도 대응을 위해서 다른 헌터들과 긴밀히 연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운용 가능한 헌터 전력을 파악하고 각 구역에 배치하고 있죠. 이번에 합류한 분들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렸고, 방금 협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성연은 주머니에서 곱게 접어 둔 종이를 꺼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차윤지 씨는 B-1 구역, 이민하 씨와 강유성 씨는 F-2 구역, 이신예 씨는 A-1 구역, 공명진 씨는 F-3 구역이네요.”
각자 구역에 배정받았지만, 어째서인지 내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저기, 저는 어디죠?”
조심스럽게 묻자, 다시 한번 종이를 살핀 이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최현 씨는 구역이 나오지 않았네요.”
“아, 저랑 같이 가시면 됩니다.”
뒤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진욱이 손을 살짝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던 서진욱이 내게 다가왔다.
“제가 따로 말씀드렸거든요. 협회에.”
“……!”
순식간에 정적과 함께 이번엔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상황을 살피던 이성연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타악!
“자, 그럼 따로 궁금한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저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은 푹 쉬시길 바랍니다. 제대로 된 휴식도 전투의 일부입니다.”
이성연 덕분에 방금까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풀렸다.
하지만 이성연이 나가자마자 이민하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대체 뭐야?!”
“네? 그게 무슨…….”
잠시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차윤지랑 아는 사이인 것도 모자라서, 서진욱이랑도 친한 거냐고?!”
“하하, 어쩌다 보니…….”
이민하의 표정을 보니 딱히 내가 유명인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걸 질투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오직 어떻게 내가 두 사람을 아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라도 이 말도 안 되는 관계에 대해 궁금했겠지.
아무리 초월 헌터라고 하지만, D급 헌터가 SS급 헌터 둘과 친하다니… 정상적이진 않다.
SS헌터들은 말 그대로 헌터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D급이나 C급 헌터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경우는 드물 테니까.
“어쩌다 보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빨리 알려 주라니까!”
이민하가 떼를 쓰는 중에 서진욱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린 그는 특유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최현 씨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아… 네.”
당황한 이민하가 멍하니 대답했고, 나는 그제야 그녀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진욱이 벽에 몸을 기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하하, 역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건 피곤하네요.”
서진욱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들었지만, 얼마나 심각한지는 잘 모른다.
아포칼립스가 발동했을 때 서진욱은 내게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헌터를 은퇴한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월하백화식을 제대로 보고 익히라고.
“최현 씨는 생각보다 멘탈이 강하시네요. 갑자기 이런 일이 발생하고 며칠 동안 쉬지도 않고 싸우셨는데 크게 동요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뭐, 몇천 번이나 죽음을 겪으면 이렇게 변하네요.”
예전에 정찰팀에 있던 나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담담하게 있진 못했겠지.
“그보다 저는 그럼 서진욱 씨를 따라서 가면 되나요?”
“네. 아마 몇 번 죽고 끝나진 않을 거예요. 괜찮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제자한테 몇 번 죽을 테지만 같이 가자고 하는 스승이 어디 있어.
“갑자기 뜬금없지만,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뭔데요?”
서진욱답지 않게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임무를 하던 중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헌터 일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요?”
“…이건 예상 밖이네요.”
갑자기 서진욱이 부모님 얘기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건 거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니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계셨으니까 어느 정도 기억나지만요.”
무의식적으로 부모님 생각은 잘 안 하려고 한다.
부모님에 관한 건 아픈 기억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워낙 좋은 분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헌터 일을 하면서도 저랑 율이를 잘 돌봐 주셨고, 힘드실 텐데도 저희한테 짜증은커녕 항상 웃어 주셨거든요.”
“그렇군요. 멋진 분이셨네요.”
바닥을 멍하니 보고 있는 서진욱의 표정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어렸을 땐 전 절대로 헌터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저까지 잘못되면 아무 죄도 없는 율이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그런데 피는 못 속이는지 어느샌가 헌터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헌터가 싫진 않으신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힘들게 일했던 모습만 봐서인지 헌터라는 직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버지에게 검술을 물려받고 어쩔 수 없이 되긴 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헌터가 되진 않았겠죠.”
자신의 얘기를 잘 하지 않는 그였기에 나 역시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서진욱의 모습이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정말 곧 떠날 것만 같아서 묘한 불안감이 일렁거렸다.
“사실 헌터라는 직업이 싫지 않아요.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헌터라는 직업이 좋아요.”
흠칫 놀란 서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버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헌터 일을 좋아하셨던 거 같아요. 항상 일하러 갈 때 어머니의 모습은 활기차고 즐거워 보이셨거든요. 어머니가 사랑하던 일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
서진욱은 어쩐지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군요. 자, 그럼 슬슬 출발하시죠.”
“네? 출발하다뇨?”
“저희가 싸울 전장으로 가야죠. 그리 멀지 않으니까 미리 가서 적응하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건물 안쪽을 살폈다.
“하지만, 아직 다른 사람들과 인사도 못 했는데요?”
“아, 인사… 그렇군요. 그럼 잠시 시간을 드릴 테니 다녀오시죠.”
“잠깐.”
인사를 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안쪽에서 나온 차윤지를 보고 급히 멈췄다.
“차윤지 씨?!”
“두 사람 무슨 관계야?”
어쩐지 미세하게 살기를 흘리고 있는 차윤지가 날카로운 눈으로 서진욱을 쏘아봤다.
서진욱은 움찔하더니 평소와 같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범한 사제지간이지요.”
차윤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제지간? 설마 월하백화식의 계승자로 최현을 고른 거야?”
“하하, 무슨 문제라도?”
“왜 하필 최현인데? 아무리 봐도 수상한걸.”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고, 그사이에 따라 나온 이신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아, 또 시작이네.”
“또?”
“저 두 사람 견원지간이거든. 워낙 성격이나 행동이 달라서 절대 섞이지 못하는 물과 기름이라고 할까.”
확실히… 전혀 다른 성격이라는 건 이해가 간다.
항상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서진욱과 직설적이고 차가운 차윤지는 완전 다르지.
“최현은 내가 데려갈 거야.”
“……?!”
갑자기 내 팔을 확 끌어당기는 차윤지의 모습에 모두가 멍하니 넋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