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10년 전의 그날 (2)
“스승님?!”
“언제부터 저를 그렇게 부르셨는지 모르겠군요.”
너무 반가워서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걸 애써 삼켜 냈다.
얼어붙은 하이드노라 위에 서 있는 서진욱의 모습은 그야말로 구세주의 모습이었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여기서 하긴 힘들겠네요. 일단 베이스캠프로 이동하시죠.”
서진욱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은 몸을 벌벌 떨며 한곳으로 모였다.
차윤지의 말처럼 베이스캠프는 우리가 있던 곳에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다.
주변에 철저하게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었고, 머무는 사람도 많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지나 중앙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다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무사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곳의 총 책임자인 이성연이라고 합니다.”
“이… 이성연 씨?!”
“오랜만이네요.”
전에 이중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우리 팀의 리더로 활약했던 남자였다.
성격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는 리더십이 뛰어나고 판단력이 좋은 리더였다.
“어쩌다 보니 베이스캠프 지휘관이 되어 버렸네요. 고생하셨어요. 일단 부상자분들은 이분을 따라가시고, 다른 헌터분들은 이쪽으로 가셔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시면 됩니다. 인원에 맞게 방이 있으니 지금은 쉬는 것만 생각해 주세요.”
“먼저 가 있어 율아.”
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헌터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다들 지금은 다른 것보다 쉬고 싶은 욕구가 커서인지 군말 없이 이성연의 말을 따랐다.
나는 몇 번이나 게이트에서 죽는 바람에 기력이 계속 회복되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 싸움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지.
이곳에 남은 건 나와 차윤지, 그리고 이신예뿐이었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정말 반갑네요.”
“몇 번이나 죽을 뻔했거든! 다행이라고?!”
이성연의 멱살을 잡는 이신예를 보고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역시 이신예는 이런 모습이 어울리지.
그러고 보니 이성연도 신월 길드원이었구나.
“잠깐 한눈판 사이에 사라져 버리다니, 문제아군요.”
서진욱이 약간 힘이 실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율이 생각에 멋대로 이탈하고 행동한 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네.”
서진욱이 씨익 웃음을 짓곤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세 사람도 쉬고 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굳이 듣고 싶으시다고 하니 최대한 빨리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방 중앙에 있는 넓은 테이블 위에는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서진욱의 손가락 끝이 던전을 가리켰다.
“아포칼립스가 발동하고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시가 이런 모습이 됐습니다. 인터넷을 비롯한 모든 정보망이 끊어져서 지금은 무전조차 되지 않아요. 외부에서 다른 사람과 연락할 방법은 ‘통신계’ 헌터 능력뿐입니다.”
“완전 던전 내부와 같네요.”
“그리고 저희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지금 몬스터는 도시를 벗어나 다른 도시까지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몬스터가 도달하기 전에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하네요.”
서진욱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처 도시에도 헌터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긴급 소집으로 모은다면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전력이 될 거다.
계속 전투를 이어가는 건 버겁더라도, 일단 사람들이 피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붉은색으로 동그라미 쳐 둔 곳들이 저희가 만든 임시 베이스캠프들입니다.”
“생각보다 수가 많네요.”
“그것도 문제죠. 일단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지킬 수 있도록 여기저기 만들긴 했지만, 숫자가 많다 보니 방어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작은 베이스캠프들을 하나로 합칠 생각입니다.”
서진욱이 전문적으로 헌터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모습이 낯설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평소에 제자로서 나를 대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죠?”
이신예의 물음에 서진욱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게 최우선입니다. 그 뒤에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와 다른 사항들에 대해 생각해 봐야죠. 무엇보다 문제는 내일 밤이에요.”
“……!”
내일 밤이라는 말에 나와 차윤지, 이신예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어.
내일은 브루탈의 밤으로부터 정확히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만약 내일 밤에 그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정말 누구도 원치 않는 악몽이 될 것이다.
“만약 브루탈의 밤이 일어나면 이 베이스캠프는 지킬 수 있나요?”
“…장담할 수 없어요. 그나마 저와 차윤지 씨가 여기 있다는 게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변수가 많거든요.”
확실히 4명뿐인 SS급 헌터가 둘이나 이곳에 있는 건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브루탈의 밤엔 모든 몬스터가 평소보다 훨씬 강해지고 흉포해지기에 서진욱도 이런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거겠지.
“그렇기에 세 사람도 일단 들어가서 쉬셨으면 합니다. 내일 밤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니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보고 드릴 게 두 가지가 있어요.”
“…아까 그 마력계 헌터인가요?”
위험한 순간에 장수주가 마력계 헌터로 각성했다.
치유계와 통신계도 드물게 나타나는 재능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마력계 헌터는 정말 희귀한 재능이었다.
마력계 헌터는 자연을 다루는 능력을 쓰는데, 몬스터들이 사용하는 마법과 많이 닮아있다.
어떠한 것에 대한 재능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같은 재능을 가진 헌터라도 그 재능의 크기는 다르다.
아까 장수주가 보여 줬던 무시무시한 빙결의 힘은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 힘을 잘 다룰 수 있다면 저희에게 든든할 거예요. 나중에 제가 가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뭐죠?”
서진욱의 물음에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켜내고 말했다.
“던전 밖에서 게이트가 발생했어요.”
“……!”
서진욱의 표정은 창백하게 변해서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눈이 동그래진 그는 머리가 아픈지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괜찮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서진욱의 몸 상태는 이미 한계라고 했다.
그런 몸으로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고 있으니 몸이 견딜 리가 없지.
역시 그는 굉장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사람이었다.
“자세히 얘기해 주시죠.”
나는 율이 때문에 병원까지 이동한 것, 그리고 병원에서 게이트가 발생한 것, 게이트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서진욱에게 말해 주었다.
서진욱의 표정은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보다 일그러져 있었다.
게이트에서 출현한 몬스터가 블루 라벨과 네이비 라벨 몬스터라는 것도 큰 문제였다.
던전 밖에서 그런 강한 몬스터들이 날뛰는 건 베이스캠프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정말 큰일이네요. 일단 이 건은 다른 베이스캠프에도 전달해 두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들어가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서진욱이 나를 불렀다.
“최현 씨.”
“네?”
멈춰서 고개를 돌리자, 서진욱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요.”
“…….”
그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끄덕였다.
입을 열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고 한다는 걸 서진욱은 항상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진욱이라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
“난 씻을 거야.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잔뜩 나. 그 망할 나방 가루 때문이야.”
이신예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그녀가 게이트에 들어온 것엔 내 책임도 있었기에 괜한 불똥이 튀지 않도록 애써 눈을 돌렸다.
이신예와 차윤지가 다른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율이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율이는 간단하게 씻고 나와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눈이 반쯤 감겨 있는 그녀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안 자고 있어. 졸리면 자야지.”
“오빠가 또 다른 곳에 가 버리면 어떡해. 제대로 오는 거 보고 자고 싶었어.”
“…그렇네. 미안.”
율이는 나를 보자마자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어젯밤에 잠깐 잘 시간이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편하게 잘 순 없었겠지.
몇 번이나 죽을 위험이 있었고, 애초에 몸도 안 좋은 아이니까 지금까지 버텨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차윤지는 내 손으로 직접 율이를 지키라고 말했지만, 난 결국 율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아까도 장수주가 아니었다면 율이가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옆에 깔린 이불에 나도 몸을 뉘었다.
참 바보 같은 얘기지만 항상 생각한다.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게 그저 꿈이었기를.
***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저희를 불러 모은 이유가 뭔가요?”
서윤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헌터 협회장에게 향했다.
“애들 밥 줄 시간인데 갑자기 부르면 어떡해요?!”
“크흐흐.”
서윤하는 헌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밝았으며, 실력까지 뛰어났으니 사람들이 그녀를 싫어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최준 역시 사교성이 좋고 항상 주변에 웃음이 넘쳤다.
이 헌터 부부는 헌터들 사이에서 유명했으며, 두 사람은 항상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왔다.
최준이 갑자기 목숨을 잃기 전까지는.
“갑자기 이렇게 소집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 이렇게 헌터 분들을 소집한 이유는 최근 게이트가 이상 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
게이트 이상 현상이라는 말에 서윤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남편인 최준 역시 그가 들어갔던 게이트에서 나올 리 없는 데스나이트에게 목숨을 잃었으니까.
“전부터 기형 게이트가 하나씩 나타나 소중한 동료들의 목숨을…….”
콰앙.
테이블을 내리친 서윤하에게 사람들의 눈이 쏠렸다.
차가운 살기를 흘리고 있는 서윤하는 협회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지겨운 말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알겠습니다. 현재 던전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기형 게이트의 빈도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이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불안정 상태가 최대치가 되는 게 오늘 밤입니다.”
화면을 가리킨 협회장이 안경을 한 번 쓰윽 올리며 말했다.
“오늘 밤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을 위해서 오늘 밤은 여기서 함께 대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기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한 헌터의 물음에 협회장은 깊은 한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없었던 최악의 밤이 될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