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10년 전의 그날 (1)
벌컥!
문이 열렸고 언제든 공격할 수 있게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거기서 나타난 건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차윤지였다.
“뭐 해? 나왔으면 가자.”
“……?”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말하는 차윤지의 모습에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차윤지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 피는 대체…….”
“시끄러. 머리 아프니까 조용히 해.”
“네.”
그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단숨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이신예도 차윤지가 걱정됐는지 한걸음에 달려와서 그녀를 이리저리 살폈다.
“말했잖아. 지키고 싶은 건 자기 손으로 지키라고.”
차윤지의 눈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따듯하고, 강한 것 같으면서도 약한 사람.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밤엔 오히려 숨어 있기 좋았는데, 아침이 되니까 눈이 밝은 놈들이 공격해 오기 시작했어.”
“하지만, 건물 안인데…….”
이민하는 그렇게 말하다가 복도 쪽 천장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1층 천장부터 위층이 통째로 사라진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귀찮은 놈들이 공격해 왔거든. 이미 다 처리했지만.”
방금 게이트에서 굉장히 힘든 싸움을 하고 온 것 같은데, 차윤지를 보면 내가 한 것들이 정말 별거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차윤지라면 모스 퀸을 단숨에 죽이고 ‘내가 다 처리했어.’라고 한 마디로 끝낼 것 같다.
“오빠?! 오빠!”
뒤쪽에 율이가 날 발견하고 단숨에 뛰어와 안겼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얼마나 무서웠는데!”
“…미안.”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여기 더 있는 건 위험해. 이제 막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와서 피곤하겠지만,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해.”
차윤지의 말에 나와 이민하, 이신예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이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던전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순 없었다.
“문제는 안전 구역인 베이스캠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거야.”
이신예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윤지는 처음에 이 주변에 베이스캠프로 삼을 장소를 미리 전해 들었어.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바뀌고 있어. 미리 정해둔 베이스캠프 위치가 그대로일지 모른다는 거지.”
“그럼 어디로 가죠?”
“이미 있던 곳도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어. 지금은 던전에서 멀어지면서 직접 찾는 수밖에…….”
이신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떨궜다.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도시를 목적지도 없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심지어 여기는 대부분이 헌터가 아닌 일반인이다.
그런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역시 여기서 기다리는 게…….”
“아까 몬스터들 공격해 오는 거 못 보셨어요? 여기 있으면 그런 몬스터가 계속 저희를 노리고 올 겁니다.”
다시 정적.
머리를 쓸어올린 이민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일단 출발하죠.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봐야 변하는 건 없어요. 상황이 더 심각해질 뿐이죠.”
빙결의 갑옷으로 장비를 바꾸고 나와 이민하가 선두로 나섰다.
공명진과 강유성이 허리를 맡았고, 후미에서 차윤지가 따라오기로 했다.
“정면에 코볼트 무리! 조금 멀지만, 1시 방향에 윈터 버드 접근 중입니다!”
“코볼트 무리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윈터 버드는 내가.”
공명진과 차윤지가 앞으로 나섰다.
확실히 두 사람이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은 형태였다.
“자자, 긴장하지 말고. 이거 먹어.”
공명진은 이민하가 준 초콜릿을 받고 바로 입에 집어넣었다.
이제 이쪽은 안심인가.
“뒤… 뒤에!”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관절을 기괴하게 꺾으며 다가오는 스켈레톤들이 보였다.
“우리도 놀고 있을 순 없겠네.”
이민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1시간.
쉬지 않고 몬스터와 싸우며 1시간이나 이동했다.
그냥 걷기만 해도 힘든 시간인데, 주변을 계속 경계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이동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잠깐 여기서 쉬도록 하죠.”
커다란 건물은 언제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아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공원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도 나무가 있으면 공중에 있는 몬스터에게 발각되진 않을 테니까.
긴장이 조금 풀리자마자 단숨에 피로가 몰려왔다.
더 앉아 있다간 잠이 들것 같아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는 제가 주변 경계할게요. 쉬세요.”
“…난 괜찮아.”
차윤지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뭐지?
“저기… 혹시나 해서 그런데… 저한테 뭐 화나신 거 있으신가요?”
“내가? 전혀.”
화났네.
억지 부려서 게이트에 들어간 거 때문인가.
이런 얘기를 계속해 봐야 그녀가 좋아할 리 없다.
빨리 화제를 돌리는 수밖에.
“얼마나 더 가야 베이스캠프를 찾을 수 있을까요?”
“아마 이 근처에 베이스캠프가 있을 거야.”
차윤지는 담담하게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이 주변에요?!”
“주변에 높은 빌딩이 없고 시야가 트여 있어서 몬스터의 기습으로부터 안전하거든. 그리고 아까보다 몬스터가 공격해 오는 숫자가 현저히 줄었어.”
확실히 듣고 보니 아까보다 몬스터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쪽 베이스캠프에서 주변 몬스터들을 정리하고 있다는 거겠지.”
“다행이네요. 그럼 곧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겠어요.”
기쁜 표정으로 안도하자, 차윤지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차가운 사람이라고들 많이 얘기하지만, 역시 이럴 때 차윤지만큼 의지가 되는 사람이 없다.
“슬슬 다시 출발하자.”
뒤에서 들려온 이신예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가죠?”
“잠깐만.”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가려던 나를 차윤지가 멈춰 세웠다.
“그날… 미안했어.”
“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사과에 나는 머리를 한참이나 굴려야 했다.
차윤지는 내 시선을 피하고 있을 뿐,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다.
“그날이요?”
“할아버지 장례식 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거든.”
“아…….”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내겐 눈물을 쏟아 내던 그때의 차윤지와 겹쳐 보였다.
그녀는 이 잠깐의 침묵이 버거웠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사과해야 할 건 저인걸요. 제가 제대로 정신만 차리고 있었어도, 할아버지가…….”
“네 탓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그때 일로 가장 힘들었던 건 너일 텐데 몰아세우기만 해서 미안해.”
“아……!”
문득 병원에서 식량을 나눌 때 받은 초콜릿이 생각났다.
인벤토리에서 초콜릿을 꺼내 차윤지에게 건네주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제게 부탁하신 거예요. 의외로 단 걸 좋아하니까 대신 초콜릿을 전해 주라고.”
“……!”
이제야 할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게 됐다.
떨리는 손으로 내 초콜릿을 받은 차윤지를 보고 나는 잠시 그녀가 할아버지와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형씨.”
“발렌. 너 괜찮아? 다리는…….”
“괜찮아. 싸울 땐 미안해. 형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 완전 민폐였다고! 생각이 있다고 하더니 그게 죽는 거냐?!”
마음 같아선 잔뜩 화를 내고 싶었지만, 발렌을 그렇게 만든 것에 내 잘못도 있었다.
“또 그러면 정말 가만 안 둬. 평생 라면 안 줄 거야.”
“뭐?! 그건 좀… 그보다 형씨, 여기 좀 이상해.”
발렌의 목소리가 갑자기 심각하게 변했다.
“몬스터의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데, 아무리 봐도 몬스터가 주변에 보이지 않아.”
“설마… 그럼 엔트 라이온 때처럼 땅속에서 공격해 오는 거 아니야?!”
그 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달려온 차윤지가 검을 뽑아 주변을 살폈고, 다른 사람들도 한 곳으로 모았다.
“다들 조심하세요! 바닥에서 몬스터가 나오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세요!”
쿠구구궁!
이내 땅에서 솟아오른 건 거대한 식물 줄기였다.
땅을 짚고 꾸역꾸역 올라온 몬스터는 ‘하이드노라’라는 몬스터였다.
둥근 머리에 입만 달린 하이드노라는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대형 몬스터다.
땅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먹이가 다가오면 지금처럼 땅 위로 올라와서 사냥에 성공할 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블루 라벨이야!”
“저랑 이민하 씨가 다른 사람들을 지키겠습니다!”
거대한 줄기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고, 묵직한 줄기를 받아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무엇보다 줄기 숫자가 너무 많아.
하이드노라는 이성이 없어서 그저 짐승처럼 먹잇감만을 노리는 몬스터였지만, 줄기가 굉장히 질기고 억세서 본체에 다가가기 힘들다.
앞으로 나선 공명진과 차윤지도 좀처럼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차윤지는 날아오는 줄기를 하나씩 잘라 내고 있었는데, 줄기가 워낙 많아서 줄어드는 게 티도 나지 않았다.
“이건 좀 위험한데?!”
좋은 컨디션이었으면 어떻게든 다 같이 공략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상태는 이미 최악이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는 것도 대충 때운 게 전부였다.
그 상태로 한참을 싸우고 왔으니 지금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터엉!
“이민하 씨!”
방패를 들고 수많은 공격을 버티던 이민하가 묵직한 공격에 한참을 날아가는 게 보였다.
젠장. 이건 정말 위험한데.
내가 쓰러지는 건 둘째치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가 없다.
이대로 가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율이까지……!
더블 라이프 파워는 아직 쿨타임이고, 이모탈도 쿨타임 때문에 쓸 수 없다.
여기서 내가 죽어 버리면 다 끝난다는 뜻이다.
촤아악!
사람들이 있는 땅에서 다른 줄기가 솟아올랐고, 줄기를 피하려고 다들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요! 흩어지면 더 위험……!”
빠악!
사람들에게 잠깐 시선을 돌린 순간, 줄기가 나를 거칠게 날려 버렸다.
바닥을 나뒹군 내 눈에 들어온 건 다른 줄기가 율이를 덮치고 있는 것이었다.
“율아!”
그런 율이 앞을 막아선 건 처음에 만났던 장수주였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몸으로 벌벌 떨며 팔을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오지 마!”
“……!”
장수주의 외침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묘하게 차가워진 걸 느꼈다.
카드드득!
“이… 이게 뭐야?!”
두 사람을 덮치려던 줄기부터 시작해서 이 주변을 온통 뒤덮고 있던 하이드노라가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장수주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력계…….”
옆에 있던 이신예가 중얼거리듯 멍하니 장수주를 바라봤다.
평범한 사람이 헌터의 재능을 얻게 되는 순간을 직접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특히 마력계는 굉장히 드문 능력이었으니까.
“멀리서 보고 서둘러 왔는데, 이미 끝나 버렸군요.”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